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비판자≫는 발타사르 그라시안의 명실상부한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저자의 생애 말년에 1부(1651년), 2부(1653년), 3부(1657년)로 각각 나뉘어 출판되었는데, 이후 평자들은 이 작품을 그라시안 문학의 정점으로 평가하는 데 이견이 없었다. 이 같은 맥락에서, 쇼펜하우어는 “이 세상에 나온 가장 훌륭한 책들 중의 하나”라는 찬사를 바치기도 했다.
≪비판자≫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발타사르 그라시안의 사상을 소설 형태로 집약하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 작품은 소설의 형식을 빌려서 이전까지 출판된 그의 모든 저서들에 나타난 세계관을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비판자≫는 단순한 소설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철학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혹은, 그 내용을 기준으로 보아서, 하나의 수상록 혹은 교훈서의 유형으로도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형식상 이 작품은 두 주인공 안드레니오와 크리틸로가 세상을 여행하면서 겪는 체험들과 그에 대한 의견들을 기술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소설적인 스토리 구성은 최소화되어 있으며, 등장인물도 두 주인공을 제외한다면 현실 세계의 인물이 아닌 경우가 많다. 즉 다양한 추상적 개념들을 의인화한 인물들 혹은 신화나 전설 속 인물들이 주를 이룬다. 또 이야기가 전개되는 무대도 구체적인 장소로서 특징이 없다. 따라서 그곳에 어느 도시, 어느 지방의 이름을 붙이든 아무 지장이 없는, 보편적 배경으로서 의미가 있는 장소들이다.
이 같은 사실에서 유추할 수 있겠지만, 이 작품의 매력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토리 전개를 통해 독자를 사로잡는다든지 하는, 이른바 ‘소설적’ 재미가 아니다. ≪비판자≫의 매력은 삶의 전반을 관조하는 작가의 성찰 속에 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전광석화처럼 날카롭게 삶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의 예리함과 거침없이 진실을 설파하는 언어의 통렬함에 공감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작품의 여운은 단순한 소설적인 재미의 그것보다 훨씬 깊고 오래 남아서, 읽는 이로 하여금 자신과 주변의 삶을 돌아보게 만들 것이다.
≪비판자≫는 세상과 처음 대면하게 되는 안드레니오라는 젊은이의 눈에 비친 인간 세계를 묘사하는 틀을 취하고 있다. 세상을 처음으로 바라보는 사람의 눈이야말로 그곳을 가장 객관적으로,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 인지하는 도구일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 주인공의 눈에 비친 인간 세상은 부조리와 모순으로 가득 찬 곳이다. 즉 “미덕은 박해를 받고, 악덕은 박수를 받소. 진실은 침묵하고, 거짓이 활개를” 치는 곳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적나라한 풍경이다. 저자의 관찰에 따르면, 인간은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알지 못한 채 오는 것이며 죽음에 이를 무렵에야 비로소 깨달음을 얻게 되니, 미리 알았더라면 결코 이곳에 태어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같은 부정적인 세계 인식은 한편으로는 그라시안이 살았던 바로크 시대의 전형적인 세계관이기도 하고, 또 더 구체적으로는 이 시기 스페인 작가들에게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현상이기도 하다. 이전의 르네상스 시대가 중세의 오랜 신 중심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현세의 인간의 삶에 대해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했다면, 바로크 시대는 생명의 제반 현상들이 일시적이고 불확실한 미몽에 지나지 않는다는 회의와 불안이 지배한 시기였다. 특히 스페인에서는 신대륙의 발견과 함께 팽창했던 국운이 급격하게 쇠락하고 민중의 삶이 지극한 궁핍에 빠지게 되면서 이 같은 비관적인 분위기가 한층 뚜렷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역사적·사회적 배경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비판자≫에는 발타사르 그라시안이 다른 작가들과 차별되는 고유의 비극적 세계관이 존재한다. 즉 이 시기 여러 문학작품들이 당대 스페인 사회의 어두운 구석들을 현장감 있게 묘사하면서 조국의 아픈 현실을 조망한다면, 그라시안이 제시하는 생의 모순들은 훨씬 더 뿌리가 깊고 근원적이며 해답을 찾기 어려운 인간 존재의 부조리한 상황들이라는 것이다.
총 3부 38장으로 구성된 이 방대한 작품을 통해 그라시안은 일관되게, 그리고 체계적으로,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간 삶을 지배하는 것은 질서라기보다는 혼돈, 정의라기보다는 불의, 기쁨이라기보다는 슬픔과 비탄임을 설파한다. 그에 따르면, 비록 이 세상을 창조한 조물주가 이 땅을 조화로운 곳으로 만들고자 했어도, 이곳에 사는 인간들은 세상을 부조리로 가득한 곳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볼 때, 그라시안이 훗날 염세주의 철학의 대가 쇼펜하우어나 반이성적 생철학의 거장 니체 같은 사상가들에게 존경을 받은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할 것이다.
200자평
스페인 바로크 문학을 대표하는 17세기의 위대한 작가인 발타사르 그라시안의 대표작으로, 쇼펜하우어가 “이 세상에 나온 가장 훌륭한 책들 중의 하나”라는 찬사를 바치기도 한 작품이다. 두 주인공이 세상을 여행하는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실제 그 내용 면에서 소설적 요소들은 많지 않아 단순한 소설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철학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수백 년 전에 쓰인 작품이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그 누구라도 공감하게 되는 날카로운 통찰로 가득 차 있다.
지은이
1601년 스페인 아라곤 지방의 칼라타유드 인근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18세 되던 해인 1619년 예수회 교단에서 사제 수업을 받기 시작했으며, 1623년부터는 사라고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1627년 사제 서품을 받은 그는 칼라타유드에 돌아와 이곳 학교에서 인문학과 문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636년 아라곤 지방의 우에스카에 강론 담당 신부로 부임했는데, 이곳에서 첫 저서 ≪영웅론≫을 발간함으로써 작가로서 여정을 시작했다. 이후 예수회 사제로서 주로 아라곤과 발렌시아 지방 일대에서 교육, 설교 혹은 고해 관련 업무를 담당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꾸준히 개인적인 저술 작업을 계속하다가 1658년에 생애를 마감했다.
1637년에 출판된 첫 저서 ≪영웅론≫은 ‘범속한 대중의 범주를 뛰어넘는 영웅들을 특징짓는 행동 양식들은 무엇인가’에 대한 저자의 성찰을 담고 있다. 이후 그라시안이 발표한 저서들은, 문학 이론서와 종교 교리 책자를 제외하면, 그의 첫 작품에 나타난 내용과 일맥상통하는 흐름을 보인다. 1640년에 출간된 ≪정치가≫는 통치자가 지녀야 할 덕목과 행동 규범을, 1646년에 출간된 ≪사려 깊은 자≫는 사회적 성공을 원하는 자가 갖추어야 할 인간적인 덕성들을 제시하고 있으며, 1647년의 저서 ≪사려와 지혜의 책≫은 아포리즘 형식으로 된 일반적인 삶의 지혜를, 그리고 1651년부터 1657년 사이에 3부로 나뉘어 출간된 ≪비판자≫는 세상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과 인간 삶의 형태들에 대한 총체적 관찰을 보여 주고 있다.
그라시안이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은 대단히 부정적이어서, 이 세계는 위선과 기만으로 가득 찬 곳이다. 마땅히 성공해야 할 사람은 실패하고 이길 자격이 없는 자가 승리하며, 진실을 말하는 자는 주위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아첨으로 상대를 기분 좋게 하는 이들일수록 높은 자리에 올라간다. 이 같은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 혹은 단순히 생존하기 위해, 그라시안이 독자에게 전하는 주된 충고 중 하나는 신중하라는 것이다. 즉 세상의 모순에 섣불리 자신을 던져 항거하지 말고, 타인의 생각을 귀담아 듣되 자신의 생각은 외부에 누설하지 말라는 것이 그의 전형적인 권고다.
이처럼 세상에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 그라시안의 세계관이 그가 속한 교단의 종교적 세계관과 충돌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라시안은 첫 작품에서부터 로렌소 그라시안이라는 필명을 사용해 자신을 숨겼지만, 교단에서는 어렵지 않게 그가 실제 저자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라시안은 여러 차례 교단의 질책을 피할 수 없었으며, 특히 ≪비판자≫의 발표 이후 그에게 가해진 징계는 이미 약해져 있던 건강을 악화시켜 안타깝게도 그의 죽음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옮긴이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대학원에서 스페인 현대문학을 전공해 문학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어 교육부 국비유학생으로 스페인 국립마드리드 대학교(Universidad Complutense de Madrid)에서 스페인 현대문학 전공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귀국 후 한국외국어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대학교에 출강하며 스페인, 중남미 관련 언어 및 문학 강의를 하고 있고, 해당 분야에서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차례
1부
4장 크리틸로의 운명
6장 세상에 가득 찬 모순
11장 다양한 인간형들
12장 안드레니오의 방황
2부
5장 인간의 어리석음
6장 행운과 불운
9장 어디에도 없는 만족
11장 죽음에 관한 의미 있는 성찰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미덕은 박해를 받고, 악덕은 박수를 받소. 진실은 침묵하고, 거짓은 활개를 치오. 박식한 자는 책이 없고 무식한 자는 서점들을 통째로 가지고 있소. 책 속에는 현자가 없고, 현자는 책을 내지 않소. 가난한 자의 신중함은 어리석음이 되고 힘 있는 자의 어리석음은 떠받들어지오. 생명을 살려야 할 사람들은 죽음을 주오. 젊은이들은 시들어 가고 늙은이들은 욕정을 되살리오. 법률은 한쪽 눈이 먼 애꾸요.
-<6장 세상에 가득 찬 모순> 중에서
사람들은 만족이 자신이 사는 곳에 없음을 알고,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다 하고, 또 이 사람들은 저들을 행복하다고 하며, 모두들 똑같은 착각 속에서 살고 있는데 이 착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어리석은 자들이 존재하는 한 계속될 것이다.
-<2부 9장 어디에도 없는 만족>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