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호르바트는 현재 독일어권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작가 중 하나로, 현대 고전 작가 반열에 올라 있다. 사후 완전히 잊혔다가 1960년대에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초에는 ‘호르바트 르네상스’라 할 만큼 작품과 작가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다. 독일에서는 크뢰츠, 슈페어, 투리니 같은 신민중극 작가들이 연극계를 휩쓸면서 1930년대 비판적 민중극 작가였던 호르바트를 재발견할 수 있었다.
<우왕좌왕>은 주인공 하블리체크를 통해 정착할 곳을 잃은 실존에 대한 작가의 개인적인 고민을 보여 준다. 호르바트의 실제 삶과도 밀접하게 연관된 작품이다.
하블리체크는 30년간 잡화점을 운영하며 살아온 나라에서 추방당했다. 자신이 태어난 나라로 돌아가려 하지만 거기서도 입국을 거부당한다. 살아온 나라, 태어난 나라,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못한 하블리체크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양국 경계인 다리 위에서 지내기로 한다. 그러다 우연히 다리 위에서 하룻밤을 보내다 비밀 회담을 위해 정체를 숨기고 국경을 빠져나온 양국 수상과 대면한다. 그의 입국을 거부하던 오른쪽 나라 수상이 이 일로 하블리체크의 사연을 알게 된다. 수상은 퇴임 전 전보를 쳐서 그를 구원한다. 입국을 허가한 것이다.
1934년 취리히 샤우슈필에서 초연할 당시 공연 프로그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호르바트)는 막 여행 가방을 싸고 있었다. 15년간 외국에서 살아온 그는 이제 가급적 빨리 부다페스트로 떠나야 했다. 헝가리 국적을 잃지 않기 위해서였다. (중략) 아무 데도 갈 수 없어서 다리 위에 서 있어야 하는 남자는 하나의 상징이다. 그는 호르바트 자신이다.”
200자평
<우왕좌왕>은 두 나라 국경 사이를 흐르는 강 다리 위에서 어느 쪽으로도 갈 수 없는 한 남자, 하블리체크를 보여 준다. 그는 작품 창작 당시 나치를 피해 독일에서 오스트리아로, 다시 헝가리로 도피해야 했던 호르바트를 빼닮았다. 이곳과 저곳의 경계인 다리 위에서 갈 곳을 잃어버린 하블리체크의 호소는 호르바트의 호소처럼 들린다.
지은이
외된 폰 호르바트(Ödön von Horváth)는 1901년 12월 9일 피우메에서 태어나 합스부르크의 다민족국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굴곡 많은 청춘기를 보낸다. 크로아티아 왕국 항구도시 피우메에서 헝가리 외교관이었던 아버지 외된 요제프 폰 호르바트와 어머니 마리아 룰루 헤르미네 프레날 사이에서 태어난 호르바트는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거주지를 많이 옮긴다. 아버지는 소귀족 출신이었고 어머니는 군의관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1902년에 베오그라드로, 1908년에는 부다페스트로 이사한다. 여기서 호르바트는 가정교사에게 헝가리어로 교육을 받는다. 1909년 그의 아버지는 뮌헨으로 근무지를 옮겼으나 호르바트는 부다페스트에 남아 대주교가 관할하는 기숙학교에 다닌다. 1913년에 뮌헨에 있는 부모에게로 가서 처음 독일어를 배운다. 그 후 프레스부르크와 부다페스트를 거쳐, 빈에 있는 외삼촌 집에서 1919년 고등학교를 마친다. 김나지움을 마치고 같은 해에 뮌헨대학에 입학해, 심리학, 문학, 연극학, 예술학 강의를 듣는다. 1920년 ≪춤의 책(Das Buch der Tänze)≫으로 글쓰기를 시작한다. 뮌헨에서 ≪짐플리치시무스≫를 간행하는 잡지사에서 일하기도 했다. 1924년부터는 베를린에서 문학 활동을 펼쳤는데, 극작품 열여덟 편 이상, 장편소설 두 편을 창작하는 데 10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오스트리아가 나치 독일에 합병되면서 호르바트는 헝가리, 프라하, 암스테르담을 거쳐 파리에 도달 한 그는 1938년 6월 1일 어처구니없게 때 이른 죽음을 맞는데, 샹젤리제 거리에서 벼락에 맞아 쓰러지는 나무에 깔려 사망한다. 이후 호르바트는 수십 년 동안 잊혔다가 1970년대에 와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작가 목록에 들어가고, 크뢰츠, 슈페어, 투리니 같은 이 시대 신민중극 극작가들의 본보기가 된다. 그가 상황을 묘사하고 정확히 분석하는 방법은, 개인의 운명을 일반적인 사회적 위기의 징조로 묘사하는 것이고, 이는 현실성 있으며 시대에 부응한다. 그는 자기 작품을 “민중극”이라 부르면서 사회 비판적 시대극을 새로운 형식으로 발전시킨다.
옮긴이
김미란은 서울대학교 독문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논문 <브레히트 희곡에 사용된 속담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독일 뮌헨대학교에서도 수학했다. 청주대학교를 거쳐 1981년부터 숙명여자대학교에서 30년간 교수로 재직했고, 독일 쾰른대학 연구교수를 지냈다.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독일언어문화학과 명예교수다. 지은 책으로 ≪탈리아의 딸들-현대 독일 여성 드라마 작가≫, ≪독일어권의 여성 작가≫(공저), ≪한독 여성 문학론≫(공저), ≪독일어권 문화 새롭게 읽기≫(공저)가 있고, 우리말로 옮긴 책으로 모테카트의 ≪현대 독일 드라마≫, 렌츠의 희곡선 ≪군인들/가정교사≫, 로트의 ≪나귀 타고 바르트부르크 성 오르기≫, 베데킨트의 ≪눈뜨는 봄≫, 라 로슈의 ≪슈테른하임 아씨 이야기≫, 호르바트의≪피가로 이혼하다≫, ≪우왕좌왕≫이 있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1부
2부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밤이 되었다.
하블리체크가 다시 나타난다. 그는 콘스탄틴이 들고 있는 권총을 보고 즉시 “손들어!” 자세를 취한다.)
콘스탄틴: (이 동작에 깜짝 놀란다.) 뭡니까? 도대체 두 손으로 뭐 하는 겁니까?
하블리체크: 항복이오.
콘스탄틴: (당황하여) 어째서요?
하블리체크: 쏘지 마시오, 제발!
콘스탄틴: 아하, 이거요! (그는 웃으며 권총을 허리띠에 꽂는다.)
하블리체크: (두 손을 내리고 미소 짓는다.) 그래도 친절하신 분이군요!
콘스탄틴: 그럴지도요. (중략) 하지만 당신에게 난 그저 국경 경비대원일 뿐이오, 그리고 이제 솔직히 내 참을성도 끝입니다! 당신이 자꾸 나타나는 걸 못 견디겠습니다, 저도 결국 인간일 뿐이니까요!
하블리체크: 바로 그겁니다.
콘스탄틴: 그러니, 이제 제발 사라지십시오, 예?
하블리체크: 하지만 저쪽에서는 막 위협하던데요, 다시 나타나면, 대포를 가져오겠다고….
(중략)
콘스탄틴: 내가 미치겠소.
하블리체크: 상관없습니다!
콘스탄틴: 당신 때문이란 말이오, 나 때문이 아니라!
하블리체크: 그럼 나보고 어디서 자란 말입니까?
콘스탄틴: 다리 위에서요! 끝냅시다.
(침묵)
하블리체크: 그럼 끝냅시다. (위협적으로) 이젠 나도 더 이상은 하고 싶지도 않아요! 그럼 이제 다리 위에 있겠소! 다리 위에서 자겠소, 알겠소? 바람이 부나 비가 오나 해가 뜨나 달이 뜨나! 당신들은 그걸 보게 될 거요, 당신들은! (빨리 퇴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