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수필선집’은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공동 기획했습니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는 한국 근현대 수필을 대표하는 주요 수필가 50명을 엄선하고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를 엮은이와 해설자로 추천했습니다. 작고 작가의 선집은 초판본의 표기를 살렸습니다.
지란지교(芝蘭之交)라는 말을 많은 독자들의 가슴에 새긴 주인공은 시인 유안진이다. 타인과 맺는 성숙한 관계에 대한 소망을 성찰적이고 섬세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수필 <지란지교를 꿈꾸며>는 발표 이후 오랫동안 독자들에게 사랑받았고, 시인이었던 유안진을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젊은이들의 정신적 멘토 그리고 한국의 대표적인 수필가로 기억하게 만들었다.
수필을 통해 유안진은 평범한 인간으로서 마주하는 그렇고 그런 일상을 성찰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일상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인지를 보여 주었다. 그런데 사실 자기 일상의 낱낱을 말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다. 일상의 가치를 말하기 위해서 작가는 먼저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익명의 독자들 앞에 가감 없는 얼굴로 마주 앉아야 하기 때문이다. 유안진은 시인으로서만이 아니라 학자이자 교수로서 그리고 한 집안의 딸, 한 남자의 아내, 아이들의 어머니인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자신을 삶과 경험을 솔직하게 드러냈고, 자신의 부족함을 스스로 인정하는 용기를 보여 주었다. 수필가로서 유안진은 무엇보다 진실한 인간의 얼굴을 보여 주고자 했다. 그런 까닭에 인간이어서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타인의 결핍까지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다. “완벽한 사람, 허점이 없는 너무 똑똑하고 영악스런 사람보다는, 조금은 어수룩한 사람”,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래서 계면쩍어하고 겸손할 줄도 아는, 즉 2할쯤은 덜떨어진 듯한 사람”(<손톱 발톱이 타들도록 고독한 여름>)에게 더 인간적인 매력이 있다고 말하는 유안진의 목소리는 다정한 친구가 건네는 위로의 말이자 마음의 상처를 보듬는 어머니의 목소리처럼 따뜻한 힘을 지녔다.
200자평
<지란지교를 꿈꾸며> 이후 수필을 통해 많은 독자들의 벗이자 멘토가 되어 온 유안진. 그녀의 수필은 일상의 고독과 결핍을 이해하고 채워 주는 지란지교의 벗과도 같다. 그녀는 예술가적 감성과 아름다운 문체로 부드럽게 독자의 마음을 감싼다. 그녀의 수필에서 우리는 삶 자체의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긍정의 시선과 함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말할 줄 아는 염결(廉潔)의 태도를 만난다.
지은이
우리나라의 시단(詩壇)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수필가인 유안진(柳岸津)은 1941년 4월(호적에는 10월)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 조부에게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배웠고, 친가와 외가의 할머니들에게 내방 가사와 시조, 한시 등을 들으며 자랐다. 가문의 역사를 가사처럼 지은 세덕가나 제사상 차리는 법을 가르쳐 준 할머니들 덕분에 삶과 글이 별개가 아니라 더불어 완성되는 삶의 형식 그 자체라는 것을 어린 시절부터 몸으로 배웠다. 전통적 가치에 대한 배움과 경험은 이후 유안진의 수필 세계와 학문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유안진에게 현대시가 찾아온 결정적 계기는 소월과의 만남이다. 대전여자중학 시절, <산유화>에서 소월은 왜 계절의 순서를 무시하고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또 지네’라고 했는지 선생님께 질문했던 소녀는 스스로 그 답을 찾기 위해 소월의 시를 읊조리며 시와 대면하기 시작했다. 충남 대전 호수돈여자고등학교를 다니던 고교 시절엔 여성 판사가 되기를 꿈꾸기도 했다고 한다. 1961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에 입학한 첫 학기에 5·16이 일어나는 바람에 대학은 휴교 상태였는데, 그 무렵 유안진은 다시 습작을 시작하고 시인이 되기를 꿈꾸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로 부임하던 무렵 박목월 시인의 추천으로 1965년 3월 ≪현대문학≫에 <달>을 처음 발표하게 되었다. 1966년엔 <별>을, 1967년엔 <위로>를 이어서 발표함으로써 3회 추천을 마치고 시인으로서 문단에 발을 내딛었다.
교사로, 시인으로 본격적 활동을 시작한 유안진은 학문적 열망을 품고 대학원에 진학해 교육 심리학 전공자로서 학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73년엔 국비 장학생에 선발되어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학교로 유학을 떠났고, 1976년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 유안진은 한국교육개발원 책임연구원, 단국대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생활과학대학 아동가족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학자로서 유안진은 전통 사회의 여성−아동 민속 분야에 집중해서 학문 분야를 개척하기 위해 우리나라 전역에서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고 연구했다. 이러한 학문적 결실은 전공 서적만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저작으로도 출간되었다. ≪한국 전통 아동심리 요법≫, ≪한국 전통 사회의 육아 방식≫, ≪한국 전통 사회의 유아교육≫, ≪한국 전통 아동 놀이≫ 등의 학술 연구서 외에도 학술 장르와 에세이를 아우르는 교양 산문집 ≪한국 여성 우리는 누구인가? 상·하≫(1991), 속요집 ≪딸아 딸아 연지 딸아≫(2003), ≪옛날 옛날에 오늘 오늘에≫(2002) 등의 저서는 실증적 연구의 토대 위에서 완성될 수 있었던 결과물이다.
시인이었지만 산문에도 남다른 감각을 지녔던 유안진은 수필집 ≪그대 빈손에 이 작은 풀꽃을≫(1979), ≪실패할 수 있는 용기≫ 등을 출간하면서 대중과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시와 서사시로서의 소설 그리고 여러 권의 학술 연구서와 대학 교재, 연구 논문 등의 저자로서도 인정받았지만 ≪우리를 영원케 하는 것은≫(1985), ≪그리운 말 한마디≫(1985), ≪내 영혼의 상처를 찾아서≫(1989) 등이 잇달아 출간되면서 유안진은 수필가로서 대중의 열광적 지지를 받았다. 대표적인 수필집 ≪우리를 영원케 하는 것은≫은 1986년 가장 많이 팔린 책 중 하나로 기록되기도 했다. 또한 1980년에 결성되었던 ‘문채’의 동인 신달자, 이향아와 함께 수필집 ≪지란지교를 꿈꾸며≫(1986)를 펴냈는데, 일반 독자만이 아니라 청소년들에게도 널리 읽히며 화제가 되었다.
지란지교의 주인공으로 이름을 떨친 후에도 유안진은 시인으로 수필가로 꾸준하고 성실한 활동을 이어 갔다. 수필집 ≪축복을 웃도는 것≫(1994), ≪바람 편지≫(2003), ≪사랑, 바닥까지 울어야≫(2008), ≪상처를 꽃으로≫(2013) 등이 출간되었고, 이외에도 다수의 수필 선집들이 출간되었다. 시집의 경우도 첫 시집 ≪달하≫를 1970년에 출간한 이래 ≪구름의 딸이요 바람의 연인이어라≫, ≪다보탑을 줍다≫, ≪둥근 세모꼴≫, ≪숙맥 노트≫ 등 신작 시집 17권과 ≪세한도 가는 길≫ 등 다수의 시선집을 펴냈다.
시인이자 수필가로서 유안진의 작품 세계는 명실공히 한국 문단을 대표하고 있다. 대표적인 시 <세한도 가는 길>, <다보탑을 줍다>, <빨래꽃>, <춘천은 가을도 봄이지> 등과 더불어 <지란지교를 꿈꾸며>, <강철과 쇠붙이 시대의…> 등 여러 편의 수필은 중고교 교과서와 참고서 등에 게재된 바 있다. 시와 산문 등이 영어와 중국어, 일본어 등으로 번역되어 해외에 소개되었고 하와이대학과 오하이오대학 등의 동아시아학과에서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
2007년 서울대학교 교수직을 퇴임한 후 현재는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며, 2012년부터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어 활동하고 있다. 또한 한국 시인 협회 고문, 한국 작가 회의 자문위원, 국제 펜클럽 한국 본부 이사, 한국 문인 협회, 한국 여성 문인 협회 자문위원 등으로도 활동 중이다.
해설자
장은영은 197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 과정을 마치고, 현재는 조선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2014년 ≪세계일보≫ 평론으로 등단한 후 문학 평론을 쓰고 있다.
차례
새해 아침 솜털 푸른 이에게
모든 분들께
그리워지는 얼굴
지란지교(芝蘭之交)를 꿈꾸며
오직 한 사람
외가댁이란 말엔
실패할 수 있는 용기
슬픔의 가치
겨울에도 초목은
내가 나의 주인으로
노래하는 나의 오른손
만날고개
홀로 있고 싶을 때
진실로 거룩한 모습은
침묵하는 연습
사랑이여 언제나 피그말리온의 기적 같기를
眞珠를 키워 낼 내 영혼의 상처를 찾아서
빌려 쓰는 자의 태도
일상(日常)을 신뢰하며
수목 되어 듣고 싶은 여름 밤비 소리
봄밤에는 그리움을 안고 잠들자
아기와 눈과 겨울 행복
손톱 발톱이 타들도록 고독한 여름
밤을 사랑하며
진실의 나무 아래 서는 12월
보이지 않는 것들을 사랑하며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미친 짓
모든 체험과 공부가 곧 문장 수업
조선 시대의 여성 학자들
오해받는 옛 여성상
변함없이 변한다는 것만이 변하지 않는 유일한 것이지만
정승 되긴 쉬워도 명기 되긴 어렵다
계약 결혼의 선구자 황진이
외로운 사람과 더 외로운 사람
사랑은 짐이다
해설
지은이에 대해
해설자에 대해
책속으로
우리의 손이 비록 작고 여리나 서로를 버티어 주는 기둥이 될 것이며, 우리의 눈에 핏발이 서더라도 총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며, 눈빛이 흐리고 시력이 어두워질수록 서로를 살펴 주는 불빛이 되어 주리라.
그러다가 어느 날이 홀연히 오더라도 축복처럼, 웨딩드레스처럼 수의(壽衣)를 입게 되리라. 같은 날 또는 다른 날이라도.
세월이 흐르거든 묻힌 자리에서 더 고운 품종의 지란(芝蘭 : 지초와 난초)이 돋아 피어, 맑고 높은 향기로 다시 만나지리라.
<지란지교(芝蘭之交)를 꿈꾸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