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숙향전≫은 여러모로 명성이 자자했다. 현전하는 90여 개의 이본 중에는 국문뿐만 아니라 한문으로 창작된 것 또한 수십 종에 달한다. 이는 ≪숙향전≫이 한문에 능숙했던 양반 계층에서도 두루 읽혔다는 것을 의미한다. ≪숙향전≫은 국문 · 한문 향유층을 두루 망라해 자신의 독자층으로 끌어들였던 당대의 베스트셀러였던 것이다. ≪숙향전≫의 유명세는 국내에서 그치지 않았다. 일본의 도서관에 소장된 ≪숙향전≫의 몇 이본들에는 한글 원문 옆에 나란히 일본어가 적혀 있다. 일본인 통역관들이 그 어떤 국문 텍스트보다 순 한글 표현의 빈도가 높았던 ≪숙향전≫을 한국어를 배우기 위한 학습 텍스트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숙향전≫은 당대에 이미 국내를 넘어 국외에까지 알려졌던 작품인 것이다.
≪숙향전≫이 이처럼 많은 독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던 요소는 무엇보다 주인공의 삶에 대한 밀착성이다. 숙향은 다섯 살에 전쟁을 만나 부모와 헤어져 숱한 고난을 겪는다. 고전소설의 주인공들은 삶의 초반에 으레 고난을 당하곤 하는데, 그 고난이 흐릿하게 서술되어 구체적으로 장면화되지 않는다. ≪숙향전≫은 다르다. 숙향이 겪는 고난의 과정이 매우 핍진하게 묘사되고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독자들은 전쟁의 폭력성과 주인공의 고통까지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숙향의 고난은 가족 이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선과의 인연은 하늘이 정한 것이지만, 결혼이라는 그들의 목적지에 이르는 경로에는 수많은 장애가 가로 놓여 있다. 숙향과 이선은 그러한 장애를 거듭 헤쳐 나가며 정신적 · 육체적으로 성숙해 간다. 갖은 간난신고를 극복하고 운명에 저항하여 마침내는 화합에 이르는 ≪숙향전≫의 서사로, 고전문학의 향유자들은 ‘고난’이라고 하면 숙향을, ‘고난을 극복한 사랑’이라고 하면 숙향과 이선의 사랑을 자동적으로 떠올리게 됐다. 춘향전, 심청전, 봉산탈춤, 각종 사설시조에 그들의 이름이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책은 전체 내용 중에서도 숙향이 부모와 헤어져 고난을 겪는 부분, 숙향을 향한 이선의 절절한 사랑이 그려지는 부분, 숙향과 이선의 앞에 놓인 혼사 장애와 그 극복을 보여주는 부분, 숙향이 양부모, 친부모와 다시 상봉하는 부분, 이선의 이계(異界) 여행 등 ≪숙향전≫에서 가장 중요하고 정채나는 부분 절반 정도를 발췌한 것이다.
200자평
17세기 말엽에 창작된 국문소설 ≪숙향전≫은 조선후기 애정소설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무려 90종에 달하는 이본(異本)은 그만큼 당대 사람들에게 애독되었음을 말해 준다. 다섯 살에 부모와 헤어져 고난을 반복하며 정신적, 육체적으로 성숙해 나가는 숙향과 하늘이 점지해 준 그녀의 짝 이선. ≪숙향전≫은 그들의 사랑 이야기를 환상계와 현실계를 넘나들며 그려낸다.
옮긴이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문학 박사)하고 현재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동안 판소리 이본 전집, 판소리 작품 교주서, ≪판소리문화사전≫ 발간 작업을 공동으로 했고, 단독으로 쓴 책으로는 ≪숙향전 연구≫(1999), ≪한국고전소설작품연구≫(2004), ≪한국 고소설의 새 지평≫(2016), ≪고소설의 개작과 신작≫(2021) 등이 있다. 현재는 국외 소재 한국 고소설, 조선 시대 인물 전기 등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하고 있다.
차례
1.
“낭군이 이렇듯 고집하시니 숙향을 아직 이곳에 두고 우리만 가사이다.”
숙향을 바위틈에 앉히고 옥지환 한 짝을 옷고름에 채우고 먹을 음식을 그릇에 많이 담아 주어 왈,
“너는 잠간 이곳에 있어 배고프거든 이 밥을 먹고 목마르거든 저 물을 떠먹고 있으면 우리 내일 와 데려가마.”
하고 낯을 한데 대고 슬피 울며 차마 떠나지 못하니, 숙향이 제 모친 치마를 잡고 슬피 울며 왈,
“어머님은 날 버리고 혼자 어디로 가시려 하나이까? 나도 함께 가사이다.”
2.
황제 이선을 패초(牌招)하여 전교(傳敎)하시되,
“경의 충성은 짐(朕)이 아는 바라. 지금 황태후 병환이 위중하여 사경(死境)에 있으니, 짐을 위하여 천태산 벽이용과 봉래산 개언초와 서해 용왕의 개안주를 얻어야 이 병을 구하리니, 만일 이 약을 구하여 오면 천하를 반분(半分)하리라.”
(…)
물 가운데에서 한 짐승이 나오니, 머리는 독 같고 눈은 불빛 같고 길이는 알지 못하고 소리를 벽력같이 질러 왈,
“너는 어떠한 사람이건대 남의 땅을 지나가며 지세(地稅)도 아니 주고 가려 하느냐? 네 가진 보배를 내라. 만일 아니 주면 주중(舟中) 사람을 다 잡아먹으리라.”
하거늘, 상서 가장 두려워 절하여 왈,
“나는 중국 병부상서 이선이옵더니, 황태후 병환이 중하매 황명(皇命)을 받자와 봉래산에 약 얻으러 가오니, 청컨대 길을 허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