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남송 시대 홍매가 독서하며 얻은 지식을 그때마다 정리해 집대성한 것으로 역사, 문학, 철학, 정치 등 여러 분야의 고증과 평론을 엮은 학술적 내용의 필기다. ≪용재수필≫ 16권, ≪속필(續筆)≫ 16권, ≪삼필(三筆)≫ 16권, ≪사필(四筆)≫ 16권, ≪오필(五筆)≫ 10권인 5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필≫을 제외하고는 각 편마다 서문이 있는데 ≪사필≫의 서문에서 “처음 내가 ≪용재수필≫을 썼을 때는 장장 18년이 걸렸고, ≪이필≫은 13년, ≪삼필≫은 5년, ≪사필≫은 1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고 했다. 이와 ≪오필≫을 합쳐 본다면 홍매는 근 40년의 세월을 ≪용재수필≫과 함께한 셈이다. 총 1229조목에 달하는 분량은 개인의 필기로는 보기 드문 것으로 여기에는 홍매 일생의 모든 학식이 오롯이 담겨 있다.
흔히 에세이(essay)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수필(隨筆)’이라는 용어를 제일 처음 사용한 용례가 바로 ≪용재수필≫이다.
그러나 홍매가 사용했던 ‘수필’이라는 용어의 함의는 지금처럼 개인의 경험과 감상을 가볍게 서술하는 신변잡기식의 감성적 글쓰기와는 거리가 있다. 홍매는 자신의 글을 ‘수필’이라 명명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생각이 가는 대로 써 내려갔으므로 두서가 없어 수필이라 했다.” 생각을 따라 자유롭게 쓴 글이라는 의미로 보이지만, 실제 내용은 그렇지 않다. ≪용재수필≫은 경전(經典)과 역사, 문학 작품에 대한 고증과 의론, 전인(前人)의 오류에 대한 교정이 주를 이루는 것으로 독서의 심득을 기록한 공부의 산물이다. 그의 ‘생각’은 주로 학문적인 것에 국한한 것이었다. 다만 시종일관 엄중한 태도로 치밀하고 객관적인 논증이나 규명의 과정을 거치기보다는 학문적 심득과 단상을 가볍게 임의대로 풀어낸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학술 저작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무겁고 덜 체계적이다.
따라서 문학적이고 서정적인 글에 대한 기대로 이 책에 접근한다면 실망과 무료함에 책을 덮을 수도 있다. 그러나 홍매가 보여 주는 역사와 현실을 통찰하는 탁월한 식견과 다방면을 두루 섭렵하고 꿰어 내는 박학다식함, 정연한 논리는 ≪용재수필≫을 ‘남송 필기 중 최고 작품’으로 인정받게 했으며, 고문의 대가인 구양수(歐陽脩)나 증공(曾鞏)도 따를 수 없다는 찬사까지 받게 했다.
200자평
40여 년 동안 독서하여 얻은 지식을 정리한 것으로 역사, 문학, 철학, 정치, 예술 등 제 분야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고증, 평론을 엮은 학술적 내용의 독서필기이다. 에세이(essay)의 의미로 사용하는 ‘수필(隨筆)’이라는 용어를 제일 처음 사용한 용례가 바로 ≪용재수필≫이다. <수필(隨筆)>, <독필(續筆)>, <삼필(三筆)>, <사필(四筆)>, <오필(五筆)>의 5권으로 구성되었다. “뜻이 가는 대로 기록하여 두서가 없어 수필이라 했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형식과 내용에 아무런 제한 없이 생각의 흐름을 따라 쓴 것이다. 그러나 가벼운 신변잡기가 아니라 경전(經典)과 역사, 문학 작품에 대한 고증과 의론, 전인(前人)의 오류에 대한 교정이 주를 이루는 것으로 독서의 심득을 기록한 공부의 산물이다.
지은이
홍매(洪邁, 1123∼1202)의 자는 경로(景盧), 호는 용재(容齋)이며, 시호는 문민공(文敏公)으로 지금의 장시성(江西省) 사람이다. 홍매가 태어나고 3년 후, 송나라는 금(金)나라가 남침해 수도인 개봉(開封)을 점령당하고 황제인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이 포로로 잡혀가는 ‘정강(靖康)의 난’을 겪게 된다. 난을 피해 남쪽으로 도망한 흠종의 동생 고종(高宗)이 지금의 항저우(杭州)인 임안(臨安)을 새로운 수도로 정하고 남송(南宋)을 재건했다. 광활한 북쪽 영토를 이민족에게 빼앗기고, 그들에게 신하로서 예의를 지키며 조공을 바치는 굴욕적 조약에 의해 구차한 평화를 유지하는 데 급급했던 나약한 왕조가 바로 남송이었다. ≪용재수필(容齋隨筆)≫에는 이러한 시대에 대한 개탄과 현실 정치에 대한 비판이 글 곳곳에서 표출되고 있다.
홍매의 부친과 형들은 모두 명성 있는 학자이자 관료였다. 부친인 홍호(洪皓)는 금(金)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15년간 억류되었다가 천신만고 끝에 송나라로 돌아왔다. 홍매는 3형제 중 막내였는데 형들 또한 학문적으로 상당한 성취를 이루었고 저작을 남겼다. 이러한 가풍 속에서 성장한 홍매는 자연스럽게 사대부로서의 처세와 학문의 자세를 익힐 수 있었다.
홍매는 방대한 서적을 섭렵한 학식을 바탕으로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 저작으로는 기이한 이야기 모음인 ≪이견지(夷堅志)≫, 당시(唐詩) 선집인 ≪만수당인절구(萬首唐人絶句)≫, 독서 필기인 ≪용재수필≫, 문집으로 ≪야처유고(野處類稿)≫가 있다. 특히 30여 년 동안 사관(史官)으로 지내면서 북송 신종(神宗), 철종(哲宗), 휘종(徽宗), 흠종(欽宗) 4대 왕조의 역사인 ≪사조국사(四朝國史)≫와 ≪흠종실록(欽宗實錄)≫, ≪철종보훈(哲宗寶訓)≫을 집필했다. 홍매의 경전과 역사, 문학 어느 한 방면에 국한하지 않는 해박한 지식과 탁견은 40여 년의 시간에 걸쳐 집필된 ≪용재수필≫에 잘 드러나 있다.
옮긴이
안예선은 중국 상하이 푸단 대학에서 <송인(宋人) 필기 연구−수필과 잡기류를 중심으로>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고려대학교, 서울여자대학교, 순천향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무겁고 진지한 고문(古文)보다는 필기(筆記)나 일기(日記), 소품(小品)처럼 가볍고 솔직 담백한 글을 좋아하며, 이를 통해 전통 시기 문인들의 일상생활을 조명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다. <송대 필기와 만명 소품>, <송대 일기(日記) : 역사 기록에서 사생활의 기록으로>, <송대 문인의 취미 생활과 보록류(譜錄類) 저술> 등의 논문이 있다.
차례
장량의 후손이 없는 이유(張良無後)
조참과 조괄(曹參趙括)
황제의 모친들(漢母后)
전천추와 질운(田千秋郅惲)
여 태자(戾太子)
관부와 임안(灌夫任安)
이태백(李太白)
공자의 뜻(冉有問衛君)
절개를 지킨 여인들(三女后之賢)
현명한 부모와 형제(賢父兄子弟)
사마광의 족자(溫公客位榜)
비방을 담은 책(謗書)
진 문공(晉文公)
상관걸(上官桀)
김일제(金日磾)
한신과 주유(韓信周瑜)
한 무제의 논공행상(漢武賞功明白)
옛사람의 이름과 자(三代書同文)
주 문공과 초 소왕(邾文公楚昭王)
우세남(虞世南)
명재상(名世英宰)
제갈공명(諸葛公)
도연명(陶淵明)
동진의 장수와 재상들(東晉將相)
‘의(義)’ 자의 다양한 의미(人物以義爲名)
불효자 유흠(劉歆不孝)
한나라의 금기(漢法惡誕謾)
친구 사이의 의리(朋友之義)
범증을 어찌 위인이라 하겠는가(范增非人傑)
스스로 멸망을 자초한 육국(戰國自取亡)
장수 교체(臨敵易將)
도적 소탕(漢二帝治盜)
한 경제(漢景帝忍殺)
간언의 어려움(諫說之難)
안자와 양웅(晏子揚雄)
화를 피하려 애쓰는 일(有心避禍)
진나라와 연나라의 용병술(晉燕用兵)
이덕유의 편지(李衛公帖)
한 문제의 도량(漢文帝受言)
주운과 진원달(朱雲陳元達)
전횡과 여포(田橫呂布)
주온의 세 가지 일(朱溫三事)
글 파는 문인들(文字潤筆)
의리의 힘(大義感人)
방어의 미덕(深溝高壘)
한 무제의 관리 임용(漢武留意郡守)
백성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民不畏死)
쓸모없음의 쓸모(無用之用)
화장 풍속(民俗火葬)
이임보와 진회(李林甫秦檜)
태종과 현종의 명예욕(唐二帝好名)
취한 정장(醉尉亭長)
유방과 항우의 성패(劉項成敗)
명분 없이 신하 죽이기(無名殺臣下)
개자추와 한식(介推寒食)
우물 안 개구리(三竪子)
이름 없는 현인들(賢士隱居者)
채경의 관리 채용(蔡京除吏)
조덕보의 ≪금석록≫(趙德甫金石錄)
풍속의 차이(南舟北帳)
상하(常何)
글 짓는 비결(東坡誨葛延之)
황제와 후계자(漢唐三君知子)
인심을 얻는 방법(曹馬能收人心)
호가호위(狐假虎威)
한 무제와 당 덕종(漢武唐德宗)
소영사의 지조(蕭潁士風節)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습관(貧富習常)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날짐승은 날개로 날지만 만약 그들의 다리를 묶는다면 날 수 없게 된다. 달리는 것은 다리를 써서 달리지만 그 팔을 묶어버린다면 달릴 수가 없다. 과거 시험장에서는 학문과 재능이 중요하지만 무디고 아둔한 자 또한 쓸모가 있다. 전쟁을 할 때는 용기를 우선으로 하지만 겁쟁이도 쓸데가 있는 법이다. 어떻게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을 일괄적으로 구분하겠는가? 그러므로 군주는 천하의 많은 선비들을 무용지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태백이 당도(當塗)의 채석강(采石江)에서 술에 취해 뱃놀이를 하던 중 강에 비친 달을 건지려고 하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고들 한다. 때문에 채석강에 착월대(捉月臺)가 있다. 그러나 이양빙(李陽冰)이 쓴 이태백의 <초당집서(草堂集序)>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내가 당도를 유람할 때 이태백이 위독했다. 그에게는 수정을 마치지 못한 초고 만 권이 있었는데, 침상에서 내게 주면서 서문을 써 달라고 했다.” 또 이화(李華)가 쓴 <태백묘지(太白墓誌)>를 보니, “태백이 임종가(臨終歌)를 짓고 죽었다”고 되어 있다. 이 글들을 보고서야 세상에 전해 오는 말이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얘기들은 두보가 너무 굶주리다가 술과 상한 고기를 먹고 죽었다는 설과 마찬가지의 것들이다.
태종과 현종은 모두 당나라의 영명한 군주로 그 말과 행동이 후세의 법이 될 만하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일에서 보면 그 목적은 자기를 과시하는 것이었다. 까치 둥지의 이변은 좌우의 신하들이 아부를 하면 꾸짖고 내치면 되는 것인데 하필 그 둥지까지 허물 필요가 있는가? 진주와 비단은 아끼고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되는 것이지, 하필 궁전 앞에서 태워 대외적으로 보여 주고 백성에게 알릴 필요가 있는가? 나라를 다스림에는 중용의 태도가 중요하다. 이 두 일은 후세에 교훈이 되지는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