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단단히 맞물린 억압 체계들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
흑인 레즈비언 여성의 경험으로 직조한 ‘교차성 이론’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 계급 등의 권력 체계는 복잡하게 맞물려 서로를 강화한다. 이러한 억압의 작동 양상을 밝히는 ‘교차성 이론’은 오늘날 사회 불평등을 분석하는 데 필수적인 접근법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런데 이 교차성 이론의 근원에 흑인 페미니즘, 특히 오드리 로드가 자리한다는 사실은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로드는 흑인 페미니스트이자 백인 여성과 결혼해 딸과 아들을 기르는 레즈비언 엄마였다. 여러 위계의 교차점에 선 자신의 생생한 경험을 지식으로 생산하며 현대 페미니즘 이론을 크게 혁신했다.
이 책은 흑인 페미니즘 전통에 뿌리를 둔 로드의 존재론·인식론·관계론을 열 가지 키워드로 해설한다. 로드가 왜 여성들 사이의 차이와 깊은 감정의 힘에 주목했는지, 성애와 시학에 어떤 역할을 부여했는지, 분노를 어떻게 활용해야 한다고 여겼는지 등을 상세히 살필 수 있다. 로드에 따르면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온전히 정의하고 긍정하는 일은 생존의 문제고 앎의 문제며 다른 이들과 함께 온전히 살아가는 삶을 쟁취하는 정치다. 로드의 교차성 이론에서 우리를 에워싼 억압과 혐오에 맞설 방법을 발견해 보자.
오드리 로드(Audre Lorde, 1934∼1992)
현대 흑인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흑인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다. 일찍이 1950년대에 그리니치빌리지를 드나들며 스스로를 레즈비언으로 정체화했다. 레즈비언임을 공표하고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면서 미국 주류 문단의 벽을 허문 최초의 흑인 여성 시인이다. 1960년대부터 흑인 민권 운동과 급진적 여성 운동에 적극 참여한다. ≪블랙 유니콘≫을 비롯해 열 권 남짓의 시집을 출판했다. 산문으로는 자전적 글 ≪자미: 내 이름의 새로운 철자≫(1982), 산문과 강연 모음집 ≪시스터 아웃사이더≫(1984), ≪빛의 폭발≫(1988), 생전의 미출간 산문과 대표적 산문을 엮어 사후에 출간된 ≪나는 당신의 자매입니다≫(2011)가 있다. 흑인 여성과 흑인 레즈비언 여성의 경험을 페미니즘 존재론, 퀴어 인식론과 교차성 이론, 관계론 등으로 이론화했다. 이로써 정치적 보수화의 물결이 일고 여성과 퀴어에 대한 공격이 늘어나던 때 기나긴 정치적 우울을 어떻게 정치적 자원으로 삼을지에 대한 통찰을 제시했다.
200자평
교차성 이론을 정초해 현대 페미니즘 이론을 혁신한 오드리 로드의 사유를 해설한다. 로드는 흑인 레즈비언 여성으로서 자신의 경험을 지식으로 생산한다. 이로써 여러 권력 체계가 서로를 강화하며 작동하는 양상을 밝힌다. 로드의 존재론·인식론·관계론에서 억압과 혐오에 맞서 우리의 존재를 새롭게 정의할 방법을 찾아보자.
지은이
박미선
한신대학교 영미문화학 교수로 있다.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에서 사람들을 만나 공부하며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현대 미국 문학, 페미니즘 이론, 퀴어 이론을 연구하고 가르친다. 공저로 ≪페미니즘: 사이와 차이≫(2011)가 있다. 동료 페미니스트들과 페미니즘 이론의 명저들을 함께 번역했다. 그러한 번역서로는 페미니즘 정동 이론의 명저인 로런 벌랜트의 ≪잔인한 낙관≫(2024), 젠더 연구의 주요 개념과 쟁점을 다룬 ≪젠더 스터디≫(2024), 로지 브라이도티의 ≪포스트휴먼 페미니즘≫(2024), 오드리 로드의 ≪시스터 아웃사이더≫(2018), 젠더 사회학의 명저 퍼트리샤 힐 콜린스의 ≪흑인 페미니즘 사상≫(2009), 지젝·버틀러·라클라우의 ≪우연성, 보편성, 헤게모니≫(2009, 버틀러 챕터 번역), 탈식민 페미니즘의 명저 가야트리 스피박의 ≪포스트식민 이성 비판≫(2005), 로지 브라이도티의 ≪유목적 주체≫(2004) 등이 있다.
차례
흑인 페미니즘의 존재론, 인식론, 관계론
01 시스터 아웃사이더와 흑인 담론
02 콤바히강 공동체와 “흑인 페미니즘 선언문”
03 흑인 페미니즘의 존재론
04 깊은 감정의 힘, 성애와 시학
05 레즈비언 모성과 퀴어 가족
06 교차성: 개념과 이론의 역사
07 퀴어 인식론과 교차성 이론
08 차이 페미니즘
09 흑인 페미니즘의 관계론
10 감정 연구와 해방적 자기돌봄
책속으로
한 사회의 주변부에 있는 이들에게 앎은 자신의 존재를 되찾는 것에서 시작한다. 우리의 존재를 사회적으로 부정하고 혐오하는 지배적 규정에 맞서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온전히 정의하고 긍정하는 일은 생존의 문제고 앎의 문제며 다른 이들과 함께 온전히 살아가는 삶을 쟁취하는 정치다.
_“흑인 페미니즘의 존재론, 인식론, 관계론” 중에서
로드에게 말하기와 글쓰기는 생존의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다. 생존은 자신의 다층적 정체성을 긍정하는 일과 직결된다. 흑인 페미니스트이자 백인 여성과 결혼해 딸과 아들을 기르는 레즈비언 엄마였던 로드는 어디를 가든 자신의 일부를 부인하거나 무시하도록 요구받았다. 로드는 그러한 요구에 항상 이렇게 대응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정의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제멋대로, 자신들에게는 유리하지만 우리에게는 해가 되는 방식으로 우리를 정의”할 것이다.
_“03 흑인 페미니즘의 존재론” 중에서
로드는 서구 철학에서 유구한 사상/감정의 위계적 이분법에 맞서 감정이 진실한 지식과 지속 가능한 행동을 낳는 힘의 원천이라고 주장한다. 백인 아버지들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고 가르쳤다. 로드는 “나는 느낀다, 그러므로 자유롭다”고 선언한다. 이 선언은 여성성과 연결되는 것인 감정을 사유의 지배에서 해방해 자유의 영역으로 구축한다. 느낌을 자유로운 존재의 토대로 삼는다면, 의식과 사유를 존재의 토대로 삼은 백인 아버지들과는 다른 언어로 우리의 존재를 긍정하고 사유할 수 있다.
_“04 깊은 감정의 힘, 성애와 시학” 중에서
우리를 억압하도록 배치된 사회적 힘들을 신중히 다루지 못하고 그것들에 끌려갈 때, 우리의 마음속에 쌓인 분노는 친밀한 타인을 향한 폭력으로 엉뚱하게 표출된다. 로드는 아이들을 기르면서 화가 날 때, 그 화를 오랫동안 마음속 깊이 축적된 분노와 뒤섞어 표출하지 않도록 계속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분노의 원인은 사회적 폭력과 차별이지만, 그 분노는 너무나 자주 친밀한 사람을 향해 폭발하기 때문이다. “내가 느끼는 분노를 인식하고 명명해 그것을 유발한 곳에 두는 효과적 방법을 배우는 것.” 이는 로드 자신의 생존에도, 자녀들의 생존에도 중요한 일이다.
_“05 레즈비언 모성과 퀴어 가족” 중에서
분노를 유발한 정확한 원인에 분노를 놓으려면 분노와 혐오를 구분해야 한다. 엉뚱한 데 분노를 표출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다. 분노는 우리가 인종차별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다. “분노란 우리 사이의 왜곡된 관계를 슬퍼하는 감정이고, 그 목적은 변화”다. 반면 “혐오는 우리와 추구하는 목표가 다른 자들의 격분이며, 그 목적은 죽음과 파괴”다. 분노는 살기 위해 느끼는 감정이다. 혐오는 죽이려는 힘이다. 혐오는 소수집단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정당화하는 정서적 기제다.
_“09 흑인 페미니즘의 관계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