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량스추(梁實秋, 1903∼1987)는 중국을 대표하는 산문 작가임에도 오랫동안 문학 활동이나 문학사적 성과에 대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그 배경에 그의 ‘항전무관론’이 있다. 1937년 일본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하자 중국 문단에 ‘항전론’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량스추는 “문학에서 중요한 것은 제재의 문제가 아니라 작가의 태도와 작품의 재질에 달려 있”음을 강조하며 이른바 ‘항전무관론’을 펼쳤다. 이에 대해 루쉰을 비롯해 좌익 작가들이 량스추에게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량스추는 무익한 논쟁을 중단하고 이 책 《아사소품》 집필에 집중해 자신의 문학적 소신을 글로 펼쳤다.
《아사소품》은 량스추가 1939년 봄, 충칭 베이베이로 이사 와서부터 1947년까지《성기평론(星期評論)》과 《세기평론(世紀評論)》에 칼럼 형식으로 연재했던 글들을 묶어 1949년 단행본으로 출간한 산문집이다. 이 책에서 량스추는 ‘아사’라고 이름 지은 집에서 보고 듣고 느낀 평범한 일상생활 속 갖가지 인성의 모습들을 이성적이고 관조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아사소품》은 대단히 거대한 주제를 다루지는 않았어도 자칫 가볍게 지나칠 수 있는 세상의 이치를 유쾌하면서도 날카로운 필치로 밝히는 책이다. 특히 량스추 특유의 유머가 돋보이는데, 많은 학자들은 그를 당시의 린위탕(林語堂) 등 이른바 유머의 대가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고 평가한다. 또한 량스추는 작품에서 서양 문화와 중국 문화를 곧잘 비교하며 살펴봤는데, 하나의 제목 아래 서로 다른 문화와 각 시대의 명인, 명언, 사례에서 나타나는 공통성을 강조하며, 시공을 뛰어넘는 보편적인 인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만큼 《아사소품》은 가깝게는 남자와 여자, 아이와 노인, 주인과 하인 등 각종 인간의 비겁함과 잔인함, 게으름과 허세, 만족할 줄 모르는 인성의 모습을, 더 나아가서는 각종 사회적 차별과 처세에 관한 인성의 특징을 펼친 ‘인성의 백과사전’이라 할 것이다.
그의 대표작이기도 한《아사소품》은 출간되자마자 “일상생활 속에서 삶의 흥취를 찾으며, 평범함과 일상을 시적 경지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와 노력이 돋보인다”라는 찬사가 쏟아졌으며, “량스추는 성정(性情), 학식과 수양을 한데 녹였고, 고상함과 명사(名士), 학자적 풍모를 갖춰 중국 현대문학사에서 저우쭤런(周作人)에 필적할 만한 산문의 대가다”라는 역사 평가가 내려졌다.1949년 초판 발행 이래 지금까지 300여 차례 재판을 거듭했고, 20세기 중국 현대 산문집의 최대 판매 부수를 기록했다.
200자평
중국 현대 산문 작가 량스추(梁實秋, 1903∼1987)의 대표 산문집이다. ‘아사’라고 이름 지은 집에서 지내며 보고 듣고 겪은 평범한 일상생활 속 갖가지 인성의 모습들을 짧지만 핵심을 찌르는 필치로 담았다. 이 책으로 량스추는 “중국 현대문학사에서 저우쭤런(周作人)에 필적할 만한 산문의 대가”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1949년 초판 발행 이래 지금까지 300여 차례 재판을 거듭해 20세기 중국 현대 산문집의 최대 판매 부수를 기록했다.
지은이
량스추(梁實秋, 1903∼1987)는 1903년 1월 6일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11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원명(原名)은 량즈화(梁治華)이며, 자(字)가 스추(實秋)다. 그의 부친인 량센시(梁咸熙)는 청나라 말 최초의 관립(官立) 외국어전문학교인 경사동문관(京師同文館)의 첫 입학생으로, 졸업 후 경사(京師)경찰청에서 근무했다. 그의 부친은 신문물의 수용에 매우 적극적이었을 뿐 아니라 중국 전통 문화를 중시했으며, 특히 금석학(金石學)과 소학(小學)에도 조예가 깊었다. 전통과 현대를 모두 중시하던 부친의 태도는 량스추의 어린 시절 교육에 큰 영향을 미쳤다. 량스추는 유년 시절 학당에서 정통 유학 교육을 받았고, 1915년 여름 오늘날 칭화대학(淸華大學)의 전신인 칭화학교(淸華學校)에 입학해 신식 교육을 받으며, 8년 동안 미국 유학 준비 과정을 거쳤다. 그가 칭화학교에 재학하던 1919년에 근대 시민운동인 5·4운동이 일어났고, 당시 그는 적극적으로 신문학(新文學) 활동에 참여했다. 그는 칭화학교에 다니면서 활발한 문학 활동을 하며, 다양한 벗과 교류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한 학년 선배였던 원이둬(聞一多)는 량스추가 건강과 존엄을 중시하는 문학 관념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훗날 그는 원이둬와 함께 《창조주보(創造週報)》, 《창조월간(創造月刊)》에 시와 소설을 발표했다.
1923년 여름에 미국 유학길에 오른 량스추는 콜로라도대학교 영문과를 거쳐 하버드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해 영문학과 문예이론을 전공했다. 그는 그곳에서 어빙 배빗(Irving Babbitt) 교수의 ‘16세기 이후 문예 비평’을 수강하면서 해박한 지식에 탄복하고, 그의 신인문주의 사상을 접하게 된다. 량스추는 5·4신문학운동에 대해 이성이 결핍됐고, 감정을 무절제하게 추구했다고 비판했는데, 이러한 관점은 이전의 문학관과 확연히 달라졌다. 1926년 그는 약혼녀 청지수(程季淑)와 결혼을 위해 2년 더 남은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길에 오른다.
귀국 후 량스추는 오늘날 난징대학(南京大學)의 전신인 동남대학(東南大學)에서 교편을 잡았고, 원이둬와 쉬즈모(徐志摩) 등과 함께 월간 《신월(新月)》을 창간하면서 편집장을 맡았다. 그는 《신월》을 거점 삼아 신인문주의와 자유주의적 문학관에 기반하여 문학 비평, 창작 활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그가 문학 활동을 전개하던 1930년대 중국문단은 계급적, 민족적 갈등 구조 속에서 혁명 담론이 주류를 이루던 때였다. 이 시기 그는 문학의 가치를 ‘계급성’과 ‘혁명’을 위한 목적에 한정 짓는 데 반대하며, ‘인성’과 ‘이성’으로써 문학의 표준을 세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로 인해 그는 당시 루쉰을 비롯해 좌익 작가들로부터 맹렬한 공격을 받았고, ‘인성론’과 ‘계급론’을 둘러싼 공방이 오가면서 루쉰으로부터 ‘집 잃은 자본가의 힘없는 주구’로 매도됐다.
이후 1937년 일본이 중국에 대한 전면 침공을 개시하자 중국 문단에서는 민족의 구망(救亡)이 그 어떤 것보다 우선한다는 항전 담론이 주류를 차지하게 된다. 이때 량스추는 《중앙일보(中央日報)》 〈편집자의 말〉에서 “우리는 항전과 관련된 제재를 가장 환영합니다. 하지만 항전과 무관한 제재라도 진실하고 유창하다면 괜찮으며, 억지로 항전이라는 말을 떼어다 붙일 필요는 없습니다”라며 항전은 하나의 제재일 뿐 절대적으로 좇아야 하는 가치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위대한 문학의 요건을 갖추기 위해서는 고정적이고 보편적인 인성에 기초해야 하며, 인간의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감정과 사상이어야 합니다”라면서 문학에서 중요한 것은 제재의 문제가 아니라 작가의 태도와 작품의 재질에 달려 있음을 강조했다. 이른바 ‘항전무관론’으로 인해 그는 문예계에서 공격 대상이 됐다. 결국 그는 논쟁을 중단하고 《아사소품》 산문 창작을 통해 일상생활 속에서 보편적 인성에 대한 가치를 찾으며, 자신의 문학관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이후 1946년 량스추는 충칭을 떠나 베이징으로 돌아가 베이징사범대학에서 교편을 잡지만, 국공내전(國共內戰)이 격렬해짐에 따라 홍콩을 거쳐 광저우(廣州)로 가서 중산대학(中山大學)에서 교편을 잡다가 1949년에 타이완으로 이주했다. 그는 타이완에 정착한 뒤 타이완사범대학 영문과에 재직하면서 교육과 산문 창작, 사전 편찬 및 번역 작업 등에 매진했다. 1966년 정년퇴직 후 그는 미국과 타이완을 오가며 노년을 보내다 1987년 11월 3일 타이베이에서 향년 84세로 별세했다.
그는 일생 동안 2000여 만 자에 달하는 글을 남겼는데, 주요 저작으로 ‘아사(雅舍)’ 계열로 대표되는 산문집과 《편견집(偏見集)》, 《추실잡문(秋室雜文)》, 《괴원몽억(槐園夢憶)》 등이 있고, 《원동영한대사전(遠東英漢大辭典)》을 주편(主編)했다. 또한 그는 번역 대가로서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2년 뒤인 1928년에 맥스 비어봄(Max Beerbohm)의 《행복한 위선자(The Happy Hypocrite)》를 번역한 이래 1968년 《셰익스피어 전집》 40권을 완역해 서양의 각종 소설, 산문, 시, 희곡 등 장르에 걸쳐 방대한 번역 성과를 남겼다.
옮긴이
구문규(具文奎)는 숭실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중국사회과학원(中國社會科學院)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국립 강릉원주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20세기 중국문학의 시대정신》, 《중국문학이야기》 외 다수가 있고, 옮긴 책으로 《들풀》, 《중국인이 바라본 세계화와 중국 문화》 등 여러 책이 있다.
차례
아사 雅舍
아이 孩子
음악 音樂
편지 信
여자 女人
남자 男人
서양을 흉내 낸 죄 洋罪
겸양 謙讓
옷 衣裳
결혼 예식 結婚典禮
병 病
익명의 편지 匿名信
제육륜 第六倫
개 狗
손님 客
악수 握手
장기 두기 下棋
글씨 쓰기 寫字
그림 전시회 畫展
얼굴 臉譜
중년 中年
송별 送別
여행 旅行
안하무인 旁若無人
시인 詩人
자동차 汽車
흥정하기 講價
돼지 猪
이발 理髮
새 鳥
거지 乞丐
운동 運動
의사 醫生
가난 窮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1.
손님은 고상할 필요까지 없지만, 적어도 첫째, 물가의 오르내림을 이야기하지 않고, 둘째, 관료 사회의 부침을 이야기하지 않으며, 셋째, 보험 가입을 권유하지 않고, 넷째, 종교 신앙을 권유하지 않아야 한다. 신이 나서 왔다가 흥이 다하고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즐거움 중 하나다.
–<손님> 중에서
2.
내가 장기 두기 제일 싫어하는 부류의 사람은 교양이 흘러넘치는 사람이다. 그런 이는내가 무더기로 장기 알을 먹고 차(車)를 먹어도 표정은 차분하고 화도 안 내며, 별로 개의치 않아 따분하고 재미가 없다. 군자는 다툼이 없다지만 장기는 다투는 것이다.
–<장기 두기> 중에서
3.
한 사람에게 하나의 얼굴만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여자라면 말할 필요 없이 “조물주는 여자에게 얼굴 하나를 주셨고, 여자는 또 하나의 얼굴을 만들었다”. 화장하지 않는 남자의 얼굴에도 ‘커튼’이 있어 밖에서 하나의 얼굴로 돌아다니다가 적당한 때에 커튼처럼 말아 올리고는 또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가 그 우언이 아니던가?
–<얼굴> 중에서
4.
나는 송별하길 원치 않으며, 나 역시 송별받길 원치 않는다. 내가 진정으로 차마 헤어지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별하는 그 순간은 마치 수술하는 것 같을 것이다. 수술하는 장소에서는 관례대로 우선 마취제를 써야 하는데, 환자가 몽롱한 가운데 그 고통을 지나치게 해야 하는 것처럼 이별의 고통도 제일 좋기로는 피하는 것이다. 한 친구는 “당신이 가면 난 나가지 않을게요. 하지만 당신이 온다면 비바람이 불어도 마중 나갈 겁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러한 심정이 제일 마음에 든다.
–<송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