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가요, 가곡, 시조
≪해동가요(海東歌謠)≫는 말 그대로 해동, 즉 우리나라의 가요라는 의미로, 18세기 중반에 김수장(金壽長, 1690∼?)이 편찬한 가곡집이다. 여기서 가곡은 우리가 흔히 시조(時調)라고 부르는 것으로, 한국 고유의 전통 시를 가사로 삼아 부르는 노래를 뜻한다.
한자 전래 이래 우리나라의 문학은 한문 문학과 우리말 문학 양 갈래로 나뉘었다. 그중 고려 말 무렵부터 형성된 우리 고유의 노래 형태가 바로 시조다. 결국 가요, 가곡, 시조는 모두 같은 뜻으로, ‘시조’는 문학 형식인 동시에 음악 명칭이기도 하다.
≪해동가요≫, ≪청구영언≫을 계승하다
오랜 시간, 여러 사람을 통해 형성되어 간 시조의 범주가 분명해진 것은 1728년 김천택이 편찬한 ≪청구영언(靑丘永言)≫ 덕분이다. 그동안 구전으로 전하던 노래들을 모아 가곡, 즉 시조를 문자로 된 형태로 남김으로써, 시조라는 형식에 대한 인식이 뚜렷해졌다. 이후 ≪청구영언≫의 뒤를 이어 여러 가곡집이 출현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책이 바로 ≪해동가요≫다. ≪해동가요≫는 ≪청구영언≫의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되 ≪청구영언≫에서 빠진 작품들을 보완해 소개했다.
가곡의 생성과 변천을 생생히 보여 주다
≪청구영언≫이 여말 선초에서 18세기까지의 가곡사를 정리했다면, ≪해동가요≫는 18세기 당대에 새롭게 생성되어 가는 역동적인 가곡의 변모상을 현장감 있게 중계하고 있다. ≪청구영언≫에는 수록되지 않았던 성종, 이이, 윤선도 등 새롭게 발굴한 작가의 작품들을 새로 수록했으며, ≪청구영언≫ 편찬 이후 새로 등장한 이정보를 비롯한 사대부 작가, 김우규, 김태석 등의 여항인 작가, 무명씨의 작품 등을 대폭 소개해 ≪청구영언≫ 편찬 이후 새롭게 생성된 가곡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우리의 노래, 우리의 삶
사대부와 관료층이 주로 창작한 한시는 형식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고, 따라서 그 내용과 표현도 천편일률적이다. 그러나 순 우리말로 된 시조는 위로는 임금부터 아래로는 이름 없는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지을 수 있었기에 형태도 비교적 자유롭고 내용도 그만큼 다양하다. 사표를 낸 신하에게 가지 말라고 붙들고 늘어지는 임금의 노래, 평생 학문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유학자의 노래, 무나물에 청국장 맛에 감탄하며 육식자를 비웃는 비건의 노래, 떠돌이 땜장이가 마을 여인들에게 수작을 거는 야한 입담까지, 맛깔스럽고 재치 넘치는 노래들은 우리네 삶을 진솔하게 보여 준다.
지식을만드는지식 ≪원서발췌 해동가요≫는 4개의 이본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특성을 보여 주기 위해 적어도 2개 이상의 이본에 중복된 작품을 골라 소개했으며, 원문은 주씨본의 표기를 따랐다. 또한 각 이본의 고유한 특성을 살필 수 있도록 부록에서는 각 이본에만 나타나는 작품을 골라 소개했으며 원문은 해당 판본의 표기를 따랐다.
주씨본 기준 전체 648수 중 약 15%에 해당하는 97수를 뽑아 옮겼으며, 원문과 작품 해설, 주석을 통해 일반 독자들도 쉽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200자평
≪청구영언≫, ≪가곡원류≫와 함께 조선 시대 3대 시조집으로 꼽히는 ≪해동가요≫의 핵심 작품 97수를 골라 소개한다. 고려 후기부터 조선 후기까지 항간에 널리 불리던 노래들을 모아 엮었다. 임금부터 사대부, 가수, 어부, 아전, 왈짜, 기생, 무명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들이 부른 노래는 당시의 사회와 사상, 문화를 그대로 보여 준다.
본문에는 2개 이상의 이본에 중복되는 주요 작품을 골라 소개하고 부록에서는 각 이본들에만 나타나는 특징적인 작품을 소개해, 이 책 하나로 ≪해동가요≫의 여러 이본의 특징을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그간 교과서 등을 통해 친숙한 황진이, 정철, 윤선도의 시조는 물론, 평범한 서민들의 재치가 빛나는 여러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엮은이
≪해동가요≫의 편찬자 김수장(金壽長, 1690∼?)은 여러 기록들을 통해 1690년에 태어났으며 1769년까지 생존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을 뿐 정확히 언제 사망한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자는 자평(子平), 호는 십주(十州, 十洲) 또는 노가재(老歌齋)이며 젊어서 병조의 서리(書吏)를 지냈다. 그러나 중년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아마도 중년의 어느 시점부터 가곡 문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노래를 짓고, 부르고, 수집하는 일에 몰두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65세 되는 1754년 무렵에 ≪해동가요≫ 편찬에 착수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듬해 장복소(張福紹)가 쓴 발문을 보면 십주(十州)의 관덕재(觀德齋)에서 썼다는 표현이 나온다. 십주는 김수장의 호이므로 관덕재는 당시 김수장이 거주했던 집 이름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이 관덕재가 어디에 위치했던 것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이후 71세 되는 1760년에 서울 화개동(花開洞, 지금의 화동)에 노가재를 짓고 여항 시인 및 가객들과 풍류를 즐겼다. 78세 되는 1767년 2월 26일과 3월 10일에 거행된 친경(親耕) 친잠(親蠶) 의식에 참여해 이를 축하하는 작품을 남긴 것이 주씨본에 기록되어 있다. 이 무렵 그는 통정대부(通政大夫) 또는 절충장군(折衝將軍)이라는 명예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80세 되는 1769년에 친구인 박문욱(朴文郁) 작품의 발문을 쓴 기록이 주씨본의 부록인 ≪청구가요≫에 실려 있다. 이후 얼마나 더 살다가 생을 마감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옮긴이
이상원(李相原)은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다. 초등학생 시절에 대구로 전학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대구에서 성장하며 공부했다.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후 서울로 올라가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판소리 관련 연구로 석사 학위를, 시조 관련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광주에 있는 조선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학생들에게 고전 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지금까지 고전 문학 연구의 기초가 되는 자료나 문헌에 대한 탐구와 문학 연구의 본령이라 할 수 있는 작품 해석 및 의미 탐색을 병행하면서, 균형감을 가지고 좀 더 정확하게 한국 고전을 연구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런 노력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 대표 저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연구서로 ≪17세기 시조사의 구도≫(월인, 2000), ≪조선 시대 시가사의 구도와 시각≫(보고사, 2004, 학술원우수학술도서), ≪조선 후기 가집 연구≫(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5, 학술원우수학술도서), ≪한국 고전 문학 작품론 3−고전 시가≫(공저, 휴머니스트, 2018) 등이 있고, 자료집으로 ≪고시조 대전≫(공저,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2, 학술원우수학술도서), ≪가사육종≫(보고사, 2013), ≪김천택 편 청구영언≫(공저, 국립한글박물관, 2017), ≪한국 명품 가사 100선≫(공저, 태학사, 2019)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 ≪국역 고산유고≫(공역, 소명출판, 2004)가 있다.
차례
해동가요서(海東歌謠序)
1. 초중대엽(初中大葉)
2. 이중대엽(二中大葉)
3. 삼중대엽(三中大葉)
4. 북전(北殿)
5. 이북전(二北殿)
6. 초삭대엽(初數大葉)
7. 이삭대엽(二數大葉)
1) 열성어제(列聖御製)
2) 여말(麗末)
3) 본조(本朝)
해동가요발(海東歌謠跋)
부록
박씨본
일석본
주씨본
작품 찾아보기
해설
엮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엊그제 덜 괸 술을
질동이에 가득 붓고
설데친 무나물 청국장 뿌려 내니
세상의
육식자들이 이 맛을 어이 알리오
엇그제 덜 괸 술을
질동희예 가득 붓고
설데친 무우남을 淸匊醬 쳐 이
世上에
肉食者들이 잇 맛슬 어이 알리오
(김천택)
눈아 눈아 얄미운 눈아
두 손 장지(長指)로 찔러 멀게 할 눈아
남의 임을 볼지라도 본체만체하라 하고 내 언제부터 마음 다스리랬더니
아마도
이 눈의 탓으로 말 많을까 하노라
눈아 눈아 얄믜온 눈아
두 손 長가락으로 질너 머르칠 눈아
의 님을 볼라도 본동만동라 고 내 언제븟터 情 다라터니
아마도
이 눈의 지위예 말 만흘가 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