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에스파냐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로르카의 3대 비극의 두 번째 작품인 ≪예르마≫는 갈망하는 아이를 결국 갖지 못하는 좌절한 여인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작품은 또 스페인 황금세기의 가장 중심 테마였던 명예에 대해서도 함께 다루고 있다. 그토록 자식을 갖고자 열망하는 예르마를 빅토르나 다른 남자에게 가지 못하게 하면서 예르마에게 무관심한 남편에게는 충실하도록 만든 것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이 테마는 주인공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극중 다른 인물들을 통해서나 작품 전체를 두고 다루어지고 있다. 예르마의 절망이 커지면 커질수록, 집에 없는 날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녀의 남편 후안은 자기의 이름에, 자기의 명예에 손상이 갈까 봐 이웃 사람들의 말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예르마에게 있어 명예는 덕스러움에 근거하고 도덕적인 면에서 올바른 것인 반면 후안의 명예관은 여론이나 평판이다.
그녀가 갖고 있는 명예관은 종교적·윤리적인 규율 이전의 법이다. 가슴속에 남편에 대한 증오를 갖고 있으면서도 자기에게 자식을 줄 수 있는 다른 남자에게 갈 희망을 묻어 버린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녀는 외형상의 복종을 충실하게 해낸다. 이것을 피할 수 없는 여자의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예르마는 어떻게 그런 사고를 갖게 되었는지 의식하지 못한 채 그걸 이미 받아들였다. 여자 본인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여자에게 부여된, 이해할 수 없는 올가미를 목에 걸고 살아가야 하는 운명적인 삶을. 그렇다면 이 작품의 비극성은 진정 어디에 있는 것일까? 자기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강요된 법에 맞춰 살아야 하는 것이 여자의 도덕이라고 생각하는 예르마의 사고인가? 아니면 그렇게 살다가 자기의 희망을 이루지도 못하고 사그라져 버리는 데 있는 것인가?
여성의 영혼 깊이 숙명처럼 박혀 있는 존재 이유를 모성애에 두고 본능과 싸움을 벌이는 ‘3막 6장으로 된 비극 시’인 <예르마>는, <피의 혼례>를 발표한 뒤 1년 만인 1934년 2월 29일 토요일 밤, 마드리드의 에스파뇰 극장 무대에 올라간 이후로 1935년 4월 20일까지 150회를 거듭해서 상연되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같은 해 9월 17일부터 10월 20일까지 상연되었고, 그 밖의 여러 도시를 순회공연하며 대단한 인기를 누렸던 작품이다. 그러한 성공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무엇보다 이 작품이 안고 있는 극적 긴장감이 탁월하다는 데 있을 것이다. 단 하나의 열정에 집착해 사는 그의 인물이 지독할 정도로 너무나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수태와 관련된 일들이 등장인물들의 경험과 열정으로 나타나고 있는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헤카베>나 <메데이아>, <엘렉트라>나 <이피게네이아>, 그리고 세네카의 <메데이아>보다 좀 더 현실성을 갖고 서정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200자평
인간의 비극은 불가능한 것을 소망하는 데서 시작된다.
누구보다 아이를 원하는, 그러나 가질 수 없었던 예르마를 통해 우리는 비극의 정수를 발견한다. 인간의 소망과 자연의 섭리, 자유로운 영혼과 규범으로 폐쇄된 사회의 충돌한 결과는 파멸뿐이다. 로르카의 비극 3부작, 그 두 번째 작품.
지은이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역의 그라나다에서 20킬로미터 떨어진 마을 푸엔테 바케로스에서 1898년 6월 5일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안달루시아의 자연은 그의 감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대학시절 ‘엘 린콘시요’라는 모임에 참여하는데 이 모임을 이룬 상당수가 스페인 현대 문화계를 이끈 대표적 인물들이다. ‘엘 린콘시요’에 속했던 사람들은 로르카의 문학적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중요하게 작용했다. 로르카는 이 모임 동료들의 격려에 힘입어 1918년 첫 시집 ≪인상과 풍경≫을 발간한다.
1918년 마드리드로 간 그는 당시 스페인 지성인의 요람이었던 ‘학생 기숙사’에 머물며 초현실주의 영화감독 부뉴엘과 화가 달리 등과 교분을 쌓았으며 스페인의 보수적 교육 전통에서 벗어나 그 시대의 자유정신에 입각해 지성인과 과학자를 키워 내고 있던 ‘자유교육협회’에도 등록해 인간 자유정신을 옹호하는 문인으로 알려지게 된다. 인간 존재에 대한 자유, 인간 본능에 대한 외침으로 이루어진 그의 삶의 흔적들은 그의 문학작품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는 신비하고 아름답고도 격정적인 시를 썼을 뿐 아니라 스페인 연극사에 있어 시극을 창시하고 인형극을 부활시켰으며, 비극이 불가능한 현대에 옛 그리스 비극의 정수를 부활시켰다. 또한 창작 활동에만 안주하지 않고 대학생들로 구성된 ‘움집’이라는 순회공연 극단을 창단해서 대중들에게 스페인 고전극을 널리 알렸다.
로르카는 1936년 8월 어느 날 새벽, 불분명한 이유로 프랑코 파에 의해 사살당하지만 문학작품으로, 또는 강단에서 인간의 자유를 노래했고 인간이 인간적 대우를 받기를 주장했던 그의 사상은 그의 작품 속에서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옮긴이
안영옥은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를 졸업하고 스페인 마드리드 국립대학교에서 오르테가의 진리 사상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스페인 외무부 및 오르테가 이 가세트 재단 초빙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고려대학교 스페인어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역서로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그의 비극적 삶과 죽음, 그리고 작품≫, ≪엘시드의 노래≫, ≪좋은 사랑의 이야기≫, ≪라셀레스티나≫, ≪세비야의 난봉꾼과 석상의 초대: 돈 후안≫, ≪인생은 꿈입니다≫, ≪죽음 저 너머의 사랑≫, ≪죽음의 황소≫, ≪예술의 비인간화≫, ≪러시아 인형≫, ≪세 개의 해트 모자≫, ≪피의 혼례≫ 등이 있고, 저서로 ≪스페인 문화의 이해≫, ≪올라 에스파냐: 스페인의 자연과 사람들≫, ≪서문법의 이해≫, ≪작품으로 읽는 스페인 문학사≫(공저), ≪열정으로 살다 간 스페인·중남미 여성들≫(공저) 외 다수가 있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제1막
제2막
제3막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1.
아! 고통의 풀밭이여!
아! 내가 고통도 기꺼이 감내할 아이를 원하는
아름다운 이에게 닫혀 있는 문이여,
대기는 나에게 잠든 달의 달리아를 제공하는구나!
따뜻한 젖을 갖고, 내 살에 붙어 있는 이 두 샘물은
내 근심의 가지를 박동시키는 말[馬]의 두 맥박.
아! 내 옷 밑에서 눈이 멀어 있는 젖가슴이여!
아! 눈도 없고 희지도 않은 비둘기여!
아! 갇힌 피의 아픔이 이다지도
내 목덜미를 벌처럼 쏘아 대고 있구나!
2.
자식을 못 낳는 시골 여자들은 가시나무처럼 쓸모가 없어. 아니 나쁘기까지 해. 아무리 하나님의 손에서 버림받은 폐품 같다 해도 말이야.
3.
전 아기가 꼭 있어야 하니까요. 그렇지 않다면 이 세상을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가끔 저는 결코, 결코… 자식을 가질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러면 발에서부터 열이 파도처럼 뻗쳐올라서 모든 것이 허망해진답니다. 길을 가는 남자나 황소, 또 돌멩이들이 솜뭉치 같아 보이죠. 왜 이런 것들이 여기에 있을까 하고 스스로 묻곤 해요.
4.
난 시들었어, 시들었어, 확실히 시들었어. 이제는 그걸 분명히 알아, 그래. 이제 나 혼자야. (일어선다.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난 가서 피가 새로운 다른 피를 예고해 주는지 보기 위해 놀라서 깨는 일 없이 푹 쉴 거야. 영원히 애를 갖지 못하는 몸으로 말이야. 뭘 알고 싶으세요? 가까이 오지 마세요. 내가 내 남편을 죽였어요. 내가 내 아이를 죽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