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독일 문학에서 물의 정령이 언급된 것은 1320년 슈타우펜 가문의 전설을 다룬 시를 들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물의 여인에 대한 상상을 확고하게 해 준 것은 1800년대 초 낭만주의 작가들에 의해서였다. 특히 푸케의 ≪운디네≫(1811)는 물의 여인에 관한 이전의 모든 상상을 구체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후의 모든 분야에서 물과 여인에 대한 이미지를 확고하게 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파라셀수스의 글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푸케의 작품 주인공 운디네는 물이라는 자연 요소가 가진 긍정적·부정적 힘을 대표한다. 어부의 양녀로서 철없는 행동만 일삼는 그녀는 18세나 되었지만 살림을 돕거나 예절에 맞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마치 숲 속을 흐르는 맑은 물처럼, 자연 그대로의 천성을 갖고 있다. 자연 속의 물이 인간을 배려해서 흐르거나 고여 있지 않은 것처럼, 운디네는 본성 그대로 행동할 뿐이었다. 비록 인간과 같은 모습을 하고, 인간의 영역에 살고 있지만, 그녀는 아직 물에, 즉 순수한 자연에 속해 있는 존재였다.
이러한 운디네는 기사 훌트브란트와의 결혼을 통해 영혼을 얻게 된다. 가볍고 유쾌한 정령 운디네에게 영혼이란 “뭔가 사랑스러운 것이지만, 또 뭔가 아주 두려운 것”, “무거운 압박”으로, 그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걱정과 슬픔”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영혼을 얻은 운디네는 인간, 특히 남성이 바라는 최고의 여성으로 변하게 된다. 남편인 훌트브란트가 “내가 그녀에게 영혼을 주었다면, 분명 내 영혼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준 게 분명해”라고 말할 정도다.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가정적이고, 타인을 배려하며, 신을 경외하는 여성이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갖고 있는 물의 요소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항상 운디네의 주변을 도는 삼촌 퀼레보른은 그녀가 물의 속성, 자연의 힘과 절대 분리될 수 없음을 알려 준다. 그녀에게 남아 있는 신비스러운 자연의 힘은 결국 남편으로 하여금 아내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만들고, 그녀를 멀리하게 만든다.
운디네가 영혼을 가짐으로써 인간의 도덕을 지키는 것처럼, 남편 훌트브란트도 다른 존재와 결혼함으로써 반드시 지켜야 할 금기 사항을 갖게 된다. 절대로 물가에서 운디네를 모욕하면 안 된다는 금기를 지켜야만 운디네와의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다. 그러나 훌트브란트는 이 금기를 깸으로써 운디네를 잃고 만다. 비록 눈앞에서는 사라졌지만, 운디네가 죽지 않은 상황에서 다른 인간의 여인과 혼인을 함으로써 자연과 인간의 법칙 모두를 어기게 된다.
운디네는 남편보다 더 훌륭한 영혼을 가짐으로써 사랑의 고뇌와 고통을 감수하고, 사라져 버릴 육신 속에 불멸의 영혼을 지키기 위해 애써야 하지만, 물의 정령으로서도 해야 할 일이 있다. 자신을 배반한 남편에게 반드시 복수해야 하는 자연의 법칙을 따라야만 하는 것이다. 분노한 물이 모든 것을 파괴하듯이, 남편의 생명을 빼앗아야만 한다. 그러나 이미 인간의 영혼을 가짐으로써 순화된 자연이 되어 버린 그녀는, 남편을 자신의 눈물로 질식시켜 죽인 뒤에도 남편의 무덤을 에워싸고 흐르는 시냇물이 되어 한없이 슬픔을 간직하게 된다.
맑은 물처럼 가볍고 경쾌하던 운디네는 영혼을 얻음으로써 진실로 사랑하는 법을 알고 그와 함께 고뇌도 알게 되었지만, 결국 원래의 요소로 돌아가고 만다. 영혼을 가져야만 한다는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인간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고, 영혼을 얻었으나 그 순수한 영혼 때문에 상처를 입으며,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사랑하는 사람에게 복수를 가해야만 하는 운디네는 자발적으로 그 무엇도 할 수 없었던 푸케 당시의 여성들과 다를 바가 없다.
200자평
프리드리히 드 라 모테 푸케의 1811년 작품으로, 호프만, 안데르센 등 많은 동시대 및 후대 작가에게 영감을 준 물의 정령 이야기다. 물의 정령 운디네가 기사를 보고 사랑해 그와 결혼하나 행복한 생활도 잠시뿐 끝내는 기사를 죽일 수밖에 없게 되는 비극적인 내용이다. 지금 봐도 흥미진진해 왜 많은 사람이 이 작품에 열광했는지 알 수 있다.
지은이
프리드리히 드 라 모테 푸케는 1777년 하벨 강가의 브란덴부르크에서 태어나 1843년 베를린에서 사망했다.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칼 드 라 모테 푸케 남작(Friedrich Heinrich Karl Baron de la Motte Fouque’)이라는 독일 세례명과 드 생 쉬렝 남작, 드 라 그레브 영주(Baron de Saint-Surin, Seigneur de la Greve)라는 프랑스 세례명을 가진 그는 프로이센 국민이었으나 조상은 프랑스 귀족이었다. 그의 이름 프리드리히는 대부였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에게서 따온 것이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그의 대부가 된 것은 조부의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푸케의 조부 하인리히 아우구스트 드 라 모테 푸케(1698∼1774)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으로부터 육군 중장에 임명되고 검은 독수리 훈장을 받았다. 이러한 조부의 영향으로 아주 어린 시절 군에 입대한 푸케는 이미 1794년, 17세에 최연소 사관후보생으로서 라인 전쟁에 참가했고, 이후 아셔레벤에서 바이마르 대공의 장교를 지냈다. 1798년에 마리아네 폰 슈배르트와 결혼했으나 1802년 이혼, 1803년 세 자녀를 둔 미망인 카롤리네 필리피네 폰 로호(결혼 전 성은 폰 브리스트, 1773∼1831)와 재혼했다. 그녀는 영지를 소유한 폰 브리스트 가문의 상속녀였다. 전 남편인 폰 로호는 그녀와 이혼 수속 중 노름 빚 때문에 자살했다. 카롤리네와 결혼 후 푸케는 베를린과 아내의 영지인 넨하우젠에 거주했다. 1803년에는 두 사람 사이에서 딸 마리 루이제 카롤리네 드 라 모테 푸케(1803∼1864)가 태어났다. 푸케의 결혼 생활은 평탄했고, 넨하우젠 성은 낭만주의 작가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아내 카롤리네 역시 낭만주의 독일 여성 작가 중의 한 명으로 남편과 함께 문학적 명성을 누렸다. 푸케는 처음에는 펠레그린(Pellegrin)이라는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했다. 북유럽의 전설, 중세 프랑스의 기사 이야기를 중심으로 환상적인 세계를 그려 낸 그의 초기 작품들은 소재와 서술 기법에서 이미 훗날 그의 작품을 결정하는 모든 요소를 담고 있었다. 1808년부터 1820년까지 약 10여 년 동안 푸케는 삶에서 또 작가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특히 1811년 발표된 ≪운디네≫는 환상적 요소와 동화적 색채를 띤 소설로서 독일 내에서뿐만 아니라 외국에서까지 푸케의 이름을 알리게 했다. 하이네는 푸케가 낭만주의 서사 작가들 중 유일하게 모든 대중을 감동시킨 작품을 썼다고 평했고, 아이헨도르프는 푸케가 대중에게는 낭만주의의 중심인물로 인식된다고 언급했다. 낭만주의 작가인 슐레겔 형제, 장 파울, 에른스트 호프만 역시 그를 칭찬했다. 그러나 푸케의 인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운디네≫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후 반복되는 기사 이야기에 독자들은 진저리를 냈다. 1818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에도 유사한 소재의 글을 계속 발표했다. 그는 대중의 취향에 부합하는 보잘것없는 글을 쓰는 작가로 치부되었고, 통속소설 작가의 전형으로 평가되었다. 한때 그를 칭찬했던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그와 거리를 두었고, 아이헨도르프는 푸케를 “낭만주의의 돈키호테”라고 비꼬았다. ≪운디네≫에 대해서 대단한 찬사를 퍼부었던 하이네도 푸케의 후기 작품에 대해 “짜증스럽다”고 표현했다. 1831년 두 번째 아내 카롤리네가 사망한 뒤, 55세의 푸케는 딸 마리를 돌보던 알베르티네 토데와 결혼했다. 여전히 넨하우젠 성에 거주하던 그는 카롤리네가 첫 번째 결혼해 나은 아들 테오도르에 의해 넨하우젠에서 추방당한 뒤, 할레로 이주해 9년간 그곳에 머물렀다. 푸케의 젊은 날의 친구이자 훗날 프로이센의 왕이 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1841년 푸케를 베를린으로 불러들이고 연금을 올려 주었다. 이후 오늘날에는 라인하르트슈트라세가 된 칼슈트라세에서 그는 세 번째 아내인 알베르티네, 아들 칼 프리드리히 빌헬름 그리고 장모와 함께 살았다. 1843년 푸케는 베를린 자택의 계단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사람들이 그를 침대에 눕혔으나 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마치 죽음을 미리 예견이나 한 듯, 1월 21일 아침 푸케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만세, 주님이 내 곁에 계신 것만 같다. 그러나 죽음 또한 가까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주님이 훨씬 더 가까이 계신다.” 그렇게 1843년 1월 23일 낭만주의 작가 푸케는 사망했다. 1월 26일 그는 베를린의 무덤에 안장되었다. 오늘날 푸케는 독자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고, ≪운디네≫를 제외한 거의 모든 작품이 잊혀졌지만, 푸케는 많은 작가와 음악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의 시들은 85명의 작곡가들에 의해 140곡의 노래로 남겨졌다. 가곡의 왕이라 불리는 슈베르트도 푸케의 시 중 6편에 곡을 붙였다. 푸케는 세 번 결혼해서 세 자녀를 얻었다. 딸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은 첫째 아들 프리드리히는 처음에는 군인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작곡가가 되어 몇몇 작품을 남기고 1874년 후손 없이 사망했다. 푸케가 사망하고 6일이 지난 뒤에 태어난 둘째 아들 발데마르는 5명의 아이를 얻었고, 이 자녀들의 후손 중 한 명이 현재 함부르크에 살고 있다.
옮긴이
이미선은 홍익대학교와 동대학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뒤셀도르프 대학에서 독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옮긴 책으로 ≪존넨알레≫(유로), ≪별을 향해 가는 개≫, ≪불의 비밀≫(이상 아침이슬), ≪막스 플랑크 평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여행의 기술≫(이상 김영사), ≪불순종의 아이들≫, ≪천사가 너무해≫(이상 솔), ≪수레바퀴 아래서≫, ≪유대인의 너도밤나무≫(이상 부북스), ≪누구나 아는 루터 아무도 모르는 루터≫(홍성사) 등이 있다.
차례
헌사
1장 기사는 어떻게 어부에게 오게 되었나
2장 운디네는 어떻게 어부에게 오게 되었나
3장 그들은 어떻게 운디네를 다시 찾았나
4장 기사가 숲 속에서 우연히 만난 것에 대해
5장 기사는 곶에서 어떻게 살았나
6장 결혼에 대해
7장 결혼식 날 밤 일어난 그 밖의 일
8장 결혼식 다음 날
9장 기사는 어떻게 어린 아내를 데리고 돌아갔나
10장 도시에서의 삶
11장 베르탈다의 성명 축일
12장 그들은 어떻게 자유 도시를 떠났나
13장 그들은 링슈테텐 성에서 어떻게 살았나
14장 베르탈다는 어떻게 기사와 함께 돌아왔나
15장 빈으로의 여행
16장 그 이후 훌트브란트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17장 기사의 꿈
18장 기사 훌트브란트는 어떻게 결혼식을 올렸나
19장 기사 훌트브란트는 어떻게 묻혔나
해설
지은이에 대해
지은이 연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그때 문이 휙 열리더니, 눈부시게 아름다운 금발의 소녀가 웃으면서 잽싸게 방 안으로 들어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그냥 저 놀리려고 그러신 거죠. 아버지 손님이 어디 있어요?” 바로 이렇게 말하는 순간 그녀도 기사를 보았고, 이 잘생긴 젊은이 앞에 놀라서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 훌트브란트는 이 아름다운 소녀의 모습을 보고 기뻤고, 이 사랑스러운 모습을 정말 마음속 깊이 새겨 두고 싶었다. 소녀가 놀랐기 때문에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게 내버려 두는 것일 뿐, 이제 곧 수줍어서 자신의 눈을 피해 몸을 돌릴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혀 다른 상황이 벌어졌다. 소녀는 한참 동안 훌트브란트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아무 거리낌 없이 다가와서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고는 그의 가슴을 장식한 호화로운 사슬에 달려 있는 금메달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어머, 잘생기고 친절한 손님, 어떻게 우리 초라한 오두막에 오시게 됐어요? 우리한테 오는 길을 발견하기 전에 세상을 몇 년씩이나 떠돌아야만 했나요? 저 황량한 숲에서 나오셨어요, 멋진 손님?” 어부의 아내가 소녀를 야단치는 바람에 기사는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