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광부의 아들이었던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은 사업적으로 승승장구하다 불미스런 사건에 휘말려 직위를 잃고 수감된다. 출옥 후에는 다락방에서 은둔하며 수감 생활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이어 간다. 밤늦도록 다락방을 어슬렁대는 그의 발소리가 집 안 전체를 죽음의 분위기로 몰아넣는다. 입센은 제한된 공간에서 과거의 영광에 갇혀 지내는 보르크만의 현실을 우회적인 방식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그 이면엔 철저한 고독 속에서 글쓰기와 상상의 유희에 몰두했던 작가 자신의 모습을 검춰 두었다.
보르크만의 분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에르하르트는 죽음의 분위기가 지배하는 집을 벗어나 삶에 활력을 찾고자 한다. 명예 회복을 위해 아들을 이용하려는 어머니(군힐), 조카에게서 실패한 사랑을 보상받고 싶어 하는 이모(엘라), 아들에게 힘의 위계를 각인시키려는 아버지(보르크만)는 에르하르트의 젊음과 열정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 에르하르트를 자기 곁에 두려는 세 사람의 경쟁은 점차 치열해지지만 누구도 자신의 삶을 살겠다는 에르하르트의 의지를 꺾지 못한다. 에르하르트의 도전은 보르크만을 각성시키며, 집 전체에 무겁게 내리깔린 죽음의 분위기에도 균열을 일으킨다.
입센은 후기 작품에서 주로 삶과 예술에 대한 성찰과 고민을 드러낸다. 거기에는 예외 없이 젊은 시절 빛나는 성취를 이루었지만 점점 쇠락해 가는 만년의 예술가, 열정과 패기로 상기된 청년이 함께 등장한다. 신구의 대립과 갈등은 빛나는 이상과 예술, 그렇지 못한 삶 사이의 괴리를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과 <건축가 솔네스>는 많이 닮았다. 만년의 예술가는 이제 절대 천진하게 이상을 좇고 순수하게 예술에 심취했던 눈부신 한때로 돌아갈 수 없다. 입센은 그걸 잘 알았고, 거의 모든 작품에서 이런 비관론과 염세주의를 표출했다.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은 그중에서도 특히 입센의 세계관이 현저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은 1897년 1월 10일 핀란드 헬싱키의 수오말라이엔 테아테리(Suomalaien Teatteri)와 스웨덴의 스벤스카 테아테른(Svenska Teatern)에서 초연되었다. 이후 1897년 한 해 동안 유럽 각지에서 공연이 이어졌다. 1월 25일엔 노르웨이 크리스티아니아에서, 그리고 1월 31일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대중과 만났다. 독일에서는 프랑크푸르트를 시작으로 전국에서 공연되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따금 검열의 대상이 되곤 했다.
오늘날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은 입센의 후기 희곡 중에서도 비교적 꾸준히 무대에 오르는 작품으로 분류된다. 또한 유럽과 미국에서는 그 역사적·사회적 시의성과 관련해 공연 기간 내내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작품으로 정평이 나 있다. 애석하게도 한국에서의 공연과 출판 기록을 찾기는 어렵다. 이제야 원작에 충실한 번역과 최신 연구 결과가 반영된 전문적이고 심층적인 해설을 통해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을 본격적으로 소개할 수 있게 되었다.
200자평
젊은 시절 부와 명예만을 좇았던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은 사업에 실패한 뒤 스스로를 다락방에 유폐하고 두문불출한다. 그를 각성시킨 건 아들 에르하르트다. 에르하르트가 자신의 삶을 찾겠다고 선언하고 떠난 뒤 다락방을 탈출한 보르크만은 자신의 꿈과 이상이 묻힌, 눈보라치는 숲으로 향한다.
에드바르드 뭉크는 작품의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세계관에 매료되어 ‘밤의 방랑자’라는 제목을 붙인 자화상에서 자신을 보르크만과 동일시하기도 했다.
지은이
헨리크 입센(Henrik Johan Ibsen)은 1828년 3월 20일 노르웨이의 수도 크리스티아니아(지금의 오슬로)에서 남서쪽으로 100마일 떨어진 작은 항구도시 시엔에서 태어났다. 여덟 살 때 집이 파산해 열다섯 살까지 약방에서 도제로 일했다. 독학으로 대학 진학을 위한 수험 준비를 하는 한편, 신문에 만화와 시를 기고했다. 희곡 <카틸리나>(1848)를 출판했으나 주목받지 못하고 그 후 <전사의 무덤>(1850) 상연을 계기로 대학 진학을 단념하고 작가로 나설 것을 결심했다. 1851년 국민극장 상임작가 겸 무대감독으로 초청되었는데, 이때 무대 기교를 연구한 것이 훗날 극작가로 대성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1857년에 노르웨이 극장으로 적을 옮긴 뒤 최초의 현대극 <사랑의 희극>(1866)과 <왕위를 노리는 자>를 발표했으나 인정받지 못했다. 이탈리아에서 목사 브란을 주인공으로 한 대작 <브랑>(1866)을 발표하여 명성을 쌓았다. 이후 <페르 귄트>(1867), <황제와 갈릴리 사람>(1873) 등에서 사상적 입장을 확고하게 굳혔다. 이어 사회극 <사회의 기둥>(1877), <인형의 집>(1879) 등을 발표했다. 특히 <인형의 집>은 여주인공 노라가 남성에 종속된 여성으로서의 삶을 거부하고, 한 인간으로서 독립하려는 과정을 묘사해 여성 해방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00년 뇌출혈로 첫 발작을 일으킨 이후 병세가 악화되어 1906년 78세로 사망했다.
옮긴이
조태준은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나 성균관대학교 불어불문학과 및 동(同) 대학원을 졸업하고 앙토냉 아르토의 연극 이론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출과 객원교수를 거쳐 배재대학교 연극영화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2012년 미국 루이지애나 대학교(ULL) 커뮤니케이션학과 방문교수를 지냈다. 연극 이론 및 극작술, 공연 미학에 관련한 논문과 칼럼을 여러 편 썼으며, 고등학교 인정 교과서 ≪연극≫(천재교과서, 2018)을 공동 집필했고, <골고다의 딸들>(한웅출판, 1992>, <바람의 전쟁>(열린세상, 1996> 등의 번역 소설과 번역 희곡 <유령소나타>(지만지, 2014)와 <바다에서 온 여인>(지만지, 2015), <로칸디에라>(지만지, 2016),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지만지, 2018), <헤다 가블레르>(지만지, 2018), <건축가 솔네스>(지만지드라마, 2019), <루나사에서 춤을>(지만지드라마, 2020)>, <로스메르스홀름>(지만지드라마, 2020)을 펴냈다. 또한 공연 창작 현장에서 극작가 및 연출가, 드라마투르그로 활동하면서 연극, 뮤지컬, 오페라, 무용 등 다양한 공연 장르를 넘나들며 다수의 작품에 참여했고 현재 극단 인공낙원 대표, 극단 하땅세 상임 연출로 활동 중이다. 대표작으로는 희곡 <창밖의 앵두꽃은 몇 번이나 피었는고>, <3cm>(지만지드라마, 2021), <푸른 개미가 꿈꾸는 곳> 등이 있으며, 연극 <유령소나타>, <루나사에서 춤을>, <목소리>, 뮤지컬 <포비든 플래닛>, <애랑연가>, <규방난장>, 오페라 <류퉁의 꿈> 등을 연출했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제1막
제2막
제3막
제4막
해설
지은이에 대해
지은이 연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엘라 렌트헤임: (그녀를 쳐다보며) 이건 필시 끔찍한 삶이야, 군힐!
보르크만 부인: 끔찍한 거 이상이지. 조만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될 거야.
엘라 렌트헤임: 난 충분히 이해돼.
보르크만 부인: 주구장창 저 위에서 그 사람 발소리가 들리는 거야.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아주 크게, 마치 여기 아래층에서 나는 것처럼!
엘라 렌트헤임: 그러게, 이상하게 소리가 여기까지 울리네.
보르크만 부인: 가끔 난 위층 거실에 병든 늑대 한 마리가 우리 안을 어슬렁거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 바로 내 머리 위에 말이야. (귀를 기울이고는 속삭인다.) 들어 봐, 저 소리! 들어 봐!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늑대가 어슬렁대잖아.
-21쪽
에르하르트: (감정을 표출하며) 전 젊습니다! 저도 제 인생을 살고 싶어요! 제 자신의 삶을 살고 싶다고요!
엘라 렌트헤임: 꺼져 가는 가엾은 인생을 밝혀 주기 위해 그저 몇 달 희생하는 것도 안 되겠니?
에르하르트: 이모, 전 그러고 싶지만 할 수가 없어요.
엘라 렌트헤임: 널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한테도 안 된다고?
에르하르트: 제가 살아 있는 한, 엘라 이모… 전 못해요.
보르크만 부인: (그를 쏘아보며) 더 이상 네 어미도 널 붙잡을 수 없다는 거냐?
에르하르트: 전 언제까지나 어머니를 사랑할 거예요. 하지만 계속 어머니만을 위해서 살 순 없어요. 그건 제 삶이 아니니까요.
보르크만: 그렇다면 이리 와서 날 따르거라! 왜냐하면 삶이란 곧 일이니까, 에르하르트. 자, 그러니 우리 함께 살아나가면서 일을 하자꾸나!
에르하르트: (격렬하게) 네, 하지만 지금은 일하고 싶지 않습니다! 전 젊으니까요! 전 여태 그걸 깨닫지 못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제 안에 뜨겁게 용솟음치고 있다는 걸 느껴요. 전 일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살고 싶어요, 살고 싶어요, 살고 싶다고요!
-1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