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시나리오걸작선> 제3권. 해방 직후의 용솟음치는 감격 속에서 쓰여졌기 때문에 도입부의 3·1운동의 묘사가 매우 서사시적이고, 이화 학당을 뛰쳐나오는 16세 처녀 유관순의 열정도 감동적이다.
3·1운동의 좌절과 일제의 탄압으로 전국의 학교가 휴교되자 고향인 천안군에 내려가 음력 3월 1일을 기한 또 한 차례의 3·1만세 사건을 주모하는 관순의 활약이 자세히 그려진다. 이 작품에서 가장 격렬한 충격과 통분을 느끼게 하는 것은 일헌에 잡힌 관순이 재판정에서도 항일 절규하는 열화 같은 모습과 옥중 투쟁, 그리고 끝내 간독한 일제에 의해 천인공노할 만행으로 고문치사 당하는 부분이다.
허구에 의한 것이 아니고 사실에 의한 실록전기영화이니만큼 이 겨레를 능욕한 일제의 독정과 만행이 어떠했는가를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다. 이화학당의 월터 교장이 전옥으로부터 관순의 일곱 토막 난 시체를 받아내 정동교회에서 진혼 예배를 보는 라스트신은 필자도 잊을 수 없는 만감이 사무친 장면이었다. 윤봉춘 원로는 <유관순>을 1959년도와 1966년도에 다시 제작해 전후 세 번이나 영화화했다. 이 작품에 대한 그의 애착과 집념이 얼마나 큰가를 잘 말해준다.
200자평
해방 직후의 용솟음치는 감격 속에서 썼기 때문에 도입부의 3·1운동의 묘사가 매우 서사적이고, 이화 학당을 뛰쳐나오는 16세 유관순의 열정도 감동적이다. 고향인 천안에 내려가 또 한 차례 만세 사건을 주모하는 활약이 자세히 그려진다. 격렬한 충격과 통분을 느끼게 하는 것은 재판정에서도 항일 절규하는 모습과 옥중 투쟁, 그리고 끝내 고문치사 당하는 부분이다. 계몽영화협회의 제작으로 1948년 윤봉춘 원작, 감독 이구영 각색으로 처음 영화화했다. 윤봉춘은 1959년과 1966년에도 유관순을 제작해 모두 세 번이나 영화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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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윤봉춘(1902~1975)
1902년 함경북도 출생으로 회령보통학교, 회령신흥보통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태극기 사건으로 체포되어 청진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난 뒤에 북간도로 가서 명동중학에 들어가 나운규를 만났다. 1927년 나운규의 영화 <들쥐>에 연기자로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그 후 <잘있거라>(1927), <금붕어>(1927), <옥녀>(1928), <사나이>(1929), <벙어리 삼룡>(1929) 등 나운규의 영화에 계속 출연함으로써 연기자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1930년에는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구영 감독의 <승방비곡>에 출연하여 좋은 연기를 보였다.
연기자로서 활약하는 한편으로 그는 1930년 <도적놈>을 연출하여 감독으로 데뷔하였다. 이어서 <큰 무덤>(1931), <도생록>(1938), <신개지>(1942) 등 민족주의자로서의 자유사상이 투영된 작품을 감독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는 일제의 어용단체인 조선영화인협회에 가입하는 것을 거부하고 낙향하였다. 광복 후 상경하여 계몽영화사를 설립하고 다시 영화 활동을 시작하여 1945년부터 1965년에 이르는 약 20년 동안에 20여 편에 가까운 영화를 연출하였다.
8·15광복 직후부터 1940년대 후반에 걸쳐서는 <윤봉길 의사>(1947), <유관순>(1948) 등 독립 운동을 소재로 한 이른바 ‘광복영화’라고 할 수 있는 작품들을 주로 만들었다. 1950년 이후 1960년대에는 <논개>(1956), <한말풍운>(1959), <황진이의 일생>(1961) 등 민족의식을 담은 사극과 <고향의 노래>(1954), <영원한 내 사랑>(1958) 등 오늘의 일상생활에서 소재를 취한 작품을 많이 연출하였다. 1963년 한국예술문화단체 총 연합회 이사를 거쳐 회장을 역임하였다.
차례
원작_윤봉춘
시나리오_이구영
감독_윤봉춘
제작년도_1948
나오는 사람들_유중권, 이씨, 관순, 관복, 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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