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요즈음만큼 시를 써 가는 이들에게 긴 안목이 요구된 때도, 일찍이 없었던 것 같다. 급변하는 세상 앞에 노래를 잃어버린 시인들이 너무 많다. 이런 때일수록 열화같이 뜨겁다가 금방 식기보다는, 오래 익힌 술맛을 내는 사람이 그리워진다. 그런 점에서 이른바 질풍노도의 가성(假聲)으로부터 단단한 민초들의 한 맺힌 노래에 이르기까지 긴 잉태의 흔적으로 점철된 오민석의 시에는 질긴 생명력이 넘친다. 갑작스레 뜨거워진 열애의 달콤함 대신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난 끝에 더없이 깨끗한 하늘을 만나던 때의 감동을 안겨 준다.
−박몽구(시인)
오민석의 문학적 완결성은 이미지·상징·시 형식 등을 철저히 검열하는 필터를 거치고 있다. 그는 부지런히 오감을 놀리며 빈틈없이 시를 이미지화한다. 그가 구사하는 언어의 장식은 예리한 칼 같다. 그것은 사념의 갈피를 얇게 도려낼 만치 예리하여, 시의 지방과 군살을 제거하고 섬세한 신경과 뼈를 드러내 준다.
−김응교(시인)
200자평
1980년대, 그 짐승의 시대를 통과하며 민중 연대를 향해 달려 나간 시인 오민석.
197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반의 시를 엮은 그의 첫시집을 복간했다. 시인의 뜻에 따라 편제를 바꾸고 일부 시를 수정했으며, 새로이 쓴 시를 추가했다. 변혁을 향해 기운차게 나아가는 연대의 열차는 오늘도 멈추지 않는다.
지은이
오민석은 충남 공주 출생이다. 1990년 ≪한길문학≫ 창간기념 신인상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당선되며 평론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기차는 오늘밤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문학이론서 ≪정치적 비평의 미래를 위하여≫, 번역서로 바스코 포파 시집 ≪절름발 늑대에게 경의를≫ 등이 있다. 현대 단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다.
차례
제1부 새들의 저녁
甲寺 오르는 길 1
甲寺 오르는 길 2
블랙 유머
배롱나무를 보다
거덜 난 경제
신성한 저녁
甲寺 내려가는 길 1
흐린 겨울 아침의 詩
大寂殿 浮屠
새들의 저녁
甲寺 내려가는 길 2
배롱나무의 茶毘
불
그러나 나는 두려운 거다
달 밝은 겨울밤
눈을 뒤집어쓴 배롱나무
소를 묻다
황매화와 배롱나무
山竹
네가 보고 싶다
甲寺 내려가는 길 4
별이 있는 풍경
만남
제2부 눈 속을 달리며
눈 속을 달리며
잘 가세, 잘 가
그날 밤 나는
일터로 가는 아내에게
가을 들판
즐거운 하루
가네, 태선이 아주머니
어느 날의 센티멘털리즘에 대한 비판
푸른 꽃
모기가 나에게
육시(戮屍)
물
노랑할미새
속초 바다
너를 보면, 백두여
기차는 오늘 밤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경철이
긴 긴 여름입니다
긴 긴 여름입니다
자는 아내를 보면
조국이여, 오늘 밤에는
난데없이, 한 떼의 기러기가
닭장, 쎄울, 1991
닭장, 쎄울, 1991
환속
그대 가신 날
편지·1
서해 먼 물길 사이로
편지·2
화야산 가는 길
편지·3
저 창동 논도랑에
제3부 자꾸 멀어지는 그대에게
자꾸 멀어지는 그대에게
어제는 셰익스피어를
상처처럼 살아 있을
1985년을 보내며
지금, 진눈깨비로
꿈이 큰 사나이들을 애도하기를 거부함
그날, 서울 시민 김 아무개 씨의 하루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할 말이 없다, 그대를 보면
횡성, 1986년 3월
제4부 벽
벽·1
빛의 음모(陰謀)
환상적 풍경 소곡
그대를 위한 변주·1
詩·1
한낮에
독무(獨舞)
詩·2
詩·3
詩·4
변종하의 ‘어떤 탄생’
제주 기행
겨울 노래
집·1
할머니
집·2
집·3
장욱진의 ‘마을’
가로(街路)의 우울
안개 나라
우리가 지나온
그리운 얼굴을 찾아가는 기차에게 / 김응교
시인의 말
개정판에 부쳐
오민석은
책속으로
기차는 오늘 밤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성북역에서 출발한 기차가 청량리역을 지나갑니다. 눈발 속에서 군데군데 시동을 끈 차량들이 웅크리고 있습니다. 기차는 검은 괴물인가요, 꿈쩍도 없이 이 추위 속에 멈춰 선 기차는 소리도 지르지 않습니다. 다만, 이 마음속의 광야에도 눈이 내리고 이 마음이, 멈춰 선 시간을 쇠망치로 두드립니다. 망치 소리 사이로 눈이 또 내리고 기차는 어느덧 왕십리를 지나 옥수동을 거쳐 서빙고로 달려갑니다. 언 강바닥 멀리 이 한밤중에 모래 채취를 하는 작은 포크레인의 불빛이 반짝입니다. 포크레인은 내 마음 같습니다. 눈발 속에서도 시린 눈을 깜짝이며 포크레인은 언 땅바닥을 파냅니다. 도저히 지지 않을 싸움, 자주, 민주, 통일의 길 위에 작지만 따순 발자국들이 모입니다. 발밑 세상은 동토입니다. 눈발이 차창을 가득 메우며 아우성입니다. 아우성치며 외칩니다 “기차는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의 겨울통로를 힘차게 울리고 달려 그리운 것들을 마음껏 껴안을, “기차는 오늘 밤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광야 위로 멈춰 섰던 기차들이 흰 콧김을 내뿜습니다. 어깨에 쌓인 눈들이 떨어져 내립니다. 그리운 얼굴들이 조금씩 환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시인의 말
이 시집에 나오는 시들은 대략 197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반 사이에 씌어진 것들이다. 말하자면 근 십여 년의 시간차를 갖는 작품들이 한 군데에 어우러져 있는 셈인데, 따라서 그 시간의 길이만큼이나 말을 부리는 방법, 시적 소재, 정서적 구조 등에 있어서 각 작품들 사이에 일정한 편차가 존재할 것이다.
비교적 늦은 편에 속한 나의 첫 시집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아무도, 교정을 볼 때 내가 느꼈던 그 참담했던 심정을 모를 것이다. 그러나 처참함 속에 나의 십여 년 정겨웠던 문청기(文靑期)를 묻는 기분이 썩 나쁜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길은 언제나 길로 다시 시작되고, 길 떠남은 곧 길 만들기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는, 아주 평범한 진리를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집이 나오기까지 부족한 나에게 덕을 베푸신, 내가 아는 모든 나의 사람들이여, 별로 따뜻할 것 없는 이 세상을 그래도 내가 살 만하다고 느끼는 것은 모두 그대들과의 정 깊은 교분 때문이리.
1992년 3월, 따뜻한 날에
오민석
개정판에 부쳐
낯설던 치욕이여 바이바이
처음이었던 상처여 바이바이
허나 우리 지금 오래된 이야기처럼
또 비 맞고 있으니
때로 다소곳이
이 불운한 행성을 견디는 것도 좋으리
모든 정거장 문을 닫고
다시 돌아서도 좋으리
2014년 초봄
교동 우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