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음애집≫의 구성
≪음애집≫은 모두 4권 2책 166판으로 되어 있다. 권1에 시(詩) 178수, 부(賦) 2편, 권2에 책(策) 1편, 소(疏) 5편, 서계(書契) 1편, 서(書) 4편, 기(記) 3편, 발(跋) 2편, 잠(箴) 1편, 상량문(上梁文) 2편, 비문(碑文) 1편, 권3에 일록(日錄)과 잡저(雜著) 6편, 권4에 부록으로 행장(行狀)·묘갈음기(墓碣陰記)·기·상량문·소·제문(祭文) 각 1편, 축문(祝文) 2편, 언행척록(言行摭錄) 1편, 시 9수, 연보(年報) 등이 수록되어 있다.
본서에서는 권1, 권2, 권3에서 핵심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발췌했으며 서울대학교 규장각본(도서번호: 奎7158)을 저본으로 했다.
≪음애집≫과 <일록>의 의의 및 가치
본서에 실린 이자의 시(詩), 부(賦), 소(疏), 서(書), 기(記), 발(跋) 등은 이자의 예리한 시국관과 현실을 보는 안목이 반영되어 있다. 그중 본 역본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한 것은 권3에 수록된 <일록>이다. 이는 조선 중기 사림파 인사의 현실 인식과 역사관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주목된다.
<일록>은 이자가 30세 때인 중종 4년(1509) 윤 9월부터 시작하여 같은 왕 11년 12월까지의 사실 중 일부만을 기록한 일기체의 저술이다. 수록된 내용이 시정의 득실, 인물의 현부, 천재지변 등인 것을 볼 때, 당대의 정치·문화·사회·인물을 기록해 역사의 교훈을 삼고자 한 것이다.
<일록>에는 특히 조선 당대사의 이해에 가장 중요한 사서인 실록에 수록되지 않은 사실이 기록되어, 당대 역사를 광범하게 살필 수 있기 때문에, 역사서(야사)의 성격을 견지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이제까지 개인 문집에 수록된 기사가 실록의 편찬 자료로 이용되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일록>의 내용 중 상당 부분이 <중종실록>에 수록되었다는 점은 이러한 사실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일록>을 비롯해 ≪음애집≫에 수록된 전반적인 내용을 볼 때, 이자의 현실 인식은 상당히 예리하고 구체적이었다. 다만 훈구파 주도의 정치에서 야기된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대안을 제기하기보다는, 이들과 어느 정도 절충하려는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일정 부분 한계점을 지니기도 했다. 그러나 치인(治人)의 입장에서 현실을 보는 감각은 훈구파와 일정한 거리를 두었음이 분명하다.
200자평
1754년에 간행된 조선 중기 사림파 인사인 이자의 문집. 분량은 모두 4권 2책 166판으로, 본서에서는 권1, 권2, 권3에서 핵심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원전의 30%가량을 발췌했다. 그중 본서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룬 <일록>은 조선 당대사의 이해에 가장 중요한 사서인 실록에 수록되지 않은 사실이 기록되어, 당대 역사를 광범하게 살필 수 있다는 데 의의가 있다. 더불어 본서에 실린 이자의 다양한 글은 이자의 현실 인식과 시국관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지은이
이자[李耔, 성종 11년(1480)∼중종 28년(1533), 호는 음애, 본관은 한산]는 고려 말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였던 이색의 5대손이며, 아버지 예견과 어머니 선산 김씨(관안의 딸)의 셋째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한산 이씨는 고려 말 신흥 사대부 가문의 하나로, 이색이 조선 왕조의 건국에 지지 입장을 표명함으로써 가문의 안정적 지위가 확보될 수 있었다.
종선계를 중심으로 가문의 성향이 훈구파에 경도된 것에 비해, 이자는 사림파 인사인 이심원의 문하에 드나들면서 사림파 성향을 견지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예견의 부임지를 따라 관동과 영남 등지에서 살았다. 14세 때인 성종 25년(1494)에는 삼척의 두타산 중대사에 올라 ≪송사≫를 읽고 개연히 발분하여 <만언소>를 지어 상소하고자 했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거두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시정에 대한 명철한 혜안과 비판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15세 때는 한훤당 김굉필의 문인이며 태종의 현손인 주계군에게 나아가 이희보·김공량·송세충 등과 함께 수학했다. 22세 때인 연산군 8년(1502) 생원진사시에 이수정, 김안국에 이어 각각 열두 명 중 2등, 열여덟 명 중 2등으로 합격했다. 그리고 24세 때인 연산군 10년(1504) 식년 문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에 제수되었고, 이후 이조의 정랑과 좌랑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는 등 일찍부터 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연산군의 폭정에 환멸을 느끼고 스스로 외직을 구해 나갈 정도로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이 강했다.
그는 훈구파 주도의 정국에서 야기된 여러 가지 문제점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다만 사림파의 이념과 사상에 완전히 경도되지 않고, 남곤과 김안로 등 훈구 세력과도 원만하게 지냈다. 상황에 따라 사림파와 훈구파의 완충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학문적으로는 사장(詞章) 지향, 현실 대응 면에서는 수기(修己)보다 치인(治人)의 입장, 현실 문제에 대해서는 비판 의식을 바탕으로 한 대안의 마련에 고민하면서도 급진적이지는 않았던 인물이었다.
옮긴이
김경수는 현재 청운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경화 임용순(任龍淳) 선생으로부터 유교 경전을 익혔다. 연구의 주요 관심 분야는 한국사학사와 사상사, 정치사 및 지방사와 지방문화다. 강의실이나 교과서에서 배우는 암기 지식으로서의 역사, 흥미를 위해 극화된 가십거리로서의 역사를 넘어, 일상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삶의 지침으로서의 역사 만들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연구를 거듭한 결과 ≪조선 시대의 사관 연구≫, ≪언론이 조선왕조 500년을 일구었다≫, ≪테마로 읽는 우리 역사≫, ≪한국사 테마전≫, ≪조선왕조사 전(傳)≫, ≪왜 조선왕조실록은 왕이 볼 수 없었을까?≫, ≪(내포의 중심) 홍성학≫, ≪이순신의 난중일기 읽기≫ 등의 연구물을 내놓았다.
권선길은 병주(屛洲) 이종락(李鍾洛) 선생과 경화(敬華) 임용순(任龍淳) 선생으로부터 무실과 궁행의 유학을 배우면서 실질적인 경전의 주석과 실용적인 유학의 진흥을 위해 부심해 왔다. 연구의 중심 분야는 경학사상과 한국사상사, 전통의례다. 현재 유교사상의 저변 확대를 위해 여러 곳에서 경서 강독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교육과 교화 활동을 추진하고 있다. 그동안의 연구물로는 ≪대록삼강실록≫(역주), ≪영성지≫(국역), ≪논어집주 부강설≫(공역) 등이 있다.
차례
권지일(卷之一)
시(詩)
부(賦)
권지이(卷之二)
소(疏)
서(書)
기(記)
발(跋)
권지삼(卷之三)
일록(日錄)
잡저(雜著)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부모가 허물이 있더라도 효자는 마땅히 흥분을 가라앉히고 유쾌한 얼굴빛을 하고 비록 종아리를 맞아 피가 흐르더라도 공경하고 효도하여 반드시 그의 부모를 허물 없는 곳에 있게 한 연후에라야 그만두는 것이다.
-34~35쪽
신수근이 철퇴를 맞고 땅에 떨어지자 시종 하나가 그의 머리 위에 엎드려 몸으로 철퇴를 막으려 하거늘, 이심은 함께 쳐 죽였다. 이심이 손수 네 사람을 죽이고 나니 피가 튀어 얼굴에 가득하고 옷이 온통 시뻘겠는데, 자신의 공을 나타내려고 며칠 동안 세수도 하지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아서, 보는 이들이 추잡하게 여겼다.
-8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