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여기 있잖아요〉는 인간 내면에서 발생하는 생각의 움직임과 그 파괴력을 탐구한 작품이다. 원제를 직역하면 ‘그녀가 여기 있다’라는 뜻이지만 여기서 ‘그녀(Elle)’는 단순히 여성 등장인물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녀’는 침묵 속에 감춰진 생각, 말로 표현되지 않은 관념까지 포함한다. 또한 ‘여기’는 그녀가 있는 물리적 장소이자 그녀의 생각이 머무는 심리적 공간을 가리킨다.
작품에는 남자 셋(남 1, 2, 3)과 여자 하나가 등장한다. 남 2는 남 1과 토론하던 중 동료 여성의 침묵에 위협을 느낀다. 초반부에 남 2는 독단적이고 공격적인 기득권자처럼 보인다. 그는 여자를 동업자이자 동료라 칭하면서도 사실상 자신의 생각에 따르도록 강요한다. 여자는 남 2가 자신과 다른 생각을 견디지 못한다고 비난한다. 남 2는 상대의 생각을 근절시키기 위해 막무가내로 소리치고, 직접 찾아가 설득과 회유를 반복한다. 이러한 집착적인 태도는 마치 직장 내 괴롭힘을 연상시키며,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권력 관계와 폭력의 문제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곧 상황은 역전된다.
이처럼 작품은 관용과 불관용의 대립을 넘어, 맹목적인 군중과 깨어 있는 소수의 충돌로 확장된다. 남 2와 남 3의 생각은 연약한 새싹이나 반짝이는 잠자리, 아름다운 나비 같은 이미지로 표현되는 반면 여자의 생각은 사람들 머릿속에 똬리를 튼 더러운 뱀이나 분쇄기에 비유된다. 남 2와 남 3은 자신들의 생각이 자유롭게 자라나고 퍼지기를 바라지만, 여자의 생각은 그런 진실을 짓밟고 으깨 버리는 적대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사로트는 이 작품에서 생각이라는 비가시적이고 유동적인 존재가 인간관계에서 얼마나 큰 긴장과 위협을 불러일으키는지 보여 준다. 이러한 주제의식은 초기 작품 《트로피즘》에서도 확인된다. 인간 내면에서 발생하는 감정의 미묘한 흐름을 기생충, 거머리 같은 끈끈한 이미지로 표현한 바 있다. 〈여기 있잖아요〉에서는 생각이 뱀처럼 기어다니고 분쇄기처럼 파괴하는 이미지로 발전하여, 한곳에 머물지 않고 퍼져나가는 내면의 긴장과 충돌을 극적으로 형상화한다.
사로트의 희곡은 문학성과 시사성을 겸비해 연출 방식에 따라 무한히 재해석될 수 있는 열린 텍스트다. 〈여기 있잖아요〉는 인간 내면에서 발생하는 불안과 집착, 생각의 충돌을 섬세하게 포착하며, 진실과 생각에 대한 질문을 무한히 던지는 작품이다. 우리가 믿는 진실은 과연 안전한가? 아니면 남 2와 같이 생각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로트는 이 작품을 통해 관객에게 내면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생각의 실체를 묻고 있다.
200자평
사로트의 희곡 〈여기 있잖아요〉는 인간 내면의 생각과 그 파괴력을 탐구한다. 침묵 속에 숨은 생각은 위협이 되고, 남 2는 이를 밝히려 하지만 점차 집착에 사로잡혀 무너진다.
지은이
나탈리 사로트(Nathalie Sarraute, 1900~1999)
인간 내면의 미세한 심리적 움직임, ‘트로피즘’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프랑스 작가다. 러시아와 프랑스를 오가며 다양한 문화를 접했고, 법학, 문학, 사회학 등을 공부한 후 변호사로 활동하다 39세에 《트로피즘》을 발표했다. 이후 누보 로망의 대표 작가로 자리 잡았으며, 《의혹의 시대》, 《황금 열매》 등에서 전통적 서사와 인물 심리를 벗어나 발화 이전의 감각과 침묵 속 긴장을 포착했다. 희곡에서도 말과 침묵 사이의 틈새에서 발생하는 인간관계의 불안과 내면의 파장을 섬세하게 그려내며, 문학과 연극의 경계를 허문 독창적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옮긴이
권현정
서강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파리 10대학에서 연극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강대학교 유럽문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논문으로는 〈프랑스 무대 미술의 형태 미학〉, 〈연출의 탄생〉, 〈메테를랭크의 일상의 비극 : 내부〉, 〈라가르스의 세상의 끝일 뿐 또는 소통의 실패〉, 〈무대 미술의 관례성−맨션에서 임의의 궁전에 이르기까지〉, 〈Maeterlinck et le théâtre pour marionnettes〉, 〈젤레르의 〈타인〉에 나타난 경계의 모호성〉 등이 있다. 역서로는 1975년부터 2015년까지 무대 미술의 변천과 의미를 다룬 《프랑스 시노그라퍼(Scénographes en France)》(뤼크 부크리스, 마르셀 프레드퐁 외 공저), 《마테를링크의 인형극(Trois petits drames pour marionnettes)》, 《나는 사라진다 / 나의 그 무엇도(Je disparais / Rien de moi)》(아르느 리그르 저), 《시노그라피 소론(Petit traité de scénographie)》(마르셀 프레드퐁 저) 등이 있다.
클로에 고티에(Chloé Gautier)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불문학 및 비교문학을 전공한 클로에 고티에는 번역가로 활약하고 있다. 석사 논문으로 19세기 미국 대표 작가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 작품에 대한 프랑스 작가들의 관점을 분석하고 프랑스어 번역을 비교 연구했다. 오래전부터 힌디어 같은 동양어를 비롯해 언어에 대한 남다른 열정이 있었고, 문학과 번역에 대해 관심이 많았지만 10년 정도 프랑스 공공 기관의 데이터와 문헌 정보 관리 사업과 연관된 일을 했다. 그러던 중 한국어-프랑스어 번역 분야로 진출할 기회를 얻었다.
한국문학번역원 번역아카데미 정규 과정을 수료하고 김혜진 작가의 단편 소설 《다른 기억》 번역으로 2019년 제18회 한국문학번역 신인상을 받았다. 다수의 웹툰을 번역했고, 성전 스님의 《좋은 건 다 네 앞에 있어》를 프랑스어로 출판했다(Toutes les bonnes choses sont devant toi, Decrescenzo éditeurs, 2024). 또한 2023년 박완서의 장편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Cette montagne était-elle bien là?)》가 대산문화재단 한국문학 번역·출판지원 사업에 선정되어 출간을 앞두고 있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여기 있잖아요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남 1 : 가엾은 양반, 걱정도 팔자네요… 그런 일로 걱정한다면 바쁘실 겁니다. 그녀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이 뭔지 알아요… 게다가 그 여자 머릿속뿐만 아니죠… 항간에 떠도는 생각이에요…
남 2 : 떠돈다고요? 그래요, 떠도는… 떠도는… 바로 그거예요… 뭔가가 떠돌고 있어요… 널리 퍼지고 있죠… 도처에… 모든 사람들에게…
남 1 : 헛고생하실 거예요. 그들을 설득하지 못할 겁니다…
남 2 : 맞아요. 제 생각도 그래요… 바위에 달걀 치기죠. 저항할 수 없죠, 그런 생각에. 그런 생각이 박혀 있으면 확신으로 넘쳐요… 거슬리는 자신감으로… 보지 못했나요? 미소를 살짝 짓는 것 같았아요, 그녀는. 우리를 불쌍히 여겼죠… 곧바로 추궁해서 말하게 해야 했는데… 내버려뒀어요… 그래서 지금 여기 있어요… 여기 있잖아요, 그녀 안에… 해로운 짐승이… 숨을 쉬며 성장하는… 결코 붙잡을 수 없는, 절대로…
남 1 :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나요? 골치 아픈 일이 자주 있을 것 같습니다.
남 2 : 아니요… 평소에는 다행히… 이런 일은 전혀 없어요. 하필 오늘 그녀 앞에서 우리가 논의했을 때… 그녀 안에서 즉각적으로… 움직였어요… 그런데 저는 비겁하게도, 나약하게도 내버려두고 말았어요…
11-1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