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 대표 시인의 육필시집은 시인이 손으로 직접 써서 만든 시집이다. 자신의 시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시들을 골랐다. 시인들은 육필시집을 출간하는 소회도 책머리에 육필로 적었다. 육필시집을 자신의 분신처럼 생각하는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육필시집은 생활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는 시를 다시 생활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기획했다. 시를 어렵고 고상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쉽고 친근하게 접할 수 있는 것으로 느끼게 함으로써 새로운 시의 시대를 열고자 한다.
시집은 시인의 육필 이외에는 그 어떤 장식도 없다. 틀리게 쓴 글씨를 고친 흔적도 그대로 두었다. 간혹 알아보기 힘든 글자들이 있기에 맞은편 페이지에 활자를 함께 넣었다.
이 세상에서 소풍을 끝내고 돌아간 고 김춘수, 김영태, 정공채, 박명용, 이성부 시인의 유필을 만날 수 있다. 살아생전 시인의 얼굴을 마주 대하는 듯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200자평
청춘의 가마솥을 뜨겁게 달구어 낸 5월 광주를 늘 가슴에 품어온 이승철 시인의 육필시집.
등단 30주년을 맞아 표제시 <오월>을 비롯한 54편의 시를 시인이 직접 가려 뽑고
정성껏 손으로 써서 실었다.
지은이
이승철은 1958년 전남 목포 산정동에서 철도원이었던 아버지(이진호)와 어머니(박상월) 사이에 1남 3녀 중 막내이자, 2대 독자로 태어나 서울과 함평에서 유년과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함평초등, 함평중, 학다리고를 졸업하고 광주에서 호남대를 다니다가 1980년 5월, 광주항쟁의 충격으로 대학을 그만두었다. 고교 시절부터 김준태 시인을 문학적 스승으로 모시며, 스무 살 문청 시절을 보냈다.
1982년 12월부터 1983년 10월까지 ‘5월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광주에서 박선욱, 조진태, 정삼수, 장주섭, 박정모, 박정열, 김형수(송정리), 정봉희, 이형권 시인 등과 함께 <광주 젊은 벗들> 시낭송기획실을 조직해, 4차례에 걸쳐 시 낭송 운동을 전개했고, 화가 홍성담 등 <토말그룹>과 함께 시화전을 개최했다.
1983년 12월 김규동, 김봉근, 박몽구, 박선욱 시인의 추천에 힘입어 시 전문 무크 ≪민의≫ 제2집 ≪시와현실≫(일월서각)에 5월의 진실과 그 상처를 형상화한 <평화시장에 와서>, <용봉동의 삶> 등 7편으로 등단했다. 등단 이후 소설가 김성동 선생과 시인 홍일선 형으로부터 ‘우촌(牛村)’과 ‘일함(一咸)’이라는 아호(雅號)를 받다.
1984년부터 2012년까지 나남, 인동, 산하출판사 편집장과 황토출판사 대표, 화남출판사 편집주간으로 활동했다. 이때 김남주 옥중 시집 ≪나의 칼 나의 피≫, 5월 광주항쟁 시선집 ≪누가 그대 큰 이름 지우랴≫, 광주항쟁 소설선집 ≪일어서는 땅≫, 광주민중항쟁 10주년 기념 시집 ≪하늘이여 땅이여 아아, 광주여≫ 등과 해방 이후 ‘표현의 자유’ 문제로 투옥된 문인들의 작품을 한데 모은 ≪한국문학필화작품집≫ 등 다수의 인문학 서적을 출간했다. 황토출판사 대표 시절, 북한의 장편소설 ≪꽃 파는 처녀≫, ≪한 자위단원의 운명≫ 등을 출간했다 해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2011년 5월 24일, ‘5 ․18 광주민주화운동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을 기념해 <5 ․18기념재단>에서 2013년 4월에 완간한, 전 4권의 ≪5월문학총서≫(시, 소설, 희곡, 평론/도서출판 문학들) 간행의 책임 편집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또한 화남 출판사 편집주간으로 있으면서 ‘대운하 반대와 생명의 강을 모시기 위한 시인 203인의 특별 공동시집’ ≪그냥 놔두라 쓰라린 백 년 소원 이것이다≫, 노무현 대통령 추모 시집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 김대중 대통령 추모 시집 ≪님이여, 우리들 모두가 하나 되게 하소서≫ 등을 기획, 출간했다.
1984년 12월,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재창립 회원 및 간사로 문학운동에 뛰어들었고, 이후 이 단체가 확대 개편되어 1993년 1월부터 2년간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사무국장으로 활동했다. 이후 이 단체의 이사와 청년문학인위원회 및 자유실천위원회의 부위원장 등을 지냈으며, 2004년 10월 고은 시인의 주도로 창립된 <한국문학평화포럼>의 사무국장, 2007년 <한국작가회의>의 이사, 광주전남작가회의 부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표현의 자유를 위한 제반 활동을 전개했다.
주요 시집으로 ≪세월아, 삶아≫(두리출판사, 1992), ≪총알택시 안에서의 명상≫(실천문학사, 2000), ≪당산철교 위에서≫(솔출판사, 2006) 등을 펴냈으며, 공동 산문집으로 ≪이 시대의 화두−58 개띠들의 이야기≫(화남출판사, 2006) 등을 출간했다.
현재 한국문학평화포럼 사무총장, 한국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차례
자서
1부 뼛속에서 산꿩이 울던 날
자화상
세월아, 삶아
뼛속에서 산꿩이 울던 날
오월
갈대
그러나 나는 살아 있지 않은가
당산철교 위에서
바람 찬 날들의 미루나무처럼
화가 김호석의 법정 스님
호수공원 자작나무 사이로
마포 강변에서
함평천지
정선, 곤드레나물밥
총알택시 안에서의 명상
어느 지천명(知天命)의 비가(悲歌)
천태산 은행나무
2부 그때 너의 촛불은
배롱나무님께
북한산에서 바라본 그녀의 풍경
만다라화들이 영혼의 뻘밭에서 출렁일 때
채광석 형님
그날의 강화 선창가
석농자 홍일선 시인
그때 너의 촛불은
미스터 리의 회상
한겨울, 메타세콰이아를 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외로웠던 날
벽 속에 갇힌 너
못 박힌 세월아
사랑한다는 것은
3부 흰 극락강 너머 광주
용봉동의 삶
광주, 양산동에서
어느 날 무등을 보다가
오월 비
오월 노래
정든 임
이별 후에
평화시장에 와서
육신에게 하는 말
울 아버지 생각
나는 어디에 있는가
밤배 타고 떠난 박종권 시인
흰 극락강 너머 광주
4부 진정, 살아 있는 날들의 비망록
이 녹슨 기계
그해 겨울, 봉원사에서
마흔 살에 대하여
어느 날의 독백
진정, 살아 있는 날들의 비망록
새봄에
겨울새
하, 중심이 없다
만수산 드렁칡처럼
그래도 절망에게
파도가 방파제에게
겨울나무님께
이승철은
책속으로
오월
내 청춘의 가마솥을 달구어 내던
오월 생목숨이 다시 왔구나.
다만 성령으로 반짝이던 들녘과
끝없이 어깨동무한 핏빛 스크럼이
차마 눈부셔 어화둥둥 견딜 수 없고
금남로의 사람들은 무등을 향해 떠났다.
그날 쓰러져 영산강이 된 꽃 넋들은
아무 말씀도 없이 천지를 꽉 채우고
살아, 욕된 눈빛만 남은 자들이 모여
팔뚝 없는 주먹으로 저 먼 길을 가리킬 때
누가 지금 오뉴월 보리밭에서 흔들리는가.
어서 오라, 그대 5월의 젊은 벗들아
우리가 무릎 꿇고 맞이해야 할
오월 생목숨의 날이 바로 오늘이구나.
자서(自序)
그리운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가고 얼마나 많은 천둥과 폭풍우가 내 곁에 휘몰아쳤던가. 나에게 만약 그토록 찰진 그리움의 파편들이 없었다면, 내 생은 아마 가당치도 않았을 것이다. 해 저문 산언덕 너머 그날 서럽게 떠나갔던 황토산 임들이 살고 있다. 그 강 언덕 아래 서글피 우짖던 개망초꽃 한 송이가 전생의 나였다면, 어찌할 것인가. 오늘의 나는 분명, 어젯밤 잉태된 그 숨결로 다시 태어났다.
1983년 12월, 문단이라는 곳에 처음 얼굴을 내밀었다. 바야흐로 올해가 등단 30주년이 된다. 이를 기념할 겸 육필시집이라는 것을 처음 펴내게 되었다. 그동안 출간했던 시집들과 신작 시 중에서 가려 뽑았고, 또 어떤 작품은 새롭게 손질도 해 보았다. 내 앞에 펼쳐지고 굽이쳤던 지난 30년이란 세월들. 그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혹은 장명등 불빛으로 다가와 언뜻 반짝인다. 그 5월 광주에서 쓰러진 벗들과 형제자매들을 절대 잊지 말자고 다짐했던 지난날들이 내게 살아 있다. 민족과 민중의 삶을 포옹하고, 시대의 진실을 그 아우성을 시(詩) 속에 담아내야 한다고 다짐했던 그 시절이 내게 떠오른다. 그러한 자기 다짐이 내 시편들 속에 그동안 얼마나 반영되고 실천되었는지 이번 육필시집을 펴내면서 스스로 되돌아보고, 성찰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이즈음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하루하루를 버티며 산다는 게 저리도 녹록치 않다. 21세기에 들어섰건만 20세기적 독선과 불통의 정치가 대한민국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 남북 분단의 농성 체제는 여전히 견고하고, 철조망 저 너머에 수천 년 동안 함께 피를 나눈 또 다른 형제자매들이 존재하고 있건만, 분단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지배 권력은 민족과 민중의, 저 끈질긴 염원과 갈망을 저버린 채 쇠가시 철조망을 사수하고자 오늘도 발버둥 치고 있다. 그리고 주변을 한 번 돌아보니 가까스로 혹은 질펀하게 혼자만 잘살고자 하는 인간 군상, 그 허망한 몸짓들을 보고, 또 본다.
꿈속에서 핏속에서 피어난 시덥잖은 내 시(詩)가 그래도 세상을 향해 울부짖음을 멈추지 않았을 때 내 삶은 분명코 싱그러웠을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 쉰여섯의 하루 속에서 문득 서울의 가을 하늘을 쳐다보니, 그야말로 미치도록 푸르른 저 얼굴이 날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말고. 시련과 우울과 분노에 가득 찼던 연옥 같은 한 시절을 이만큼 견뎌 왔으니, 한세상을 잘 놀았다고 아니 말할 수 없다. 돌이켜 보니, 술 백 잔의 나날로 살아야 했던, 지난날들이 저리도 휘황찬란하게 반짝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