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초판본 한국 근현대소설 100선’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1914년 박문서관에서 나온 판본의 표기법을 그대로 살렸다. 지금의 독자들은 아래아 자가 가득한 지면에 당황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고색창연한 시대에도 연애는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최찬식의 소설 ≪안의 성≫은 신구 세대 모두가 이해 가능한 자유연애를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1910년대의 사회에서 자유연애는 가문과 신분을 중시하는 당대 문화적 상황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것일 수 있지만, 최찬식은 그의 소설 속에서 그것을 이해·수용될 수 있는 것으로 그려낸다. 그의 소설에서 ‘이십 세기 청년’인 김춘식의 자유연애가 구세대에게 허락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신학문을 한 인물을 중시하는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 사회에서 “양 가문의 세교 전도와 가문 출신, 그리고 그 덕행을 혼인 성립의 요건으로 삼”은 데에 반해서, 최찬식의 소설은 가문보다 인물이라는 요건을 더 중시한다.
김상현은 통학하는 길에서 만난 어떤 여학생의 ‘어여쁜 모습에 반해’ 졸업식 날 쫓아가서, 그 여학생이 박정애라는 것과 오빠 박츈식이 비천한 생선 장수라는 것을 확인하고, 마포 동리 동장 성운경에게 혼담을 주선할 것을 청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김상현이 가문과 위세보다도 그 여학생의 인물과 그 인물의 지식이라는 요소를 결혼 결정의 중요 사항으로 삼는다는 사실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김상현의 태도를 구세대인 어머니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결혼이 가문의 어른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가문 어른조차 당사자에게 맡기려는 태도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는 당대 사회에서 비천한 가문이라도 신학문을 통한 새로운 신분의 상승이 가능함을 묵시적으로 인정하고 있음을, 나아가 그 만큼 반상의 차별이라는 가문 의식이 현저히 약화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가문보다 인물을 우선시하는 자유연애 문화는 김상현의 어머니를 비롯한 구세대에게도 소통되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김상현의 자유연애란 그가 자신의 삶(연애, 결혼)을 스스로 책임지는 계몽 주체 되기의 양상을 띠는 것이다.
그리고, 자유연애를 통해서 결혼한 김상현은 그의 여동생 영자와 이웃 처녀 봉자의 방해로 인해 결혼생활의 위기에 처하고 이혼 문제를 겪게 되는데, 이때 그가 택한 행동은 세계 주유다.
김상현의 주유는, 조선에서 시작해서 중국, 인도, 유럽을 거쳐 아프리카와 호주와 남양 제도로까지 이어진다. 김상현은 주유 이후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는데, 돌아오자마자 자기 가계의 갈등을 해결하는 주체가 된다. 이는 자기 계몽의 한 과정이라 할 수 있다.
200자평
1910년대 서울에서 연애를 하는 이야기. 당시로선 파격적으로 ‘첫눈에 반해 사랑이 이뤄지는’ 플롯을 담았다. 더구나 집안의 어른들마저 자유연애 의사를 존중한다. 작품 속 갈등 양상을 세계 일주를 매개로 해 풀어 나가는 데, 이건 과연 옳은 방법이었는지 알아보자.
지은이
작가 최찬식(崔瓚植)은 1881년 음력 8월 16일에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호는 동초(東樵), 해동초인(海東樵人)이다. 어린 시절에 광주 사숙(私塾)에서 한문을 배웠으며 아버지 최영년(崔永年)이 설립한 시흥학교에서 신학문을 접했고, 관립 한성중학교를 졸업했다.
1910년대에 잡지 <신문계(新文界)>와 <반도시론(半島時論)>의 기자로 활동하고 중국 소설집 ≪설부총서(說部叢書)≫를 번역하는 것을 계기로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추월색(秋月色)≫을 1912년에 발간한 이후, 1913년 잡지 <신문계>에 금강산 유람기인 <금강은 천연의 공원>을 4∼11월호에 7회 연재했다. 1914년에는 신소설 ≪해안(海岸)≫을 <우리의 가정> 1∼11월호에 연재했고, 신소설 ≪금강문(金剛門)≫과 ≪안의 성≫을 발간했다. 1916년에 신소설 ≪도화원(桃花園)≫을 발간하고, 잡지 <신문계> 8∼9월호에 <세계 절승 금강산>이란 제명으로, 그리고 그해 9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금강산의 일폭>이란 제명으로 금강산 유람기를 다시 연재했다. <반도시론>에 1917년 5월호에 단편소설 <종소리>를 게재했고, 1918년에 신소설 ≪삼강문(三綱門)≫을, 그리고 1919년에는 신소설 ≪능라도(綾羅島)≫를 발간했다.
1921년 11월에 잡지 <신민공론>에 단편소설 <동정의 눈물>을 발표했다. 1924년에 신소설 ≪춘몽≫을, 그리고 1926년에는 ≪자작부인≫과 ≪용정촌≫을 발간했다. 그 이후부터 문필활동이 눈이 띄지 않는다. 1951년 최익현(崔益鉉)의 실기(實記)를 쓰던 중 1·4후퇴로 피난하다가, 1월 10일 병으로 사망했다.
엮은이
강정구(姜正求)는 1970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1988년에 춘천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상경해서, 경희대 국문과에서 대학생활을 했다. 1992∼1995년에 경희대 대학원 국문과에서 석사과정을, 그리고 1995∼2003년에 동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대학원 시절에는 주로 시인론에 주력했다. <김지하의 서정시 연구>를 석사학위 논문으로, <신경림 시의 서사성 연구>를 박사학위 논문으로 썼다. 논문 <신경림 시에 나타난 민중의 재해석>, <탈식민적 저항의 서사시>, <1970∼1990년대 민족문학론의 근대성 비판>, <진보적 민족문학론의 민중시관 재고>를 썼다.
차례
안의 성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즉시 신의쥬 시가의 새로 번창함을 본 후 곳 압녹강 쳘교를 건너 동쳥텰도를 타고 안동현 봉황셩을 지나 봉쳔부의 다다러 시가의 번셩함과 물화의 교통하난 상태를 관찰하고 계문연수를 지나 북경에 드러가니 가옥의 굉걸함과 물산의 풍부함이 평일에 듯던 바에셔 지남으로 경탄함을 마지 아니하고 그길로 남쳥텰도를 죳차 상해에 다다러셔 동셔양 인물의 폭쥬병진하난 셩화를 구경한 후 남경 오송의 문물을 사랑하고 한가한 자취로 동졍군산과 소상츈슈에 노라 리백 간 뒤에 오래 한가하던 강남풍월을 위로하니 발셔 떠난 지가 오륙 개월이라.
어언간 삽삽한 셔풍이 가을을 재촉하고 즉즉한 츙셩은 불평함은 읍쥬어리니 이때 비록 심긔가 평화한 사람이라도 여관 한등에 객회가 업지 못할지어날 황차 졍애의 인연을 끈코 노모의 슬하를 떠난 상현의 회포야 과연 엇더하리오. 깁고 깁흔 마음속에 항상 나를 사랑하시난 우리 어머님 내를 못 이져 하난 우리 졍애 하난 회포난 묘묘히 생각 안이 나난 때가 업시 지내나 장부의 한번 결심한 마음을 즁도의 졍지하난 것은 불가한 줄 아난 상현이라 다시 태셔의 두류코자 상해로브터 비로소 윤션에 올나 태평양 너른 물결을 깨트리고 인도양을 횡단하야 영영 인도에 드러가 열대디의 동식물이며 새로 발ㅅ달되난 공업품을 낫낫히 시찰하고 다시 지즁해를 통하야 쳐음 구라파의 도착하니 집 떠날 때의 노자난 얼마나 가지고 나셧던지 저간에 모다 쇼모가 되고 다만 젹슈공권이라 하릴업시 유명한 졍치가 재산가 등을 차자다니며 자긔의 셰계 쥬류의 취지를 셜명하매 간 곳마다 지극히 환영하며 영쥰한 채화를 창양하야 다슈한 긔부금을 보죠하난지라 이때난 자긔가 집에셔 가지고 나온 여비보다 오히려 풍죡히 쓰게 되니 흡사한 쾌쇼년의 무젼여행(快少年無錢旅行)이 되얏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