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불신과 혐오의 시대, 우리는 어떻게 다시 연결될 수 있을까
오타쿠와 관광객 그리고 소셜 미디어에서 발굴한 연대의 사상
각자도생이 시대의 정언명령으로 자리 잡으면서 사회에 불신과 혐오가 만연해졌다. ‘타자를 존중하라’는 옳은 당위를 내세우던 전통 인문 사상 또한 갈수록 힘을 잃고 있다. 아즈마 히로키는 이 ‘현실의 곤경’과 ‘사상의 곤경’을 동시에 극복할 수 있는 타자 철학을 정립하려 한다. 모든 연대와 결속이 해체된 상황에서 어떻게 다시 연결을 창조할 수 있을까? 사상은 여기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
이 책은 데리다론에서 출발해 오타쿠론으로, 관광객론과 정보환경론으로 이어져 온 아즈마 사상의 궤적을 좇는다. 연결에 ‘실패할 가능성’을 뜻하는 ‘오배(誤配)’의 긍정적 잠재력, 원자화된 문화 소비자인 ‘오타쿠’를 통해 본 포스트모던 사회의 구조, 세속적이고 무책임하되 새로운 연결을 창조해 내는 주체인 ‘관광객’의 가능성, 21세기 정보 환경에서 공공성을 재구성하는 데 이바지할 ‘일반의지 2.0’ 개념의 함의 등을 꼼꼼하게 살펴본다.
아즈마의 모든 작업은 현실을 부인하거나 외면하는 대신 마땅히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현실 변화와 동떨어져 당위만을 반복하는 사상은 무력하고, 또 교만하기 때문이다. 날로 원자화하는 현실에 대한 냉철한 판단, 소통 환경 변화에 대한 지속적 관심을 바탕으로 철학과 비평의 쓸모를 천착해 온 아즈마 사상의 요체를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아즈마 히로키(東浩紀, 1971∼ )
일본의 철학가이자 비평가. 현대 사상과 서브컬처, 정보사회론 등을 종횡하며 동시대 사상의 외연을 확장해 왔다. 1971년 도쿄에서 태어나 1994년 도쿄대학교 교양학부 과학사·과학철학 분과를 졸업했고, 1999년 동 대학원 총합문화연구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3년 가라타니 고진이 주재하던 비평지 ≪비평 공간≫에 “솔제니친 시론”을 발표하며 등단했고, 2002년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게이오의숙대학교, 고쿠사이대학교, 도쿄공업대학교, 와세다대학교 등에서 교수를 지냈다. 2013년에 대학을 떠나 잡지 ≪겐론≫을 발행하는 출판사 ‘겐론’의 대표 겸 편집장으로 있다. 1999년 첫 저서이자 박사 논문이기도 한 ≪존재론적, 우편적≫으로 제21회 산토리학예상을 수상했고, 2010년에는 장편 소설 ≪퀀텀 패밀리즈≫로 제23회 미시마유키오상을, 2015년에는 ≪약한 연결≫로 기노쿠니야 인문대상을, 2017년에는 ≪관광객의 철학≫으로 제71회 마이니치 출판문화상을 수상했다. 이밖에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일반의지 2.0≫ 등 여러 저서를 발표했다.
200자평
‘타인을 존중하라’는 간단한 명제가 간단치 않게 된 지 오래다. ‘공동체’나 ‘타자’를 당위적으로 내세우는 전통 인문학은 무력해졌다. 아즈마 히로키는 현실을 부인하거나 외면하는 대신 마땅히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연대와 결속이 해체된 상황을 올곧게 직시하며 현실적 해법을 모색하고 사상의 쓸모를 부단히 재고한다.
지은이
한송희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미디어문화연구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세종대학교 문화산업경영 융합전공 초빙교수로 있다. 미디어 문화 전반 재현과 표상, 담론의 정치학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논문으로 “한국 문학장에서 ‘정치적 올바름’은 어떻게 상상되고 있는가?: ≪82년생 김지영≫ 논쟁을 중심으로”, “영화 <벌새>가 보여주는 페미니즘 정치미학의 (불)가능성”, “재현 불/가능성과 타자 윤리: 조르조 아감벤과 아즈마 히로키의 논의를 중심으로”, “영화와 ‘정치적 올바름’에 관한 논쟁: <캡틴 마블>과 <어벤져스: 엔드게임>, <인어공주>를 중심으로”, “가난 재현의 정치학: 영화 <기생충>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
차례
해가 지지 않는 세계와 해가 뜨지 않는 세계
01 동물(화)
02 2층 구조
03 오타쿠
04 데이터베이스 소비
05 우편과 오배
06 관광
07 다크 투어리즘
08 관광객(a. k. a. 우편적 다중)
09 검색어
10 일반의지 2.0
책속으로
아즈마의 모든 작업은 현실을 부인하거나 외면하는 대신 마땅히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비평이 “어떤 특정 작품이나 특정 사건을 문화적·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대상처럼 각색하는 것, 다시 말해 특수성이 전체성과 관계있는 듯한 환상을 제공하는 것”이고, 철학이 여기에 무한한 자원을 제공하는 ‘사유의 보고(寶庫)’라면, 양자가 사적 이해를 위한 도구로 쓰이거나 온라인 쇼핑물에 게시된 상품 이미지처럼 존재한다고 한들 문제될 것은 전혀 없다. 도리어 문제는 “모든 담론이 수다 거리가 되는” 것을 “사상이나 비평의 장소가 없어”지는 것과 동일시하는 경직된 사고이고, 그와 같은 사고가 암묵적으로 전제하는 ‘수다 거리’와 ‘수다 거리가 아닌 것’을 구분하는 감각, 즉 ‘경박함’과 ‘진지함’을 분리하는 감각이다. 이런 깨달음은 아즈마가 계속해서 ‘삐딱선’을 타게 한 동인으로 작용했다. 아즈마는 점차 철학자‘답지 않게’ 문장을 쉽게 쓰거나 일상 용어로 가득한 글을 썼고, 필요에 따라 부정적 함의가 다분한 표현을 의도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아즈마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의 풍토를 되돌리거나 바꾸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국면에서 유의미한 가치를 발굴하고 이를 다시 보편과 공통의 사유 계기로 전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_ “해가 지지 않는 세계와 해가 뜨지 않는 세계” 중에서
아즈마는 ‘인간과 동물’이라는 이항 대립과 ‘개인ᐨ시민ᐨ국민ᐨ국가ᐨ진보’라는 단편적·단선적 인식으로는 결코 우리가 목도하는 현실을 선명하게 포착하거나 적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그간 인문학이 당위적 전제로 삼아 온 사유 체제 자체를 심문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아즈마는 최근 몇 세기 동안 글로벌리즘이 꾸준히 확산하는 와중에 그 반동으로서 내셔널리즘 역시 강화된 양극화 현상에 주목했다.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단일한 ‘네이션(nation)’ 따위는 존재하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 있는 듯하면서도 여전히 물리적 경계와 영토로 분리된 시대다. 게다가 2010년대 후반, 세계 전역으로 흩어진 난민들 앞에서 개별 국가들이 빗장을 걸어 잠근 행태만 보더라도 내셔널리즘은 잔존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글로벌리즘이 내셔널리즘을 대체하거나 파괴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저 내셔널리즘의 맞은편에 그것과 전혀 다른 질서가 새로이 등장했을 뿐이다.
_ “02 2층 구조” 중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실패할 가능성이 적은 존재로 여긴다. 편지가 늘 성공적으로 배달되는 것이 아님에도 배달 실패를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발송되듯 말이다. 그래서 아즈마에게 ‘착각’은 또 한 번의 시도를 하게 하는 결정적 계기이자 무한한 동력이다. 실패하고야 마는 시도일지라도 착각을 통해 지속된다. 공공성의 기획에서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는 아즈마의 주장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실패했을지라도 그 중간의 어느 지점, 찰나에 느꼈던 알 수 없는 연결감, 결속과 비슷한 무언가가 있었던 것 같은 느낌, 이 ‘착각’이 다음 연대를 다시 시도하게 만든다.
_ “05 우편과 오배” 중에서
민주주의 2.0은 사람들이 서로를 측은해하며 연결을 이룩해 가지만 동시에 그 어떤 이념이나 사상과는 격리되어 사적 영역에 가두어진 세계에서 출몰한다. 전통적 사유를 고집한다면 이는 민주주의의 ‘위기’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온라인 네트워크의 관점에서 본다면 오늘날의 정보사회는 인구 70억에 이르는 세계를 ‘친구의 친구의 친구의 친구’로 이뤄진 공동체로 재조직할 수 있는 ‘기회’다. 이처럼 한없이 소박한 사적인 공공에서 민주주의의 희망을 싹틔우는 일. 그것이 루소와 프로이트, 로티와 트위터를 가로지르며 아즈마가 펼치는 미래의 꿈이다.
_ “10 일반의지 2.0”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