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우리가 몰랐던 ‘카’를 만나다
과거와 현재에서 더 나은 미래를 길어 올린 실천적 지식인의 초상
에드워드 카만큼 우리에게 친숙한 역사가는 없을 것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그리고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명제는 나온 지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도 끊임없이 회자된다. 하지만 정작 카가 어떤 삶을 살았고 무엇을 연구했는지 정확히 아는 이는 드물다. 이 책 ≪에드워드 카≫는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카의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난 순간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며 우리가 미처 몰랐던 카의 진면목을 새롭게 비춘다.
카는 외교관, 국제관계학 교수, ≪타임스≫ 부편집인 등을 두루 거치며 실천을 멈추지 않은 역사가였다. 특히 카는 냉전이라는 이념 대립 상황에서도 소비에트 러시아의 역사적 경험을 연구하며 서구 자본주의 체제와 국제 질서의 대안을 끊임없이 모색했다. 시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려 한 카의 학문적 태도는 우리에게 여전히 큰 울림을 선사한다.
카는 과거 사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해야 한다는 실증주의 사관에서 벗어나 역사의 객관성을 새롭게 규정했다. 카에게 역사의 객관성이란 역사가가 속한 사회의 제약을 넘어서서 시야를 미래로 확장하는 능력을 의미했다. 이러한 카의 역사관은 포스트휴머니즘과 미시사의 시대에서도 가치를 잃지 않고 역사학에 여전히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열 가지 키워드로 카의 학문적 여정을 따라가며 역사에서 열린 미래의 가능성을 탐색해 보자.
에드워드 핼릿 카(Edward Hallet Carr, 1892∼1982)
언론인, 국제관계학 교수, 역사학자 등 다채로운 경력의 소유자. 학계에 진입해 발간한 ≪20년의 위기≫는 지금까지도 국제관계학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냉전기에 출간한 총 14권의 ≪소비에트 러시아사≫에서 이데올로기적 편견에 얽매이지 않고 러시아 혁명부터 스탈린 체제 출범까지의 역사를 광범한 자료에 입각해 재현했다. 이는 서구의 소련사 연구에 하나의 기준이 되었다. 아울러 ≪역사란 무엇인가≫는 오늘날까지도 대학 교재와 독서 대중을 위한 교양 도서로 활용되고 있을 정도로 역사 철학 분야의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이 밖에 ≪도스토옙스키≫, ≪낭만의 망명객≫, ≪새로운 사회≫, ≪나폴레옹에서 스탈린까지≫ 등의 저서가 있다.
200자평
에드워드 카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역사적 경험에 주목하며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대안을 찾으려 했다. 역사가의 임무가 과거 사실들을 현재와 미래의 필요에 부응하도록 해석하며 지속적으로 새롭게 재현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열 가지 키워드로 카의 학문적 노정을 상세히 살핀다. 시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소임을 다한 카의 생애에서 역사의 가치를 되새겨 보자.
지은이
박원용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에서 학사·석사 학위를 받은 후 미국 인디애나대학교에서 소비에트 러시아의 고등교육 제도 개혁을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논문으로 소비에트 러시아의 정치 문화를 다룬 “집단기억의 강화, 왜곡, 은폐: 1920년대∼1930년대 러시아의 시각 이미지를 중심으로”, “냉전기(1950∼1975) 올림픽에서의 미국과 소련의 이미지 전쟁”, “동청철도 건설과정을 통해 본 세기 전환기의 러시아 극동”, “19세기 중반 20세기 초 러시아 전제정의 극동 식민화 재고” 등이 있다. 저서로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신체문화와 스포츠≫, ≪해양사의 명장면≫(공저), ≪스포츠가 역사를 말하다≫(공저) 등이 있고, 역서로는 ≪에릭 홉스봄 평전≫, ≪역사에 대해 생각하기≫, ≪E. H. 카 평전≫, ≪10월 혁명: 볼셰비키 혁명의 기억과 형성≫ 등이 있다.
차례
실천을 멈추지 않은 역사가
01 자유주의
02 도스토옙스키와 마르크스
03 전간기의 위기
04 대안으로서 소비에트 러시아
05 ≪소비에트 러시아사≫
06 역사의 객관성
07 역사의 인과 관계
08 역사의 진보
09 역사가의 신념
10 ‘21세기의 카’
책속으로
도스토옙스키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비롯해 여러 작품에서 비합리적 인간이 초래할 수 있는 비극의 여러 유형을 묘사했다. 서구인들은 도스토옙스키가 묘사한 인간의 비합리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합리적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이 사회 전체의 이익을 증진한다고 생각했다. 도스토옙스키의 정신세계에 심취했던 젊은 시절의 카는 합리적 인간관에 기초한 세상의 작동 방식을 거부하게 되었다. 카에게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의 비합리성이 초래한 전후 세계의 모순적 상황을 예견한 인물처럼 보였다. 도스토옙스키는 카가 직접 경험한 국제 정치의 현실을 철학적으로 규명할 단서를 제공했다.
_“02 도스토옙스키와 마르크스” 중에서
역사가는 사회적 존재로서 자신이 속한 사회적 상황, 그 사회의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따라서 어떤 역사가가 ‘객관적’이라 함은 그 역사가에게 “사회와 역사 속 자신의 위치로 인해 제한된 시야를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의미다. 아울러 객관적 역사가에게 필요한 또 다른 자질은 “자신의 시야를 미래에 투사할 수 있는 능력”이다. 바로 그런 능력 때문에 객관적 역사가는 “자신이 처한 바로 그 위치에 전적으로 속박된 사고방식을 가진 역사가들보다 과거에 대해 더 심원하고 더 지속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다.
_“06 역사의 객관성” 중에서
역사에서 열린 미래의 가능성을 찾으려면 역사가 상상력의 증진에 기여해야 한다. 허구의 서사를 만들어 내자는 뜻은 아니다. 과거의 재현을 위한 소재, 즉 가장 기본적인 사료에서 시작해 신화, 전설, 유물 등을 활용하면서 과거를 어느 한 방향으로 향하기 위한 단계로만 설정하지 말자는 의미다.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한 영화, 드라마, 소설 등을 단순히 픽션(fiction)으로 치부하지 않고 팩션(faction)으로 승격해 사료만으로 재현하기 힘든 상상력을 보완하는 것 역시 역사에서 상상력을 키워 나가는 방안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_“10 ‘21세기의 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