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도청에서 근무하는 의원 아가치의 이웃에 그 부하 직원 폰자가 이사 온다. 장모를 모시고 살면서 아내와는 별거 중인 폰자를 둘러싸고 마을에 이런저런 소문이 돈다. 마을 사람들은 폰자 가족에게 집요하게 진실을 요구한다. 폰자와 장모인 프롤라 부인의 증언이 상반되는 가운데 추궁이 거듭될수록 진실은 오히려 안갯속에 묻혀 버린다. 결국 둘 중 누가 진실을 말하는지 밝혀 줄 단 한 명의 증인이 소환된다.
피란델로는 주로 관습과 도덕, 사상 등 절대적인 가치와 고정관념에 매여 고통을 주고받는 인간 비극을 다뤄 왔다. <여러분이 그렇다면 그런 거죠>는 19세기 실증주의 전통을 거부하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문제의식을 보여 준다. 피란델로는 ‘라우디시’라는 인물의 입을 빌려 상대와의 ‘관계’에 따라 진실이 가변적이고 상대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어쩌면 ‘진실’ 자체가 무의미한 것인지 모른다. 이 극은 가치, 진리, 진실이라는 이름의 하나의 ‘절대적’ 기준이 한편으론 얼마나 폭력적인지, 또 그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를 보여 준다.
루이지 피란델로는 19세기 연극 전통을 거부하고 20세기 세계 연극사의 전환점을 마련했다. 특히 절대적 가치 체계에 대한 거부를 분명히 했는데,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1921)은 메타테아트르 형식에 이러한 주제를 효과적으로 담아낸 수작이다. 피란델로의 연극 실험은 후대 큰 영향을 미치며 브레이트, 베케트, 뒤렌마트, 이오네스코, 오닐, 아라발로 이어지는 20세기 비사실주의 연극 흐름의 기반이 되었다.
200자평
피란델로의 대표작. 19세기 말 실증주의 전통에서 벗어나 절대적 가치체계 거부라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문제의식을 보여 준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절대 진리에 이를 수 없는 인간 이성의 한계를 꼬집었다.
지은이
루이지 피란델로(Luigi Pirandello, 1867-1936)
시칠리아의 지르젠티(지금의 아그리젠토) 출생으로 신흥 부르주아에 속하는 부유한 유황 광산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특히 그가 태어난 마을 카부소(고대 그리스어의 ‘카오스’가 방언으로 변질된 것)는 신비적(神秘的)이고 비교적(秘敎的)인 신화와 의식들을 중요시하는 지역이었다. 훗날 피란델로는 여러 가지 상황뿐만 아니라 태어난 곳의 실제 명칭과 관련해서도 자신이 카오스의 아들임을 강조하고 싶어 했다. ‘카오스’란 뜻의 지명에 깊은 의미를 두었듯 그의 삶 또한 혼돈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1894년 아버지의 동업자인 부유한 유황 광산주의 딸 안토니에타 포르툴라노와 결혼했다. 그러나 1903년 아내와 아버지가 투자했던 졸포 광산이 홍수로 폐쇄되면서 경제적으로 파산하면서 그 충격 때문에 아내는 정신착란증에 걸린다. 지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피란델로는 1904년부터 1919년까지 15년간 광적인 상태의 아내를 곁에서 돌보았지만 아내의 증상이 악화되자 하는 수 없이 그녀를 요양원으로 보내게 된다. 1차 대전 동안에는 아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등 고통스러운 나날이 계속되었다. 전후 혼란과 데카당티슴이 만연한 사회 분위기도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 인생의 연속적인 고통과 당대 세계의 복합적인 배경은 피란델로 작품세계의 기반이 되었다.
피란델로는 시인, 소설가로서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1916년쯤부터 1936년 사망하기 전까지 20여 년간 극작가로 활동한다. 특히 희곡을 통해서는 혁신적 극작법을 발휘해 자기만의 주제를 한층 더 효과적으로 심화시켰다. 피란델로는 전통적인 극 형식을 거부하고 등장인물의 의식을 새로운 각도에서 심도 있게 파헤친다. ≪여러분이 그렇다면 그런 거죠≫(1918)를 필두로 일련의 희곡들이 1920년대에 그를 세계적인 유명 인사로 만들었다. 그리고 메타테아트로 형식을 통해 인생(차이와 가변성)과 예술(창작과정의 고뇌)에 대한 주제를 동시에 실현해 낸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1921)로 연극사에 한 획을 그었다.
피란델로는 20세기 연극계에 브레히트, 베케트, 뒤렌마트, 이오네스코, 오닐, 아라발 등 대가가 탄생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현대 연극에 기여한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934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옮긴이
장지연
한국외국어대학교 서양어대학 이탈리아어과와 동대학원(희곡)을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서 박사학위(드라마 전공)를 취득하였다. 현재 서경대학교 인성교양대학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역서로 골도니의 ≪여관집여주인≫, 피란델로의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 ≪여러분이 그렇다면, 그런 거죠≫, ≪엔리코 4세≫, ≪피란델로 희곡선2≫(항아리, 증명서, 바보, 입에 꽃이 핀 남자, 선신제 수록), 다리오 포의 ≪무정부주의자의 사고사≫,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등이 있다. 저서로는 ≪동시대연출가론≫(공저), ≪장면구성과 인물창조를 위한 희곡 읽기≫1편과 2편(공저) 등이 있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1막
2막
3막
해설
지은이에 대해
루이지 피란델로 연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시렐리 부인 : 그럼 당신 얘기는 진실이란 전혀 알 수가 없다는 거예요?
치니 부인 : 보이거나 만져지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 믿어서는 안 된다는 건지!
라우디시 : 그게 아니라, 그것들을 믿으세요, 부인! 그러나 제 말은 타인들이 보거나 만지는 것에 대해서도 존중하란 뜻이에요. 비록 그게 부인이 보고 만지는 것과 정반대라 할지라도 말이죠.
24쪽
폰자 부인 : 진실요? 그건 단지 이렇습니다. 나는, 그래요, 프롤라 부인의 딸이면서−
모두들 : (만족감에 한숨을 쉬며) −아!
폰자 부인 : (곧 앞에서처럼) 폰자 씨의 두 번째 부인이기도 하죠−
모두들 : (어안이 벙벙하고 기대에 어긋나서, 낮은 소리로) −아! 뭐라고?
폰자 부인 : (앞에서처럼) −그래요. 전, 저로서는, 아무도 아닙니다. 아무도 아니에요.
도지사 : 아, 그렇지 않아요. 부인, 당신은, 자체로, 이 사람이거나 아니면 저 사람이거나 둘 중 하나여야 해요!
폰자 부인 : 아뇨, 도지사님. 저는 당신이 생각하는 바대로 바로 그 사람입니다.
15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