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중국 남송 순희 2년(淳熙, 1175) 범성대는 사천 성도부(成都府) 지부로 임명되었다. 그는 촉 땅에서 생활한 2년 정도의 시간 동안 군사 제도를 정비하고 민심을 수습하고 세금 부과를 가볍게 하는 등의 여러 치적을 쌓았다. 그러나 허약한 체질과 과다한 업무로 병이 위중해지자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했다. 순희 4년(1177) 5월 29일 사천(四川)의 성도(成都)를 출발하여 10월 3일 고향인 소주(蘇州)로 돌아갔는데 이 4개월여의 뱃길 여행을 기록한 것이 ≪오선록(吳船錄)≫이다.
≪오선록≫의 가장 큰 형식적 특징은 ‘일기체’라는 점이다. 중국에서 일기는 오랫동안 개인적이고 은밀한 글쓰기가 아니었다. 일기는 역사를 기록하는 임무를 맡은 사관(史官)이 날짜에 따라 군주의 언행을 기록하던 기거주(起居注)에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역사적 사건과 중요한 인물을 중심으로 객관적 사실만이 기록되었고, 기술자의 주관적 의견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송대 이전까지 ‘일기’는 사적(私的)인 성격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매일의 연속성과 사실성에 중점을 둔 공식적인 역사 기록이었다.
그러나 송대에 이르러 ‘나’의 경험과 느낌을 기록한 일기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구양수(歐陽修)의 ≪우역지(于役志)≫, 황정견(黃庭堅)의 ≪의주을유가승(宜州乙酉家乘)≫, 육유(陸游)의 ≪입촉기(入蜀記)≫와 더불어 송대 일기문학의 대표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오선록≫이다. 그러나 구양수와 황정견의 일기는 아무런 수식 없이 최소한의 경제적 언어로 나라의 큰 사건이나 왕의 일상을 메모처럼 간단히 기록한 것이었다. 이들의 일기는 ‘비망’을 위한 일종의 ‘장부’였다.
이와 달리 남송의 육유와 범성대에 이르면 일기는 문학적 수사와 기교를 동원하여 자신의 경험을 더욱 풍성하고 리얼하게 기록하게 된다. ≪오선록≫이 사천부터 소주 지방까지 장강을 따라 내려온 여행인 반면, 7년 전 육유는 장강을 거슬러 올라 사천 지방으로 들어가면서 ≪입촉기≫를 집필했다. 장강 뱃길을 오간 두 문인의 여정을 함께 종합해 보면 더 온전한 장강 여행을 재현할 수 있다.
범성대에게는 ≪오선록≫ 이외에도 두 권의 일기가 더 있다. 1170년에는 금(金)나라 사행의 기록으로 ≪남비록(攬轡錄)≫을 집필하였고, 1171년에는 정강부(靜江府), 즉 지금의 광서성 계림의 부임지로 가는 여정을 ≪참란록(驂鸞錄)≫으로 남겼다. 범성대가 일기를 쓴 것은 여행의 경험이 유용한 정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송대 문인의 여행 기회가 이전에 비해 많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아무나 수시로 가능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익숙한 일상을 떠나 낯선 풍경과 삶의 모습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은 선택된 자들이나 누릴 수 있었다. 따라서 자신의 여행을 기록해 둠으로써 그곳에 가보지 못한 독자에게 지리학적, 생물학적, 기후적, 생활적, 문화적 지식을 제공하는 안내서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범성대의 장강 뱃길 여행은 사천(四川)의 도강언(都江堰) 근처에서 시작된다. 청성산(靑城山)과 아미산(峨眉山)을 두루 구경하고, 지금은 댐이 건설되어 예전 모습을 볼 수 없는 삼협(三峽)을 지나, ‘여산 진면목’으로 유명한 여산(廬山)을 거쳐 소주(蘇州)로 돌아오는 여정은 중국의 대표적 명승지를 콕콕 짚은 알찬 여행 패키지다. 게다가 ‘남송사대가’로 칭송되는 범성대의 문학적 재능과 감수성은 여행의 설렘과 흥분, 즐거움, 때로 맞닥뜨리는 위험한 상황에서의 두려움과 긴장,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수려한 대자연, 그를 마주한 경이로움과 감탄을 온전히 표현해 내 우리를 그 여정 속으로 함께 끌어들인다. 명대(明代)의 문인 진굉서(陳宏緖)가 평생을 소원하던 장강 여행을 ≪오선록≫을 읽음으로써 대신했다고 한 말은 빈말이 아닌 것이다.
200자평
중국 남송 순희 2년, 촉땅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범성대는 몸이 허약해지자 고향으로 돌아간다. 순희 4년(1177) 5월 29일 사천(四川)의 성도(成都)를 출발하여 10월 3일 고향인 소주(蘇州)로 돌아가기까지 약 4개월 동안 뱃길 여행을 하는데, 이를 기록한 것이 ≪오선록(吳船錄)≫이다. 이 뱃길 여행은 사천(四川)의 도강언(都江堰) 근처에서 시작해 청성산(靑城山)과 아미산(峨眉山)을 두루 구경하고, 지금은 댐이 건설되어 예전 모습을 볼 수 없는 삼협(三峽)을 지나, ‘여산 진면목’으로 유명한 여산(廬山)을 거쳐 소주(蘇州)로 돌아오는 여정이다. 중국의 대표적 명승지를 콕콕 짚은 알찬 여행 패키지다.
≪오선록≫은 ‘일기’체로 되어 있다. 중국에서 일기는 원래 역사적 사건과 중요한 인물을 중심으로 객관적 사실만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송대에 이르러 ‘나’의 경험과 느낌을 기록한 일기가 등장한다. 남송의 육유와 범성대에 이르러 일기는 문학적 수사와 기교를 동원하여 자신의 경험을 더욱 풍성하고 리얼하게 기록하게 된다.
지은이
범성대(范成大, 1126∼1193)의 자는 치능(致能), 호는 석호거사(石湖居士)다. 정강(靖康) 원년(1126)에 태어났다. 열네 살에 모친을, 열다섯 살에 부친을 여의고 나서 이후 10여 년간 고향에 칩거하여 학문에 정진하고 집안을 건사하면서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부친의 유지를 따르라는 권고에 과거 준비를 시작, 소흥(紹興) 24년(1154) 스물아홉 살의 나이로 진사(進士)가 되었다.
신안(新安), 처주(處州), 정강부(靜江府), 성도부(成都府), 명주(明州), 건강부(建康府) 등지의 지방행정장관을 역임하였고, 중앙에서는 교서랑(校書郞),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 중서사인(中書舍人)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두 달여 간의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부재상의 직위에 해당하는 참지정사(參知政事)까지 승진하기도 했으며, 아무도 나서지 않던 금(金)나라 사행을 자청하여 다녀오는 기백과 충정을 발휘하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허약한 체질에 병치레가 잦았던 범성대는 순희(淳熙) 10년(1183) 58세에 건강상의 이유로 퇴직을 청하였고, 황제의 윤허로 30여 년에 걸친 관직 생활을 마감하게 된다. 이후 고향인 소주(蘇州)로 돌아와 석호(石湖) 부근에 살면서 소박한 전원생활을 누리다가 소흥(紹興) 4년(1193)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문학사상 육유(陸游), 양만리(楊萬里), 우무(尤袤)와 더불어 남송사대가(南宋四大家)로 칭해지는 범성대는 전원 풍경화를 보는 듯한 서정성 짙은 전원시와 농민의 애환을 담은 사회적 성격의 전원시 두 가지를 자연스럽게 하나로 융화시킨 전원시인으로 유명하다.
옮긴이
안예선(安芮璿)은 중국 상하이 푸단(復旦)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려대학교에서 강의하며 중국 고전 산문을 연구하고 있다. 최초로 ‘수필’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남송(南宋) 홍매(洪邁)의 ≪용재수필(容齋隨筆)≫(공역), 후한(後漢) 반고(班固)의 ≪한서(漢書)≫를 선역한 ≪한 권에 담은 한나라 이야기-한서 선역≫ 등의 역서가 있다.
차례
상권
유월 : 기사일(己巳, 6월 1일)∼정유일(丁酉, 6월 29일)
가을 칠월 : 무술일(戊戌, 7월 1일) 계묘일(癸卯, 7월 6일)
하권
갑진일(甲辰, 7월 7일) 정묘일(丁卯, 7월 30일)
팔월 : 무진일 (戊辰, 8월 1일) 병신일(丙申, 8월 29일)
구월 : 정유일(丁酉, 9월 1일) 병인일(丙寅, 9월 30일)
겨울 시월 : 정묘일(丁卯, 10월 1일) 기사일(己巳, 10월 3일)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미주 관서의 청사 뒤에 옛날 부뚜막이 있다. 태수는 감히 이곳에 거처하지 못하고 빗장을 걸어두고 제사 지낸다. 또 군수품 창고에는 돌이 가득 채워져 있는 물독이 있다고 한다. 매달 초하루에 제사를 지내면서 물과 돌을 각각 한 그릇씩 더 넣는데, 몇 년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아직도 다 차지 않았다고 한다. 여태껏 들어본 관부의 괴이한 일 중에서 미주의 부뚜막과 항아리만 한 것이 없다.-경진일(庚辰, 6월 12일)
저녁, 남루에 모였다. 남루는 주청 앞 황학산 위에 있다. 건물이 웅장하고 화려하며 높고 서늘하여 형호 지역에서 으뜸가는 곳이다. 아래로 남시를 내려다보니 마을의 집들이 비늘처럼 줄지어 있다. 민강이 서남쪽에서 비스듬히 성 동쪽을 감싸며 흘러내려 간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고, 달빛이 유난히도 밝다. 강물은 비단 같고, 하늘빛과 물빛이 섞여 하나가 된다. 평생 보았던 중추절 달이 오늘처럼 좋은 적은 손으로 꼽을 만큼 몇 번 되지 않는다.-임오일(壬午, 8월 15일)
백리황(百里荒)을 지나갔다. 호수 가득 풀과 갈대가 우거지고 사람의 자취가 전혀 없으니 큰 도적 떼가 출몰할 만한 곳이다. 달빛은 대낮처럼 밝고 장사들은 용감무쌍하다. 밤새도록 노 젓는 소리를 내며, 활과 쇠뇌의 시위를 팽팽히 당겨두고, 북과 징을 두드리며 갔다. 새벽까지 쉬지 않고 갔다.-경진일(庚辰, 8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