책소개
아카데미에서 <미나리>와 맞붙는 영화 <더 파더>의 원작
2021년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남우주연상(안소니 홉킨스), 여우조연상(올리비아 콜맨), 각색상, 미술상, 편집상 등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어 영화 <미나리>와 함께 올 4월 최고 기대작으로 손꼽히는 영화 <더 파더>의 원작 희곡 <아버지>가 출간되었다.
“21세기 최고의 마스터피스!”(The Playlist)
영화에 쏟아진 극찬은 지금껏 동명의 연극이 이룬 성과에 비춰 보면 당연해 보인다. 2012년 초연된 <아버지>는 먼저 프랑스 최고 연극에 수여되는 몰리에르작품상을 수상했다. 전 유럽과 뉴욕 브로드웨이 공연도 성공적이었다. 영국과 미국에서 각각 토니상과 올리비에상을 석권하며 세계무대에서도 작품성과 대중성을 인정받았다. 이를 계기로 프랑스의 떠오르는 스타 작가 플로리앙 젤레르는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프랑스어 희곡이 되었다.
플로리앙 젤레르가 프랑스의 원로 배우 로베르 이르슈를 위해 쓴 <아버지>는 세계 각국의 원로 배우들에게도 무한한 영감과 영광을 선사했다. 영국에서는 케네스 크랜햄이라는 유명 노배우가, 미국에선 세 번이나 토니상을 수상한 바 있는 배우 프랭크 렌젤러가 아버지 ‘앙드레’를 열연해 자국에서 최고연기상을 수상했다. 세계적 흥행의 영향으로 <아버지>는 2016년 한국 관객과도 만났다. 이 공연에서 아버지 역할을 맡은 것은 한국의 안소니 홉킨스, 박근형 배우였다. 그는 이 작품으로 40년 만에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올라 최고의 연기를 보여 주었다. 박근형 배우는 재밌는 극본 때문에 단숨에 역할을 승낙했다며, “진실성이 묻어나는 역할, 동서양 구분 없이 모두가 공감할 주제”를 작품의 매력으로 꼽았다.
앙드레는 최근 딸이 거짓말을 한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런던으로 떠나야겠다던 딸이 오늘은 파리에 머물 거라고 한다. 남편이 없다고 했는데, 갑자기 한 남자가 나타나 자신을 안느의 남편이라고 소개하고, 사위인 줄 알았던 피에르에 대해 안느는 그저 애인일 뿐이라고 잡아뗀다. 집 인테리어도 조금씩 바뀐다. 날마다 가구가 하나씩 사라지는데 딸은 모르는 척 능청을 떤다. 앙드레는 이 모든 게 딸이 자기 몰래 집 전체를 차지해 버리려는 속셈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그게 아니라면 매일 계속되는 딸의 거짓말을 설명할 수 없다. 앙드레의 이 모든 의심은 첫 장면에서부터 암시되듯 앙드레의 치매 때문이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앙드레의 불완전한 기억처럼 혼란스럽게 반복되는 장면들을 지나다 보면 독자는 어느 순간 앙드레와 똑같은 처지가 되고 만다. 앙드레가 마침내 “내가 누구지” 하고 묻기 전까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허상인지 모를 혼돈 속을 독자도 똑같이 헤매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아버지>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의 불안한 심리를 해부한 심리 탐사극이다. 과거와 현재, 진실과 허상이 뒤엉키며 뚝뚝 끊어지는 장면들이 기억에 장애를 겪는 앙드레의 상황을 여실히 보여 준다.
한편 딸 안느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부양해야 할 책임과 자신의 삶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고령화가 사회에서 치매는 익숙한 일상의 단어다. 당사자뿐 아니라 가족 모두의 일상과 삶을 무너뜨리기에 치매는 심각한 사회 문제로까지 인식된다. 치매 환자 돌봄과 그 가족들의 일상 회복을 위해 국가와 지역사회가 나설 정도다. 이런 현실을 반영하듯 드라마와 영화에서도 자주 치매 환자를 그린다. 대부분 이성의 끈을 놓아 버린 치매 환자와 그 때문에 고통을 겪는 가족들의 모습이 눈물을 자아내는 그런 묘사들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치매를 다루는 방식은 좀 다르다. 앙드레는 기억을 조금씩 놓치고는 있지만 아직 위트와 유머를 잃지 않은 사랑스러운 노인이다. 고집이 좀 세고, 사람을 잘 못 알아보고, 했던 말을 또 하는 것 말고는 왕년의 명민함이 여전하다. 그런 앙드레가 점점 자신을 잃어가며 낯선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두렵기는 안느도 마찬가지다. 아버지의 눈빛이 자신을 더 이상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안느는 결국 절망한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아버지를 위해 끝까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낯섦과 두려움의 연속인 부녀의 하루하루가 덤덤한 일상의 언어로 전해지고 있다. 큰 사건도 없고 따라서 극적인 해결도 없다. 하지만 일상이 살얼음판 걷듯 불안하게 이어지는 장면들은 무섭도록 사실적이다. 그만큼 공감과 울림이 클 수밖에 없다.
현대 가족의 불안한 초상, 가족 삼부작
플로리앙 젤레르는 <아버지>에 앞서 <어머니>를, 이어 <아들>을 발표하며 ‘가족 삼부작’을 완성했다. 모두 과거와 현재, 진실과 허상을 교묘히 뒤섞어 현대 가족 구성원의 불안한 심리를 탐색한 작품들이다. 지만지드라마에서는 그중 작가가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리며 쓴 희곡 <어머니>(임선옥 역)를 함께 출간한다. 자녀들을 모두 독립시키고 ‘빈 둥지 증후군’을 겪는 어머니의 심리를 깊이 들여다본 작품이다. 2016년 국립극단 기획으로 <아버지>와 교차 상연되며 국내 관객과 처음 만났다. 윤소정 배우가 어머니 역을 맡아 우울과 광기의 경계에 선 중년 여인을 완벽히 연기하며 화제를 모았다. <아버지>가 플로리앙 젤레르를 세계적 작가로 부상해 준 작품이라면 <어머니>는 프랑스 스타 작가의 탄생을 알린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곧이어 가족 삼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아들>(임선옥 역)도 출간될 예정이다.
200자평
플로리앙 젤레르는 현대 프랑스 연극을 대표하는 극작가다. 가족 삼부작인 <아버지>, <어머니>, <아들>이 잇달아 무대에 오르며 국내에서도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젤레르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겨 준 것은 그의 일곱 번째 희곡 <아버지>다. 자국에서 몰리에르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은 뒤 해외 공연에서도 좋은 반응을 끌어내며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프랑스 연극으로 자리매김한 작품이다. 치매에 걸린 아버지와 그를 부양해야 하는 딸의 불편한 동거를 그렸다. 오늘날 많은 아버지와 딸이 마주하고 있을 현실이기에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지은이
동시대 프랑스 연극의 최고 극작가, 플로리앙 젤레르
플로리앙 젤레르(Florian Zeller, 1979∼)는 오늘날 프랑스 연극을 대표하는 극작가이자 신예 소설가다. 2002년에 첫 소설 ≪인공 눈(Neiges artificielles)≫을 발표해 ‘아셰트 문학상’을 수상하며 프랑스 문단에 데뷔했다. 2004년 파리 마튀랭 극장에서 첫 희곡 <타인(L’Autre)>을 공연하여 관객들의 환호와 비평가들의 격찬을 받았다. 이후 불과 10여 년 동안 6편의 소설과 10편의 희곡들 발표했으며, 그중 절반은 프랑스의 저명한 문학/연극상을 수상했다.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 준 것은 일곱 번째 희곡 <아버지(Le Père)>(2012)다. <아버지>는 2014년 브리가디에(Brigadier)상과 몰리에르상 3개 부문을 석권했고, 영국에서 UK 연극상(2015), 이브닝 스탠다드 최고연극상(2015), 로런스 올리비에상(2016), 미국에서 토니 최우수작품상(2015)을 수상했다. 2016년 <아버지>는 이스라엘 연극아카데미 최우수상을 추가로 수상했고, 오늘날 해외에서 가장 좋아하는 프랑스 연극 중 하나가 되었다. 프랑스의 유력한 주간지 ≪렉스프레스≫는 30대인 플로리앙 젤레르를 동시대 프랑스 최고 극작가로 평가한다. 야스미나 레자, 장뤼크 라가르스, 조엘 폼므라, 플로리앙 젤레르가 주도하는 동시대 프랑스 연극은 과학 기술과 시장 경제의 횡포, 이념의 공백, 일상에 편재한 폭력, 인간관계의 단절과 자기 소외 등 당대의 사회 문제들을 천착하면서 연극 양식의 실험에도 주력해 왔다. 특히 플로리앙 젤레르는 아방가르드극과 풍자희극을 혼합한 포스트모던극 형태로 단조로운 일상생활의 지하 동굴을 탐사하고 있다.
옮긴이
임혜경은 숙명여대 불어불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 후 프랑스 몽펠리에 제3대학에서 로트레아몽 연구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숙명여대 프랑스언어문화학과에서 30여 년간 재직 후 현재 숙명여대 명예교수로 있다. ‘극단 프랑코포니’(2009년 창단) 대표로서 매년 한 편씩 공연 제작을 해 오고 있으며, 번역가, 연극평론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대한민국문학상 번역신인상(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91), 한국문학번역상(한국문학번역원, 2003)을 공역자 카티 라팽과 공동 수상한 바 있으며, 서울연극인대상 번역상(서울연극협회, 2014)을 수상했다. 프랑스어 역서(카티 라팽과 공역)로는 윤흥길의 소설 ≪에미≫, ≪장마≫와 ≪김광규 시선집≫을 비롯해 최인훈 희곡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윤대성 희곡 ≪신화 1900≫, 이현화 희곡 ≪불가불가≫, 이윤택 희곡 ≪문제적 인간-연산≫, ≪이윤택희곡집≫ 등이 있다. 이외에도 ≪한국 현대 희곡선≫, ≪한국연극의 어제와 오늘≫, ≪이현화 희곡집≫ 등 한국 문학과 한국 희곡, 한국 연극 연구서를 프랑스에서 출판했다. 우리말 역서로는 불어권의 동시대 희곡인 ≪고아 뮤즈들≫, ≪유리알 눈≫, ≪난 집에 있었지 그리고 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 ≪동물 없는 연극≫, ≪두 한국의 통일≫, ≪이 아이≫, ≪벨기에 물고기≫, ≪아홉 소녀들≫, ≪단지 세상의 끝≫, ≪쉬지 스토르크≫ 등이 있다. 그 외에 피에르 볼츠의 ≪희극, 프랑스 희극의 역사≫(공역), 카티 라팽의 시집 ≪그건 바람이 아니지≫와 ≪맨살의 시≫(공역)를 번역, 출간했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초연 정보
아버지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남자 : 제 생각에 안느는 아버지를 위해 최선을 다하려는 겁니다.
앙드레 : “최선”, “최선”… 난 그 애한테 아무것도 부탁하지 않았어. 아니지, 그 애가 뭔가 꾸며 대고 있지만 그게 뭔지는 난 몰라. 하지만 무슨 일을 꾸미고 있어. 꾸미고 있다고, 난 알아. 날 그런… 곳에 집어넣으려고 하는 거 같아. 그래, 맞아, 그렇다니까, 그런 사람들을 위한… (“늙은이”를 의미하며 얼굴을 찡그린다.) 그런 신호를 봤어. 그 애 아직은 생각만 하고 있겠지만… 지난번에 거의 다 말할 뻔했다고. 근데 이거 하나는 완전히 분명히 말하지. 난 내 아파트에서 떠나지 않을 거야! 떠나지 않을 거라고!
남자 : 앙드레, 여긴 당신 아파트가 아니에요.
-22쪽
앙드레 : (로라에게) 몇 달 전부터 내가 혼자서 잘해 나가고 있다고 저 애한테 아무리 설명을 해도, 쟤는 내 말을 안 들어요. 안 듣는다니까. 마침 당신이 여기에 와 있고, 당신 직업이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이라니까, 어쩌면 당신이 날 도와서 저 애한테 분명히 설명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난 그 어떤, 누구의 도움도 필요없어요. 그리고 난 이 아파트를 떠나지 않을 거예요. 난 단지 사람들이 날 조용히 내버려 두길 바라는 것뿐이에요. 만일 당신이 친절하게도 그걸 저 애한테 잘 설명해 준다면, 아주 고마울 겁니다. 그게 전부예요. (그는 자기 잔을 비운다, 일어나 자기 호주머니에서 지폐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는다, 마치 바에서 술값 계산을 치르듯이) 오늘은 이만. 만나서 즐거웠어요. 나 먼저 갈게요.
-41쪽
안느: 좀 전에… 아빠가 날 못 알아봤을 때… 내가 저녁거리 사러 내려갔을 때. 뭔가… 모르겠어. 내겐 충격이었어.
피에르: 이해할 수 있어.
안느: 너무 힘들었어.
피에르: 이리 와, 안아 줄게.
안느: 아빠 눈을 봤어. 날 못 알아보는 거야. 전혀. 아빠한테 내가 모르는 사람이었다니까.
피에르: 익숙해져야 돼.
안느: 난 못하겠어.
피에르: 내가 보기엔 당신은 잘하고 있어.
안느: 아니야. 가끔은, 절대로 못할 것 같단 생각이 들어. 그리고 엘리스 이야기를 계속한다니까. 아빠가 걔 얘기를 하면 뭐라고 말해 줘야 할지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피에르: 이리 와…
-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