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이해조의 《연의 각(燕의 脚)》은 우리가 아는 《흥부전》 이야기를 새롭게 개작한 소설이다. 심정순의 판소리 창(唱) 〈박타령〉을 듣고 이를 산정(刪正, 쓸데없는 것을 없애 바르게 하다)해 1912년 4월 29일부터 6월 7일까지 《매일신보》에 연재했다.
《흥부전》은 《흥부놀부전》, 《흥보전》, 《박흥보전》, 《흥보만보록》, 《놀부전》 등 현전하는 이본이 120종이 넘는 한국의 대표적인 고전소설이다. 각 이본 별로 내용과 구성이 조금씩 다르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흥부전》은 대부분 이해조의 《연의 각》에 기반하고 있다. 《조선한문학사》, 《조선가요집성》 등을 펴낸 1세대 국문학자 김태준(金台俊)이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사인 《조선소설사》에서 《흥부전》을 소개할 때 바로 이해조의 《연의 각》을 대상 텍스트로 삼았고, 이후 소설 혹은 아동들을 위한 전래동화의 형태로 정착된 흥부와 놀부 이야기는 현전하는 《흥부전》의 다른 이본보다 압도적으로 《연의 각》의 영향이 짙게 나타난다. 즉 근대 이후 출판 시장에서 《흥부전》이란 곧 《연의 각》이었던 것이다.
《연의 각》이 다른 이본들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연의 각》은 무엇보다 판소리 창을 모본으로 하고 있다. 서사에 중점을 둔 다른 이본들과 달리 《연의 각》에는 ‘판소리’로서의 성격이 두드러진다. 끝없이 이어지는 긴 사설이 그 하나다. 놀보의 심술을 묘사할 때 “애 난 집서 개 잡고, 애호박에 말뚝 치고, 등창 난 놈 돌짐 지기, 곱사등이 뒤젖히고, 화초밭에 불 놓고, 태중 여인 배 차기, 활 쏘는 놈 팔 치기, 종기 난 놈 주먹 박기, 우는 아이 똥 먹이기, 백발노인 친구하고, 옹기장수 작대 치고, 패는 곡식 이삭 빼기, 다 된 밥에 모래 넣기, 장가가는 놈 자지 베기, 수절 과부 겁탈하기, 목욕물에 진흙 넣기, 가래 끓는 놈 코 간질이기, 눈병 걸린 놈 눈에 고추 넣기…”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신들린 장광설은 다른 이본보다 《연의 각》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창작 시기와 독자에 따른 변화도 나타난다. 이전의 오랜 판본들과 달리 《연의 각》은 1910년대, 즉 근대의 산물이다. 나아가 신문에 연재됐기에 도시에 거주하는 신문 구독자로 주요 독자층이 변화했다. 이러한 변화는 《연의 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전의 판본들에서 흥보의 아내는 잠깐 언급되는 정도로 그쳤지만 《연의 각》에서는 그 비중이 훨씬 커진 데다가 천하제일의 식자층으로 등장한다. 《흥부전》의 하이라이트, 박 타는 장면에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 ‘박’이란 곧 읽는 이들의 관심사를 반영하고 있는 욕망의 결정체다. 주로 곡식 같은 먹을 것을 비롯해 농경과 관련된 물건들이 나왔던 이전의 판본들과 달리 《연의 각》에서 흥부가 타는 박은 값비싼 약재와 각종 소품들, 금은보화 등 교환 가치가 담긴 물건들을 쏟아낸다. 즉 《연의 각》은 새로운 시대와 새롭게 등장한 독자들의 감각에 맞추어 《흥부전》이라는 전통 서사를 새롭게 갱신했다.
* 이해조의 판소리 개작 소설 4종을 동시에 소개합니다.
《춘향전》을 개작한 《옥중화(獄中花)》(이해조 저, 권순긍 역, 지만지한국문학, 2024)
《심청전》을 개작한 《강상련(江上蓮)》(이해조 저, 권순긍 역, 지만지한국문학, 2024)
《흥부전》을 개작한 《연의 각(燕의 脚)》(이해조 저, 장유정 역, 지만지한국문학, 2024)
《토끼전》을 개작한 《토의 간(兎의 肝)》(이해조 저, 장유정 역, 지만지한국문학, 2024)
200자평
신소설 작가로 알려진 이해조는 널리 구연되고 있던 대표적인 판소리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토끼 타령〉을 산정(刪正)해 신문이라는 근대적 매체 안에서 활자화했다. 듣기 텍스트를 읽기 텍스트로 전환하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제비의 다리’라는 뜻의 《연의 각(燕의 脚)》은 한국의 대표적인 고전 서사 흥보와 놀보 이야기를 새롭게 개작한 작품이다. 1912년 4월 29일부터 6월 7일까지 《매일신보》에 연재됐다. 흥부 놀부 이야기를 새 시대와 독자에 맞게 개작해 《흥부전》의 대표 이본으로 자리 잡았다.
지은이
이해조(李海朝, 1869∼1927)는 친일 개화 노선을 지향한 이인직(李人稙, 1862∼1916)과 달리 애국 계몽 노선을 표방했다. 경기도 포천에서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麟坪大君)의 10대 손으로, 이철용(李哲鎔)의 3남 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열재(悅齋), 이열재(怡悅齋), 동농(東濃)이며, 필명은 선음자(善飮子), 하관생(遐觀生), 석춘자(惜春子), 신안생(神眼生), 해관자(解觀子), 우산거사(牛山居士) 등을 사용했다.
1906년 11월부터 잡지 《소년한반도(少年韓半島)》에 소설 《잠상태(岑上苔)》를 연재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주목되는 작품인 《자유종(自由鐘)》(1910)은 봉건 제도에 비판을 가한 정치적 개혁 의식이 뚜렷한 작품이다. 특히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 신교육의 고취, 사회 풍속의 개량 등 계몽 의식이 두드러진다.
처첩 문제, 계모의 박해 등을 보여 주는 《빈상설(鬢上雪)》(1908)·《춘외춘(春外春)》(1912)·《구의산(九疑山)》(1912)이나 미신 타파를 내세운 《구마검(驅魔劍)》(1908), 일반적인 젊은 남녀의 만남과 헤어짐의 사연에 중점을 둔 《화세계(花世界)》(1911), 《원앙도(鴛鴦圖)》(1911), 《봉선화(鳳仙花)》(1913) 등 36편의 작품을 발표해 신소설 최고의 작가로 평가된다. 모두 봉건 부패 관료에 대한 비판, 여권 신장, 신교육, 개가 문제, 미신 타파 등의 새로운 근대 의식과 계몽 의식을 담고 있다.
특히 1912년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토끼전》 등의 판소리를 명창 박기홍(朴起弘) 조(調)나, 심정순(沈正淳)의 창(唱)을 듣고 각각 《옥중화(獄中花)》, 《강상련(江上蓮)》, 《연의 각(燕의 脚)》, 《토의 간(兎의 肝)》 등으로 산정(刪正)해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연재하고 단행본으로도 출판해 ‘활자본 고소설(이야기책)’의 유행을 주도했다.
옮긴이
장유정(張有廷)은 성균관대학교에서 〈활자본 고소설과 식민지 모더니티〉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성균관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역서로 딱지본 《무학대사전》(2021), 《요절초풍 익살주머니》(2022) 등이 있다.
차례
제1장 놀보 심술에 흥보네 쫓겨나네
제2장 형수씨 이쪽 뺨도 마저 쳐 주오
제3장 흥보는 매품도 못 파는구나
제4장 가난, 가난 원수로다
제5장 제비가 물어다 준 보은표
제6장 톱질이야, 금은보화 끝이 없네
제7장 놀보 제비 몰러 나간다
제8장 제비가 물어다 준 보수표
제9장 양반이 나와 협박, 상놈이 나와 쪽박
제10장 놀보 심술보에 똥물이 특효라네
해설 : 너스레, 장광설, 수다 욕망의 푸닥거리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1.
술 잘하고, 욕 잘하고, 주색 잘하고, 쌈 잘하고, 초상집서 춤추고, 불난 집서 부채질하고, 애난 집서 개 잡고, 애호박에 말뚝 치고, 취병(翠屛) 튼 것 끌러 놓고, 등창 난 놈 돌짐 지기, 곱사등이 뒤젖히고, 화초밭에 불 놓고, 태중 여인 배 차기, 활 쏘는 놈 팔 치기, 종기 난 놈 주먹 박기, 우는 아이 똥 먹이기, 백발노인 친구하고, 옹기장수 작대 치고, 패는 곡식 이삭 빼기, 다 된 밥에 모래 넣기, 이장(移葬)하니 뼈 감추기, 남의 부부 잠자는데 소리 질러 불러내기, 장가가는 놈 자지 베기, 수절 과부 겁탈하기, 혼담 오가는데 이간질하기, 혼례식에 불 놓기, 만경대해(萬頃大海) 항해하는 배 밑 뚫기, 달리는 말 앞발 치기, 목욕물 진흙 넣기, 장마 때 다리 끊기, 가래 끓는 놈 코 간질이기, 눈병 걸린 놈 눈에 고추 넣기, 이 앓는 놈 뺨 치기, 위장병 걸린 놈 더운 데 뉘기, 설사하는 놈 변비약 주기, 어린아이 쥐어뜯기, 다 된 흥정 파투 내기, 중 보면 대테 메기, 과객 재울 듯이 두었다가 해 지면 쫓아내기, 남의 제사에 닭 울리기, 장독에 구멍 뚫기, 메주 찧는 데 생콩 넣기, 채식하는 이에게 고기 주고, 외길에 구덩이 파고, 목화밭에 똥 누고, 목화 따서 밑 씻고, 비 오는 날 장독 열고, 사부 보고 욕하고, 부형 친구에게 봉변 주고, 장에 가면 억지 흥정하고, 간 곳마다 도적질을 날마다 이놈이 하더라.
2.
(놀) “에− 그놈 귀찮구먼. 잔말이 많어! 마당쇠야!”
(마당) “예−”
(놀) “너 가서 광문 열어라.”
흥보 속으로 ‘옳다 형님이 광문을 열라시니 볏섬이나 주시려는 게다.’
(놀) “마당쇠야 광문 열고.”
(마당) “예−”
(놀) “볏섬 너머 쌀섬이 있지?”
흥보 또 속으로 ‘여러 끼를 굶어서 방아를 못 찧겠다고 쌀 한 섬을 주시려나?’
(놀) “마당쇠야.”
(마당) “예−”
(놀) “쌀섬 넘어 보릿섬 있지?”
흥보 또 ‘보리를 한 섬 주시려나?’
(놀) “큰 뒤주 있지야?”
흥보 또 ‘아마 뒤주에 담아 둔 잡곡을 좀 주시려나 보다.’
(놀) “마당쇠야 너 그 뒤에 박달 몽둥이 가져오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