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수필선집’은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공동 기획했습니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는 한국 근현대 수필을 대표하는 주요 수필가 50명을 엄선하고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를 엮은이와 해설자로 추천했습니다. 작고 작가의 선집은 초판본의 표기를 살렸습니다.
무애 양주동은 생전에 세 권의 수필집을 남겼다. 첫 수필집은 1960년 발간한 ≪문주반생기(文酒半生記)≫이고, 두 번째 수필집은 1964년 발간한 ≪인생잡기(人生雜記)≫, 세 번째 수필집은 1981년에 발간한 ≪지성의 광장≫이다. 이들 수필집에는 인생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드러내는 에세이에서부터 일상생활의 사소한 이야기를 제시하는 미셀러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상을 보여 준다. 그의 수필이 지닌 소재는 매우 다양한 편인데, 그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술, 문학, 학문, 가족, 여성 등이다. 또한 그의 수필은 유머와 위트가 빈번하게 등장하면서 읽는 즐거움을 배가해 준다.
양주동에게 술은 인생의 낭만과 문학의 열정을 매개하는 소종한 존재다. 첫 번째 수필집의 제목을 ‘문주반생기(文酒半生記)’라고 붙인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애주가였는지 짐작케 한다. 수필집의 제목처럼 그의 인생에서 문학과 술은 평생의 동반자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수필에는 또한 한시나 향가, 고려 가요 등 고전 시가에 대한 애정이 진솔하게 드러난다. 그는 어린 시절에 이미 중독이라고 할 만큼 한문 문장을 좋아해서 높은 수준의 경지에 오른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고전 문학 연구자로서의 감회 등에 대한 에세이들도 우리 수필의 깊이와 넓이를 보여 주었다. 양주동의 수필에서 가족은 삶의 활기와 안정을 담보해 주는 소중한 존재다. 그의 수필 가운데는 아버지, 어머니, 자식들과의 가정생활에 얽힌 이야기가 많은 편이다. 또한 여성 혹은 여성관과 관련된 내용도 자주 드러난다. 그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근대적인 여성관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서구적인 학문을 공부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또한 일생의 반려자인 아내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당사자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조혼 제도에 대해 큰 반감을 가졌다.
이렇듯 양주동의 수필은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형식이나 표현의 측면에서도 다양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우선 그의 수필에는 지적인 요소와 낭만적 요소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를테면 어떤 작품은 역사와 지식에 대한 깊은 사유를 보여 주고, 어떤 수필은 유머, 위트와 같은 요소들로 글의 윤기를 더해 주고 있다. 그의 수필은 또한 낭만적이어서 인간적 감정과 예민한 감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주기도 한다. 앞의 소재 가운데 술, 문학, 가족과 관련된 것은 낭만적인 성격을, 학문이나 여성관에 관련된 것은 지적인 성격을 지닌다. 양주동의 수필은 또한 고전 고금의 유명한 시나 경구들을 자주 인용하는 특성을 보여 준다. 그는 자신이 시 창작을 했던 시인이고 문학 평론가로도 활동을 했으니 수필 작품 속에 시가 인용되는 것을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그의 수필처럼 시를 빈도 높게 활용한 사례는 우리 현대 수필의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선구적인 면이다. 산문 장르인 수필에 시적 운기(韻氣)를 불어넣어 줌으로써 감칠맛을 더하게 한다.
200자평
수필가로서 무애 양주동은 진정한 박사(博士)로서의 폭넓은 지식과 시인으로서의 풍부한 감수성, 그리고 학자로서의 냉철한 사유 등을 두루 보여 준다. 그는 한문학에 관한 이야기에서부터 한국 문학, 영미 문학, 유럽 문학, 일본 문학, 중국 문학 등과 관련된 이야기 등, 폭넓고 다양한 주제와 소재를 재미있게 들려줌으로써, 한국 현대 수필을 깊이 있고도 재미있거나, 재미있고도 깊이가 있는 장르로 만든 선구자다.
지은이
무애(无涯) 양주동(梁柱東)은 1903년 6월 24일 개성에서 태어났다. 1908년(5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1912년(9세)에 보통학교 3학년에 입학했다. 이때 신소설과 ≪삼국지연의≫를 탐독했고 작문과 산술, 영어에 재능을 발휘했다고 한다. 1914년(11세)에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1년 후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한학과 한시 공부를 했다. 1920년(17세)에 상경해 중동학교 고등속성과에 입학했는데, 1년 만에 중학 과정을 졸업하는 능력을 보여 주었다.
1921년(18세)에 일본의 와세다대학 예과 불문학과에 입학한 이후 1925년 본과 영문학과에 진입해 1928년에 졸업했다. 와세다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해 그 학교가 폐교하기까지 10년간 근무했다.
1921년에 그는 첫 시 작품인 <꿈 노래>를 발표하면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1923년(21세)부터 문학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그해에 유엽, 백기만, 이장희 등과 시 전문지 ≪금성≫을 발간하고, 1929년에는 문예 전문지 ≪문예공론≫을 발간했다. 그는 자신이 관여하는 문예지들을 중심으로 창작 시, 번역 시, 문학 평론을 발표하면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금성≫ 1∼3호에 <기몽(記夢)>, <꿈 노래>, <옛사랑> 등의 창작 시와 보들레르, 타고르, 베를렌 등의 시를 번역해 발표했다.
1929년(27세)에 문예지 ≪문예공론≫을 발간하면서 <조선의 맥박>을 비롯한 시 작품을 발표하고 평론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했다. <문예상의 내용과 형식의 문제>, <문제의 소재와 이동점> 등을 통해 민족 문학과 계급 문학의 절충을 주장했다. 절충주의 문학론을 통해 국민 문학과 계급 문학의 갈등을 극복하고 민족과 계급, 문학의 본질과 사회적 역할을 통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함으로써 민족 문학의 논리를 심화·확장하는 데 기여했다. 당시 순수 문학과 목적 문학, 혹은 형식주의와 내용주의가 대립하던 시절에 절충주의 문학론을 제창해 문학의 편협성을 극복하고자 했다.
1930년(17세)에 첫 시집 ≪조선의 맥박≫을 간행했다. 이 시집은 제1부 ‘영원한 비밀’에 <산 넘고 물 너머> 등 23편, 제2부 ‘조선의 맥박’에 <나는 이 나라 사람의 자손이외다> 등 14편, 제3부 ‘바벨탑’에 <기몽(記夢)> 등 16편을 싣고 있다. 전체적으로 시적 완성도가 높지는 않으나, 1부의 시 형태의 새로운 시도와 2부의 민족의식의 형상화 부분은 눈여겨볼 만하다.
한편, 1934년(31세)부터는 고시가 연구를 시작했는데, 1937년 <향가의 해독−특히 <원왕생가>에 취하야>를 발표하면서 고전 문학 연구 분야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1942년 ≪조선 고가 연구≫, 1947년 ≪여요 전주≫를 발간하면서 향가와 고려 가요 연구 분야에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광복 이후 1947년(44세)에 동국대학교 교수로 부임했고, ≪여요 전주≫, ≪세계 기문선≫ 등의 저서를 간행했다. 1954년(51세) 학술원 회원 및 추천 회원으로 피선되었으며, 1956년에는 학술원상을 수상하고 ≪T. S. 엘리엇 시 전집≫을 번역, 출간했다. 1957년 연세대학교 명예 문학 박사를 받았고, 이듬해 연세대학교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가, 1962년 동국대학교 교수로 다시 부임해 대학원장을 지냈다.
1962년(59세)에 문화 훈장 대통령장, 1970년에 대한민국 국민 훈장 무궁화장을 수령했다. 1973년(71세) 동국대학교에서 정년퇴임했으며 1977년(75세)에 타계했다. 그가 남긴 주요 저서로는 ≪조선 고가 연구≫(1942), ≪여요 전주≫(1947), ≪국학 연구 논고≫(1962) 등의 연구서와 시집 ≪조선의 맥박≫(1930), 수필집 ≪문주반생기≫(1959), ≪인생잡기≫(1962), ≪지성의 광장≫(1969), 번역 시집 ≪영시 백선≫(1946), ≪현대 영시선≫(1946), ≪T. S. 엘리어트 시 전집≫(1955) 등이 있다.
엮은이
이형권(李亨權)은 충남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이자, 1998년 ≪현대시≫ 우수 작품상으로 등단한 문학비평가다. 현재 현대문학이론학회 회장, 어문연구학회 부회장, 문학평론가협회 부회장, 계간 문예지 ≪시작≫ 편집주간, ≪애지≫ 편집위원, 대전문화재단 자문위원회 위원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타자들, 에움길에 서다≫, ≪한국시의 현대성과 탈식민성≫, ≪감각의 발명≫, ≪공감의 시학≫ 등이 있다.
차례
‘新文學’에의 轉身
文·酒의 벗들
思親記
나의 文學 소년 時代
나의 雅號
靑春·돈·座右銘
어머니 回想
春宵抄
새 女性美
女性語
‘四柱’라는 것
‘先行詞’說
‘마아’란 말
‘말띠’의 迷信
原稿料
‘國寶’辨
晒腹記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四 尺 三 寸의 短軀를 가진 이 十二 세 幼兒의 ‘新郞’이 말을 타고 곁마을로 장가들러 갔는데, 式이 끝나고 사랑에 자리를 정하자, 그 마을의 讀書 年少輩들이 신랑에게 어서 한턱 내놓기를 재촉하는-기실 ‘글싸움’을 挑戰하는 소위 ‘單子’란 것을 들였것다. 그 글을 받는 대로 신랑이 척척 對句를 제겨내야 무식하다는 ‘초달’을 면하는 격식이다. 벽두에 그들의 인사에 가로되,
月出高.
‘달이 높이 떴다’고 錯解해서는 안 된다. ‘鄕札’, 逐字 訓·音讀으로 ‘달나고’[달라고!], 요샛말로 “Give us something to eat and drink”라 함이다. 어린 ‘신랑’이 붓을 들어 對句를 재겼으니, 가로되-
日入於.
무론 이것도 정직히 ‘해가 들었다’ 함이 아니요, 역시 그 마을式 ‘鄕札’로 ‘날들어’[날더러?], 곧 내가 주인이 아닌데 하필 날더러 달라느냐, “Why should you ask me?”란 소리다.
다음 그들의 둘째 번 보내온 ‘메씨이지’는 前보다 좀더 難解하였다.
言有馬.
이 석 字가 破字임과 ‘馬’가 ‘午’임에 相到하여 제대로 ‘許’ 字[한턱을 허락하라]로 풀이하기는 약 半 分을 요하였으나, 그 對句는 그 절반의 시간이 걸렸다. 天來의 ‘煙士披里純’(‘인스피레이슌’-그 즈음 읽었던 梁啓超의 <飮氷室文集>에서 내가 驚異로써 맨 처음 배웠던 ‘英吉利’語)이 번개처럼 나타났던 것이다. 곧 붓을 들어 對句를 써 내던지니, 가로되-
物無牛.
‘物’ 字에 ‘牛’가 없으면 ‘勿’, 곧 [말라!]는 뜻이다. 마을의 挑戰者 제군들이 이를 보고 문득 빛을 잃고 혀[舌]를 맺[結]아 모두 도망친 것은 무론이다.
<나의 文學 소년 時代>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