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청언 소품(清言小品)의 정수
《유몽영(幽夢影)》은 청(淸)나라 초기 문인 장조(張潮)가 30세 전후로부터 45세 전후에 이르기까지 얼추 15년에 걸쳐 틈틈이 쓴 글들을 총 219칙(則)으로 엮어 만든 소품 문집(小品文集)이다. 《유몽영》에서 장조는 자기 주변의 일상 풍경을 관조와 성찰 그리고 개인적 깨달음을 거쳐 간결한 격언이나 경구 또는 어록이나 시 등 다양한 형식으로 삶의 정취를 담담하게 혹은 격정적으로 혹은 미려(美麗)하게 혹은 읊조리듯 담박하게 담아냈다. 이런 글 형식을 청언 소품(清言小品)이라 하는데, 이러한 글쓰기는 중국의 명대(明代) 후기부터 청대(淸代) 전기에 이르기까지 대단한 성세를 구가했다. 당시 성행했던 청언 소품문 중에서도 최고의 미문(美文)을 꼽는다면 단연 장조의 《유몽영》을 첫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유몽영》은 17∼18세기 조선 문인층에서 크게 유행하기도 했다.
그윽한 꿈 그림자
“유몽영”은 ‘그윽한 꿈 그림자’쯤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윽하다[幽]’는 말은 못내 아쉬운 ‘아련함’이란 의미도 함축하고 있다. 양복길(楊復吉)의 발문에 따르면, 그중 ‘몽(夢)과 영(影)’은 《금강경(金剛經)》에서 말하는 육여(六如 : 세상의 모든 것이 무상함을 꿈[夢], 환상[幻], 물거품[泡], 그림자[影], 이슬[露], 번개[電]의 여섯 가지에 비유해 이르는 말) 가운데 두 가지를 취한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본서 《유몽영》의 서명(書名)에 담긴 뜻은 ‘이미 지나가 버려 덧없어진 옛일이긴 하지만 여전히 작가의 마음에 그윽하게 남은 것 혹은 아련히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어떤 것’들이라 할 수 있다.
문인의 격언
《유몽영》이 오늘날 유명해지게 된 것은 전적으로 린위탕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린위탕은 영어로 수필을 써서 중국 문화를 서구 세계에 알린 인물로 루쉰(魯迅)과 함께 현대 중국 문학을 대표하는 수필가다. 그는 대표 수필집 《생활의 발견(The Importance of Living)》에서 일상적인 삶의 풍경 속으로 들어오는 자연 만물을 묘사하는 《유몽영》의 탁월한 표현 기법과 미학 의식에 대해 극찬했다. 그는 《유몽영》에 대해 “문인의 격언”이라 말하며 “자연은 우리의 생명 속에 온통 스며들어 있다. 자연은 소리이기도 하고 색깔이기도 하며 모양이기도 하고 정취이기도 하며 분위기이기도 하다. 감각적인 예술가인 인간은 자연 속에서 적당한 정취를 선택해 그것들을 자신의 삶과 조화시킨다. 이것은 시는 물론이고 산문을 짓는 중국의 모든 작가들에게서 나타나는 태도다. 그러나 나는 이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탁월한 표현은 장조의 《유몽영》 속 에피그램(epigram)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유몽영》은 수많은 문학적 에피그램을 모아 엮은 격언집이다. 이처럼 문학적 에피그램을 모아 엮은 중국의 서책은 매우 많다. 그러나 장조가 직접 쓴 《유몽영》과 비견할 만한 서책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높이 평가했다.
여백의 맛
《유몽영》은 특정한 주제나 목적 없이 지은이가 그때그때 떠오른 단상들을 두서없이 적은 글들의 모음이다. 따라서 읽을 때도 한꺼번에 통독하기보다는 흥취가 돋으면 그때그때 슬쩍 책을 들춰 한 구절씩 음미하는 편이 어울린다. 격조 높은 비유와 핵심을 꿰뚫는 혜안이 빛나는 문장은 여백을 두고 읽어야 제맛이 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저자의 뜻과 나의 흥취가 우연히 들어맞는 구절을 발견한다면 그 재미 또한 특별할 것이다.
200자평
근현대 중국 문학가 린위탕(林語堂, 임어당)이 탁월한 표현 기법과 미학 의식을 극찬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청나라 문인 장조의 소품 문집이다. 시, 격언, 산문 등 다양한 형식으로 삶의 정취를 총 219칙으로 엮어 담아냈다. 사소한 일상이나 사물을 소재로 담박하게 써 내려간 짧은 글에는 위트와 해학이 넘친다. 틈틈이 한 편씩 들춰 보고 음미하면 짧은 글 가운데 인생의 핵심을 발견할 수 있다. 옮긴이 백승도는 임의로 글을 나누거나 덧붙이지 않고 원서에 충실하게 옮기되, 원문의 문학성을 최대한 살렸으며, 글에 언급된 각종 전고를 자세히 주석으로 달아 독자들이 글의 깊이를 음미할 수 있도록 했다.
지은이
《유몽영(幽夢影)》의 저자 장조(張潮, 1650∼?)의 자는 산래(山來)이고, 호는 심재(心齋)다. 청나라 순치(順治) 7년(1650) 안휘성(安徽省) 흡현(歙縣)에서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났다. 기록에 따르면 그의 선조들은 대대로 관직에 진출해 고관을 지냈으며, 특히 부친은 산동성(山東省) 학도(學道)·감찰어사(監察御史)·시랑(侍郞)·한림관(翰林官) 등 여러 요직을 거쳤다. 시쳇말로 그의 집안은 명실상부 명문거족이었다. 이러한 집안 내력의 영향으로 그도 어렸을 때부터 과거와 관련한 팔고문(八股文)을 익혀 15세 때 이미 박사제자원(博士弟子員)이 되었다. 그러나 그즈음부터 그의 삶은 “적잖은 시련을 겪어 웅대한 뜻이 점차 마모되고 말았다”라고 말할 만큼 많은 시련을 겪으면서 의기소침해졌으며, 더불어 관운도 열리지 않아 진사(進士)는커녕 거인(擧人)도 되지 못한 채 겨우 공생(貢生)의 자격을 얻는 데 그쳤다. 하지만 관운과는 별개로 이러한 시련은 오히려 그의 문학적 재능을 꽃피워 아름다운 글을 남기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30세를 전후로 약 15년에 걸쳐 《심재요복집(心齋聊復集)》·《화영사(花影詞)》·《필가(筆歌)》·《유몽영(幽夢影)》 등을 펴내며, 장죽파(張竹坡)를 위시한 우동(尤侗)·오기(吳綺)·공상임(孔尙任) 등과 같이 당시 문명을 떨치던 저명한 문인들과 널리 교유했다. 이외에 《소대총서(昭代叢書)》 150권과 《단기총서(檀幾叢書)》 50권을 비롯해 명·청대 기문(奇文)을 모은 문언 단편 소설집 《우초신지(虞初新志)》 20권 등의 총서를 편집하기도 했다. 그러나 불운은 젊은 시절에만 그치지 않았다. 50세가 되던 강희(康熙) 38년(1699), 장조는 모종의 정치적 사건에 연관되어 감옥에 갇혔다. 《청사고(清史稿)》에는 이와 관련한 기록이 없어 자세한 원인은 알 수 없으나, 장조 개인의 기록에 따르면 그 사건은 ‘인간적 배신’에 따른 무고였으며, 그때 받은 배신의 충격은 ‘검(劍)’에 호소할 정도로 컸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장조는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해 완전히 붓을 꺾고 말았고, 이후 그의 삶은 더 이상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옮긴이
백승도(白承道)는 1967년 어느 봄날, 경북 성주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중고등학교 시절은 대구에서 보내고 대학은 서울 연세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다녔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의 삶과 청소년기 이후 대구와 서울이라는 대도시로의 삶의 전환은 양가적이어서 지금도 정서는 도시와 시골을 왔다 갔다 한다.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왕부지(王夫之) 시론(詩論) 연구(硏究)〉로 석사 학위를, 〈장자(莊子)에서의 진인(眞人)의 담론 방식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역서로는 《도와 로고스》, 《동양과 서양, 그리고 미학》, 《장파 교수의 중국미학사》, 《문명소사》 등이 있다. 지금은 불교와의 인연을 말미암아 장자와 선종의 심층에 놓인 동양적 사유 구조의 근원에 관심을 두고 있다.
차례
유몽영 1∼219
《유몽영》 발문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1.
경전 읽기로는 겨울이 맞춤하니
정신을 하나로 모을 수 있기 때문이고
역사책 읽기에는 여름이 알맞으니
낮이 길어 시간 충분하기 때문이며
제자서 읽기에는 가을이 때맞으니
운치가 각별하기 때문이고
문집 읽기에는 봄이 제격이니
생기가 발랄하기 때문이라
15.
젊은이는
모름지기 노인의 식견을 가져야 하고
노인이면
마땅히 젊은이의 포부를 가져야 한다
35.
젊어서 책 읽기는
문틈으로 달 보기요
중년의 책 읽기는
뜰에서 달 보기며
노년의 책 읽기는
누대에 올라 달 즐김과 같다
이 모두 경험의 깊고 얕음이
깨달음의 깊고 얕음이 되는 것
128.
가슴속 작은 불평이야
술로 씻을 수 있다지만
이 세상 크나큰 불평은
칼 아니면 씻어 낼 수 없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