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 ‘초판본 한국시문학선집’은 점점 사라져 가는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을 엮은이로 추천했다. 엮은이는 직접 작품을 선정하고 원전을 찾아냈으며 해설과 주석을 덧붙였다.
각 작품들은 초판본을 수정 없이 그대로 타이핑해서 실었다. 초판본을 구하지 못한 작품은 원전에 가장 근접한 것을 사용했다. 저본에 실린 표기를 그대로 살렸고, 오기가 분명한 경우만 바로잡았다. 단, 띄어쓰기는 읽기 편하게 현대의 표기법에 맞춰 고쳤다.
시인 유완희의 시는 근대 자본주의 체제 속의 계급 차별과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한인 억압의 현실 속에서 프로문학에 동조하는 식민지 지식인의 이념적인 이면을 잘 보여 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1910년 한일 병합 이후 한반도에서는 자본주의적인 근대가 진행됨에 따라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되는 것과 동시에,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화가 전개됨으로써 열등하고 무지한 식민지인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식민지 지식인들은 다양한 실천과 사유를 통해서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시도하게 된다.
이때 눈여겨봐야 할 점이 바로 제국주의·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식민지 지식인이 프로문학과 맺는 관계다. 유완희는 그동안 프로문학에 가입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프로문학의 이념과 운동을 상당히 따르는 식민지 지식인으로 알려져 왔다. “경향시에서 보이는 선전, 선동의 성격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으며 서사적 경향도 농후하게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집단적 자아화를 드러”낸다거나, “사회주의에 대한 공감”을 보여 준 것으로 평가된 기존의 연구사가 그 실례가 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연구사는 자칫 프로문학 주도자와 프로문학에 동조해 제국주의·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식민지 지식인 사이의 관계를 핵심-주변의 양상으로 오인하게 만든다.
이제 유완희의 시는 제국주의·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식민지 지식인의 이념적인 이면을 잘 보여 준다는 점에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 그의 시가 프로문학의 자장 내에서 읽히고 평가된다면, 그가 시도하는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의 맥락이 사회주의 문학의 주변부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평가보다는, 제국주의·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그의 문학적 노력을 온전하게 그대로 읽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해설에서 주목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유완희 시의 모습을 편린이나마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의 시는 제국주의·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라는 점에서 프로문학의 이념과 유사하고 그 이념에 동조하지만, 계급보다는 좀 더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민족을 사유의 중심에 놓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쉽게 말해서 유완희의 시는 계급을 포함한 한인의 생존 문제와 활로를 고민하는 것을 주요 관심사로 삼는다.
200자평
제국주의·자본주의를 비판했다. 적극적인 프로문학을 주창하지도 않았다. 주변인인가? 계급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민족’을 사유의 중심에 놓고 계급을 포함한 한인의 생존 문제를 고민했다. 유완희의 시는 프로문학의 변두리가 아니라 보다 위의 차원에 있었다.
지은이
유완희(柳完熙, 1901∼1964)는 1901년 11월 25일에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송문리에서 태어나 1964년 2월 17일에 간암으로 타계한 시인으로서, 1920∼1930년대 프로문학의 이념과 유사하면서도 차이를 보이는 시를 쓴 식민지 지식인의 한 사람이다. 유학수와 이점순의 사이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고, 본관은 전주이며, 호는 적구(赤駒), 송은(松隱), 유주(柳州)다.
1920년 3월 관립 경기고등보통학교를, 그리고 1923년 3월 경성 법학전문학교 본과를 1회로 졸업했다. 중학 시절부터 문학 작품을 읽고 작가의 꿈을 키웠으나, 가정 형편으로 인해 일본 유학을 하지는 못했다. 1923년 4월에 ≪경성일보≫ 편집부 겸 학예부 기자 생활을 시작했고, 퇴사 후 ≪동아일보≫, ≪시대일보≫, ≪중외일보≫,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기자로 활동했다. 아울러 1925년에는 경성여자미술학원과 조선문학원 등에서 철학, 예술론, 문장론 등을 강의했고, 평북 강계에서 기문사의 총지배인으로 있었다.
해방 이후 1948년에는 문통부에서 촉탁 일을 봤다가, 용인으로 내려가 교편을 잡기도 했다. 그 후 1955년 12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서울신문사 편집국장을, 그리고 1956년 9월부터 1960년까지 ≪세계일보≫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그는 1920년대 중반부터 1930년대 후반까지 신문 ≪시대일보≫와 ≪조선일보≫, 잡지 ≪조선지광≫, ≪조광≫, ≪개벽≫, ≪조선문단≫, ≪별건곤≫ 등에 시와 평론과 소설을 발표하거나, 세계 각국의 프로시를 번역·소개했다. 그의 시집 ≪태양과 지구≫가 있다고 하나, 소실된 듯해 확인되지 않는다.
엮은이
강정구(姜正求)는 1970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1988년에 춘천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상경해 경희대 국문과에서 대학 생활을 했다. 1992∼1995년에 경희대 대학원 국문과에서 석사 과정을, 그리고 1995∼2003년에 동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각각 졸업했다. 대학원 시절에는 주로 시인론에 주력했다. 한 시인의 생애와 문학을 통해서 문학의 맛과 멋을 풍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김지하의 서정시 연구>를 석사 학위 논문으로, 이어서 <신경림 시의 서사성 연구>를 박사 학위 논문으로 제출했다.
대학원 졸업 이듬해에 계간 ≪문학수첩≫에서 주관하는 제2회 문학수첩 신인문학상 평론 부문에 당선된 뒤 활발한 문단 활동을 학술 활동과 병행하면서, 가장 중요한 연구 과제로 삼았던 것은 ‘민중시 다시 읽기’였다. 민중시라는 형식은, 1960∼1990년대 진보적 민족문학론에 의해서 진리의 이데올로기를 담은 문학으로 설명되었으나, 그것은 문학을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왜곡하는 것이라는 심증을 가졌기 때문이다. 진보적 민족문학론이 바라본 민중시와 민족문학을 ‘다시 읽기’ 하는 작업은 기존의 중심 담론과 시각의 해체였고 재구성이었다.
이 과정에서 파농, 사이드, 바바, 스피박으로 전개되는 포스트콜로니얼리즘,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질 들뢰즈, 가라타니 고진, 슬라보예 지젝으로 이어지는 다종다양의 포스트-담론은 일종의 교과서였고, 권위의 세계를 다시 읽는 방법이 되었다. 신경림의 시를 현실 변혁적·투쟁적인 경향이 아니라 혼성과 모방의 서사로 읽고자 한 논문 <신경림 시에 나타난 민중의 재해석>과 <탈식민적 저항의 서사시>가 그 중간 성과물이었다. 나아가 논문 <1970∼1990년대 민족문학론의 근대성 비판>과 <진보적 민족문학론의 민중시관 재고>를 통해서 진보적 민족문학론의 시각을 문제 삼고자 했다. 앞으로 당분간 이러한 ‘다시 읽기’라는 방법에 매진할 계획이다.
차례
거지
女職工
犧牲者
아오의 무덤에
刹那
享樂市場
나의 要求
나의 行進曲
街頭의 宣言
民衆의 行列
오즉 前進하라!
어둠에 흘으는 소리
봄비
가을
바람
春咏
봄의 서울 밤
다리 우에서
獨訴
斷腸
1929年
봄은 왓다
無聲泣
우리들의 詩
太陽으로 가는 무리
太陽으로 가는 무리(續)
새해를 마즈며
生命에 바치는 노래
山上에 서서
내ㅅ가에 앉어
靑春譜
다시 맞는 이날
잊지 못할 이날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女職工
봄은 되얏다면서도 아즉도 겨울과 작별을 짓지 못한 채
—낡은 민족의 잠들어 잇는 저자 우예
새벽을 알리는 工場의 첫 고동 소리가
그래도 세차게 검푸른 한울을 치바드며
三十萬 백성의 귓겻에 울어 나기 시작할 때
목도 메다 치여 죽은 남편의 상식 상을
밋처 치지도 못하고 그대로 달려온
애젊은 안악네의 갓븐 숨소리야말로…
惡魔의 굴속 가튼 作業物 안에서
무릅을 굽힌 채 고개 한 번 돌니지 못하고
열두 時間이란 그동안을 보내는 것만 하야도—오히려 진저리 나거든
징글징글한 監督 놈의 음침한 눈짓이라니…
그래도 그놈의 뜻을 바더야 한다는 이놈의 世上—
오오 祖上이여! 남의 남편이여!
왜 당신은 이놈의 世上을 그대로 두고 가셧습닛가?
—안해를 말리고 자식을 애태우는….
●아오의 무덤에
아오여! 아오의 魂魄이여!
兄은 방금 이 땅을 버리고 가려 한다
한 아버지가 주추까지 노아 준
이 땅 이 터의 이 집을 버리고 가려 한다
千 里나 萬 里나 정처도 업는 곳으로—
그래도 그대는 白骨이나마
祖上의 끼친 터를 베고 잇건만…
●民衆의 行列
行列! 푸로레타리아의 行列!
家庭에서 田園에서 工場에서 또 學校에서
街頭로 街頭로 흗터저 나온다
營養에 주리여 蒼白한 얼골—그러나 熱에 띄인 거름거리
그들은 그들의 뛰노는 心臟의 鼓動을 듯는 듯하다
비웃느냐? ××× 무리들
—그늘에 자라날 享樂의 날이 아즉도 멀엇다고
그러나 그 거름거리를 보라! 大地를 울리고 新生으로 新生으로 다름질하는 그 거름거리를
그들은 인제는 너에의 覺醒을 더 바라지도 안는다
—赤道가 北쪽으로 기울어지기를—事實 以外에 더 큰 일이 잇기를—바라지 안는다
다만 힘으로써 힘을 익이고 힘으로써 힘을 어드랴 할 다름이다
그곳에 새롭은 世紀가 創造되고 ×××××××를 맛볼 수 잇스리니—
빗켜라! ××들!
그들의 行列을 더럽히지 말라! 굿세게 前進하는 그들의 압길을
行列! 푸로레타리아의 行列!
家庭에서 田園에서 工場에서 또 學校에서
街頭로 街頭로 흗터저 나온다
하날에는 눈보라 감돌아 올으고 따에는 모진 바람 휩쓸어 드는데
—돼지 무리 살가지 우슴 웃고…
●우리들의 詩
우리들은 時代의 苦痛을 倦怠를 닛기 爲하야 詩를 쓰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은 저들의 無智를 錯誤를 비웃기 爲하야 詩를 쓰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은 사랑의 對象을 또는 니저 준 사람을 찾기 爲하야 詩를 쓰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鄕土의 呪咀를, 都市의 憎惡를 살우기 爲하야 쓰는 것이냐? 그런 것도 아니다
그럿타고 祖上으로부터 傳하야 오는 가느다란 情緖를 노래하기 爲하야 쓰는 것은 勿論 아니다.
우리들의 詩는
神을 밋는 것이 아니요
꿈을 쫏는 것이 아니요
또는 달콤한 人生의 香氣를
오늘의 泰平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奇蹟을 幻想을 눈물을 歡樂을 몰은다
×
‘삶’은 힘이다!
힘은 歷史를 낫는다!
우리들은 그 힘을 밋고
그 힘으로써 가저와 줄 歷史를 밋는다
힘! 그 偉大한 힘이 現實의 위를 다름질할 우리들은 크나큰 嚮動을 밧는다
이것이 우리들의 詩다!
우리들의 詩는
兄弟에게 보내는 傳令이다!
姊妹에게 보내는 誡銘이다!
또는 우리들 自身에 내리는 宣言이다!
그럿타! 우리들 自身에 내리는 宣言이다!
우리들은 이 宣言으로 말미암아 自身의 나아갈 길을 찻고 明日이 歡喜를 늣긴다
그들이 街頭에 行列 지을 때
우리들의 詩는 行進曲이 된다
그들이 東西에서 서로 불을 때
우리들의 詩는 信號가 된다
天嶺을 넘어
大洋을 건너
서로 傳하는 信號가 된다
이 信號 가온대
우리들의 힘은 커 간다
우리들의 歷史는 잘아 간다
그리고 우리들의 詩는 더욱더 빗나 간다
들으라!
傳令을
誡銘을
宣言을
그리고 또 信號의 信號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