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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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詞)란 무엇인가?
본래는 악곡의 가사로 쓰이던 것이 민간에서 유행하기 시작해 곡자사(曲子詞)라고 불리다가 후에 점차 사라고 줄여 부르게 되었다. 초기의 작품은 중당(中唐)까지 거슬러 올라가나 시가 아닌 하나의 독립적인 장르로 인식하게 된 것은 당말(唐末)부터 오대(五代) 후라고 본다. 작풍은 보통 완약, 호방, 전아, 영물 등 여러 파로 나뉘는데, 시에서 표현하기 곤란한 섬세한 미감(美感)이나 감정을 독백 형식으로 진술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주요 사집으로는 ≪화간집≫, ≪존전집≫, ≪절묘호사≫ 등이 있다.
최초의 문인사집 ≪화간집≫
사는 민간에서 출발해 문인이 그 창작을 주도하게 되면서 점차 발전했고, 송(宋)에 이르러 극성을 이루며 송대(宋代)를 대표하는 문학 형식이 되었다. 그러나 민간사(民間詞)와 초기의 문인사(文人詞)를 거쳐 극성의 단계에 진입하기 이전, 초기 문인사와 전문 문인사의 점이적인 형태를 보이며 극성 단계로 가는 전환점이 되었던 만당과 오대의 문인사를 간과할 수는 없다. 특히 최초의 문인사집인 ≪화간집≫은 사라는 문학 형식이 문인의 모색 단계에 머물렀던 초기 문인사 형태가 진정한 총체성을 구비해 가는 데 변화와 정리를 단행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와 같이 ≪화간집≫은 사의 문학 단계를 고찰하는 데 있어 반드시 궁구해야 하는 작품집이다.
화간사는 온정균과 위장을 중심으로 작품 모습을 구분하지만 화간사 속에는 화간이라는 명칭에 부합하지 않는 작품도 적지 않다. 그러나 화간이라는 서명을 통해 당시의 사작 특징을 대변하고 있으며, 화간과 거리가 있는 작품 역시 사의 극성기를 준비하는 다양성 전개의 전초가 됨을 알 수 있다.
화간사의 이와 같은 가치를 고려해, 온정균과 위장만을 집중적으로 거론하며 ≪화간집≫을 운운하는 현실에서 한발 나아가 ≪화간집≫ 작가 18명의 작품을 수록된 비율에 따라 고루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한다.
200자평
섬세한 운율과 여성적 기교로 그려낸 사랑시.
≪화간집≫은 만당에서 오대 시기, 남녀 간의 애정과 비애를 주 소재로 한 염사(艶詞)를 모은 작품집이다. 농후한 색채와 아름다운 문사로 여성들의 자태와 사랑의 정서를 주로 그린 온정균의 사풍이 주를 이루며, 그의 사풍을 따른 수많은 문인들의 사도 함께 싣고 있어 여러 사를 고루 감상할 수 있다. 오늘날 전하는 대부분의 사가 바로 이 ≪화간집≫에 수록된 것이라 더욱 뜻깊다. 이 책에는 온정균을 비롯한 총 18명의 사 500수 중 사(詞)의 풍격을 가장 잘 드러낸 100수를 골라 수록했다.
지은이
화간집의 작가는 모두 18인으로,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정도에 따라 그 종적(蹤迹)의 분량도 많은 차이를 보인다.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온정균(溫庭筠)은 본명이 기(岐)이고 자(字)가 비경(飛卿)으로 산서성(山西省) 태원(太原) 사람이다. 재능이 뛰어났지만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했다. 음률에 정통하고 사조(詞調)에 능숙해 사문학(詞文學) 초기에 사의 격률을 규범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온정균 사의 예술적인 성취는 당시 사인(詞人)들의 선두가 되었다. 그의 사는 대부분이 여성의 요염한 모습과 자태를 묘사하고 있어 제재 면에서 비교적 협소하지만, 호색적이고 선정적인 화간사의 특징을 개시했다.
황보송(皇甫松)은 본명이 숭(嵩)이고 자가 자기(子奇)로 절강성(浙江省) 목주(睦州) 신안(新安) 사람이다. 시사(詩詞)에 뛰어났으며 신성(新聲)을 제작했다.
위장(韋莊)은 자가 단기(端己)로 섬서성(陝西省) 경조(京兆) 두릉(杜陵) 사람이다. 재능이 뛰어나고 성격이 소탈해 형식에 구애받지 않았다. 당소종(唐昭宗) 건령 원년(乾寧元年)에 진사(進士)에 합격해 교서랑(校書郞)이 되었고, 오대 때 촉(蜀)에 들어가 왕건(王建)의 휘하에서 장서기(掌書記)를 맡아 전촉(前蜀)의 건국을 보좌해 승상(丞相)에 이르렀다. 화간사인으로 온정균과 이름을 같이해 맑고 아름다운 사를 썼다.
설소온(薛昭蘊)은 자가 징주(澄州)로 산서성 하중(河中) 보정(寶鼎) 사람이다. 왕연(王衍) 때 관직이 시랑(侍郞)에까지 이르렀다. 시와 사에 뛰어났고 재능이 출중했다.
우교(牛嶠)는 자가 송경(松卿) 또는 연봉(延峰)으로 감숙성(甘肅省) 농서(隴西) 사람이다. 희종(僖宗) 건부(乾符) 5년에 진사에 급제해 습유(拾遺) 등의 관직을 지냈다. 시와 사에 재능이 뛰어났다.
장필(張泌)은 자가 자징(子澄)으로 회남(淮南) 사람이다. 남당의 후주(後主)가 그를 불러 감찰어사(監察御使)로 등용했다. 이후에 후주를 따라 송(宋)에 투항했다. 사 풍격이 온정균과 위장의 작품과 유사하다.
모문석(毛文錫)은 자가 평규(平珪)로 하남성(河南省) 남양(南陽) 사람이다. 14세에 과거에 급제해 전촉(前蜀)에서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와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냈다. 왕연을 따라 당(唐)에 항복했으며, 후에는 후촉(後蜀)을 섬겼다. 사(詞)를 잘 지었다.
우희제(牛希濟)는 감숙성 농서 사람으로 우교의 조카다. 촉에서 벼슬을 했고 왕연 시기에 한림학사를 지냈다. 후에 당에서 옹주절도부사(雍州節度副使)를 임명받았다. 재능이 민첩하고 시와 사에 뛰어났으며, 사의 풍격은 우교와 비슷하다.
구양형(歐陽烱)은 사천성(四川省) 익주(益州) 화양(華陽) 사람이다. 전촉에서 중서사인(中書舍人)을 지냈고, 전촉이 망하자 후촉에서 한림학사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또한 후촉이 망한 후에는 송을 섬겼다. 조숭조가 편찬한 ≪화간집≫의 서문을 써서 ≪화간집≫의 편집 의도를 설명했다.
화응(和凝)은 자가 성적(成績)으로 산동성(山東省) 수창(須昌) 사람이다. 19세에 과거에 급제했다. 처음에는 후당(後唐)을 섬겼고, 후에는 후진(後晋)에서 재상(宰相)을 지냈다. 평생 문장을 지었는데, 특히 단가(短歌)와 염곡(艶曲)에 뛰어나 곡자상공(曲子相公)으로 불리었다.
고경(顧夐)은 본적이 상세하지 않다. 전촉에서 왕건 시기에 급사내정(給事內庭)과 무주자사(茂州刺史)를 지냈다. 이후에 후촉에서 태위(太尉)에 올랐다. 시와 사에 뛰어났는데, 그의 사는 진지하고 열렬해 완곡한 아름다움이 감동적이다.
손광헌(孫光憲)은 자가 맹문(孟文)이다. 사천성 능주(陵州) 귀평(貴平) 사람이다. 후당에서 능주판관(陵州判官)을 지냈고, 송에 투항한 이후에는 황주자사(黃州刺史)를 역임했다. 오대의 사인 중 작품 수량이 가장 많다.
위승반(魏承斑)은 부친 위굉부(魏宏夫)가 전촉 왕건의 양자였다. 때문에 위승반 역시 왕종필(王宗弼)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고 제왕(齊王)에 봉해졌으며 관직이 태위에 이르렀다. 그의 사는 대부분이 개인적인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녹건의(鹿虔扆)는 후촉 때 급제해 관직이 검교태위(檢校太尉)에 이르렀지만 후촉이 망하자 더 이상 벼슬을 하지 않았다. 사를 통해 개탄의 정서를 표출했다.
염선(閻選)은 평민이었으나 남당의 후주에게 사를 지어 바쳤다. 이에 염 처사(閻處士)로 불렸다. 사의 풍격이 모문석과 비슷하다.
윤악(尹鶚)은 사천성 성도(成都) 사람이다. 전촉의 왕연을 섬겼고 한림교서(翰林校書)를 거쳐 참경(參卿)에까지 이르렀다. 시와 사에 능했는데 특히 사가 맑고 간결하다.
모희진(毛熙震)은 후촉 맹창(孟昶) 시기에 관직이 비서감(秘書監)에 이르렀다. 음률에 정통해 사의 대부분이 신성(新聲)이다.
이순(李珣)은 자가 덕윤(德潤)이고 사천성 재주(梓州) 사람이다. 오대 시기 전촉의 수재로 왕연을 섬기다가 나라가 망하자 더 이상 벼슬을 하지 않았다. 사의 풍격이 청신하고 우아하며 소박함 속에 아름다움이 드러나 있어 위장의 작품과 유사하다.
옮긴이
홍병혜는 1969년 서울에서 출생했고, 2002년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지금까지<유우석과 백거이 사의 남방성 고찰> 등을 비롯해 2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으며,≪구양수 사선≫ 등 10여 권의 저서와 역서 및 편역서를 출판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연구소 초빙연구원과 한신대학교 학술원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대학과 배화여자대학 중국어통번역과에서 강의하고 있다.
차례
온정균(溫庭筠) 8수
그대가 내 애간장을 끊어놓던 곳인데
살구꽃이 그대를
굳게 닫힌 붉은 문에
육궁의 미인들은
돌아가고픈 간절함이
탕자를 보고픈 마음에
단장한 얼굴에는
떠난 그대를
황보송(皇甫松) 5수
구슬 같은 눈물이 흐르는데
꾀꼬리가 텅 빈 규방 곁에서
흥청이던 어느 날 밤에
강남의 매실이 무르익던 때를 떠올리고
늦도록 물놀이하여
위장(韋莊) 15수
아름다운 여인이 눈물을 흘리며
고향으로 돌아가지 말아야 하네
취해서 아름다운 여인과
인생이 얼마나 되겠는가
응어리진 원망을 품고
만나기는 어렵지만 헤어지기는 쉬운데
서로 만나기가 더욱 어렵다네
우리의 사랑이 끝나고 나면
소식을 전할 방법이 없네
여인이 근심에 잠겨 있네
인생이 얼마나
천자를 알현하러 간다네
이별가 한 곡에
그대와 이별했네
깨어 보니 꿈이어서
설소온(薛昭蘊) 3수
아득한 감정과 깊은 원망을 누구에게
그녀에게 편지를 쓰려니
이미 그리움으로
우교(牛嶠) 7수
그대를 원망하며
좋은 인연을 부러워할 만하다네
모두 매정한 그대보다는 낫네
내 마음을 알고 있을까
그대와 내 마음이 같기를
그대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는다네
지난해를 생각하니
장필(張泌) 5수
이별의 아픔을 감당하는데
그를 찾아 헤맨다네
결국에는 소식이 끊기었네
오동나무 꽃이 떨어져
창가에 기대어 그대를 그려보네
모문석(毛文錫) 5수
몽롱하게 생각에 잠기어
봄날의 원망이 절절한데
말의 피가 말굽을 적시지만
그 사람만을 자꾸 생각하지만
사랑의 감정이 깊어지네
우희제(牛希濟) 3수
서로 만날 길이 없네
그리워했던 일을 다 말하니
감정이 다하지 않아
구양형(歐陽烱) 5수
술이 오르자 다시 기쁨을 나누었네
서로 돌아보다
원망에 싸인 채
물결 소리 따라 사라져갔네
꿈속에서 그대를 보고 나니
화응(和凝) 3수
이별을 원망하며
소녀가 구애를 거절하니
푸른 버들은
고경(顧夐) 10수
그를 더 이상 찾기 어려우니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네
주색에 빠진 것을 근심하는데
거침없이 눈물이 흐른다네
그대와 헤어진 후
그대를 생각하니
눈살을 찌푸리고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이 그리운 마음의 끝은 어디인가
내 앞에 그대가 없으니
손광헌(孫光憲) 10수
그리움도 흐르는 물을 따라 멀리 가는데
남방 사람들이 제사를 지낸다네
맑은 밤이 고요하고
하루 종일 그리워하네
양관으로 가는 길에 들어서네
문밖에는 봄물이 흐른다네
말없이 쓸쓸한 그대를 마주하니
그리움이 더 쌓여가네
버들 솜이 이리저리
이별에 근심하는데
위승반(魏承斑) 3수
오래도록 그를 만날 수 없네
수천 번을 돌아보았네
원망과 그리움이 섞여
녹건의(鹿虔扆) 2수
세상에서 그를 찾을 곳이 없다네
침상에서 근심하네
염선(閻選) 2수
슬며시 처량해지네
규방의 원한을 감당할 수 없어
윤악(尹鶚) 2수
이별의 한은 많고
내일이면 또 떠날 것이라네
모희진(毛熙震) 5수
봄이 저물어 가는데
흰나비는 짝을 지어
적막한 가운데 원망이 많아
그대는 소식이 없으니
그대를 생각하니
이순(李珣) 7수
왜 석양을 바라보며
저절로 수심이 쌓인다네
이별이 원망스럽기만 하네
연이 핀 못을 지난다네
봄날의 근심에 잠겨 있네
서로 만나도 다시 헤어지네
그 사람은 오지 않네
해설
엮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탕자를 보고픈 마음에
금빛 꾀꼬리 여러 쌍이
간드러진 가지에서 좋은 소리를 내며 지저귀네.
봄이 오니 수심은 저절로 실처럼 자라나고
탕자를 보고픈 마음에 슬퍼하네.
楊柳枝 其六
兩兩黃鸝色似金, 裊枝啼露動芳音. 春來幸自長如線, 可惜牽纏蕩子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