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정통 슬라브주의에서 진일보
슬라브 민족 고유의 정신적 가치와 독자성을 강조하는 ≪러시아와 유럽≫은 19세기 러시아의 대표적인 보수 이데올로기를 반영한 책으로 평가되었다. 그들은 러시아, 나아가서는 슬라브 민족의 고유성과 독자성을 문화의 근간으로 설정하고, 슬라브 민족 연대를 주장한 다닐렙스키의 사상에서 이념적 지지 기반을 발견했다. 다닐렙스키는 인류의 발전이란 개별적인 역사-문화권들의 기여로 이루어지며, 러시아를 주축으로 한 슬라브 민족은 가장 완전한 역사-문화권의 생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보았다. 그의 사상은 호먀코프, 악사코프와 같은 정통 슬라브주의자들의 생각을 계승하고 있었다. 또한 슬라브주의를 집대성하고 체계화한 것은 그가 러시아 철학사에 기여한 주요한 공적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스트라호프가 평가하듯이 ≪러시아와 유럽≫은 정통 슬라브주의에서 진일보한 면모를 보여 준다. 슬라브주의자들은 러시아를 주축으로 한 슬라브 민족의 동맹이 세계 구원의 열쇠를 쥐고 있다는 관점을 내세우는 데 반해, 다닐렙스키는 슬라브 동맹 역시 전체 인류 역사를 구성하는 하나의 역사-문화권이지, 인류 전체를 이끌거나 대신할 수는 없다고 언급한다. 즉, 그는 러시아가 세계를 구원할 것이라는 슬라브주의 특유의 메시아 사상 대신 세계 역사를 다양한 역사문화권들의 공존으로 해석하고, 단일한 문화의 주도보다는 상생에 주안점을 두었던 것이다.
문화상대주의의 단초를 마련
소비에트 체제가 존속하는 동안 부각되지 못했던 ≪러시아와 유럽≫은 1990년대 러시아의 개혁, 개방 시기에 새롭게 주목받게 된다. 서구의 가치가 무분별하게 범람하던 상황에서 솔제니친과 같은 사상가들은 소비에트 이데올로기가 부정했던 러시아의 정통적 가치 부활을 지지했다. ≪러시아와 유럽≫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는 것은 이 책이 19세기 러시아 상황에만 국한되지 않고, 문화의 본질을 고찰했던 문화 이론서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다닐렙스키에 따르면 문화의 출발점은 민족과 민족정신에 있다. 그는 사과나무에서 배를 얻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 민족의 문화는 다른 민족의 문화에 이식될 수 없고, 혹 그렇다 하더라도 창조적인 결실을 주지는 못한다고 보았다. 또 모든 역사문화권은 유기체처럼 탄생부터 소멸까지 생장 주기를 거친다고 주장했다. 그의 문화관은, 유럽을 모델로 삼고 서구와 동일한 체제에 편입되기 위해 러시아의 전통적 가치와 결별할 것을 주장했던 서구주의자들의 견해와 대척점을 이루었다. 즉, 서구주의자들이 유럽의 문화를 가장 진보한 것이며 다른 민족들이 그 뒤를 따르게 된다는 단선적 문화의 진화론을 견지했다면, 다닐렙스키는 각 민족 문화의 고유성과 다양성에 토대를 둔 역사문화관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200자평
지구화, 개방화가 가속화되며 얼굴 없는 기술 문명으로 통합되는 21세기에 민족의 전통과 고유성은 버려야 할 과거의 잔재가 아니라 문화의 다양성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원천으로서의 가치를 획득한다. 다양한 역사 문화권의 공존이 인류 전체 문화의 번영을 가져온다는 다닐렙스키의 주장은 아직까지도 문화의 상대성과 다양성에 대해 성찰하는 계기를 주고 있다.
지은이
니콜라이 다닐렙스키는 1822년 12월 오를로프 현에서 장군의 아들로 태어났다. 페테르부르크 근교의 알렉산드르 리체이를 졸업했고,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자연과학부에서 수학했다. 생물학을 전공했는데, 푸리에의 이론 등 사회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1849년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같은 해 페트라솁스키 사건으로 체포되어 100일 동안 수감되었다. 그는 무죄를 주장했고, 결국 유죄 판결을 면했으나 수도에서 추방되어 러시아 북부의 볼로그다로, 이후에는 사마르로 보내졌다. 1853년에는 볼가 강과 카스피 해의 어류 탐사단에 참여했고, 1857년에는 농업부로 발령을 받은 후 백해와 북극해의 생태계를 연구했다. 이와 같은 지역 생태계 탐사를 수차례 실행하면서 러시아 서쪽 지역의 해양 활동에 관한 법전을 마련했다. 이후 크림 지역으로 이주하여 자신의 주요 저서인 ≪러시아와 유럽≫을 1869년에 탈고했다.
옮긴이
이혜승은 한국외국어대학교 학부와 대학원에서 러시아어와 문학을 전공했다. 대학원 재학 중인 1994∼1995년에 교환학생으로 모스크바의 국제관계대학교에서 연수를 마쳤다. 1996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사회학부에 입학했다가 같은 해 철학부 문화사·문화이론과로 옮겨 소비에트 문화를 연구했다. 모이세이 카간의 지도 아래 논문 <소비에트 해빙기 문화와 연극>으로 2001년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2년부터 2007년까지 한국외국어대학교, 충북대학교, 한국체육대학교 등에서 시간 강사로 재직했다. 논문으로는 <1960∼1980년대 초반 사회, 문화적 상황과 관련해 본 러시아 애니메이션의 변화 연구>(만화애니메이션, 2009), <1930년대 중반∼1980년대 중반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언론, 공연, 문학 작품에 나타난 문화적 지향성 연구>(역사문화연구, 2007) 외 여러 편이 있다. 저서로는 ≪지도 없이 떠나는 오리엔트 여행≫(청년정신, 2008), ≪모로코, 낯선 여행≫ 등이 있으며, 역서에는 ≪이스탄불에서 온 장미 도둑≫(아리프 아쉬츠 지음, 이마고, 2009), ≪문화 철학≫(모이세이 카간 지음, 지식을만드는지식, 2009) 등이 있다.
차례
1. 역사-문화권의 성장과 발전 법칙
2. 민족과 인류의 관계
3. 슬라브 역사-문화권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인류의 과제는 다름이 아니라 여러 민족들이 여러 시간대에 인류라는 개념에 잠재되어 있는 모든 측면과 특징들을 실현하는 것이다. 만약 인류가 어떤 길을, 정확히 말해서 모든 길을 다 지난 후, 어떤 강력한 존재가 나타나 과거의 행적과 다양한 유형들의 발전 국면을 모두 살펴볼 수 있다면, 그 존재는 인류의 삶이 어떤 이념의 실현으로 이루어지는지를 밝혀냄으로써 인류의 숙제를 풀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