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유종원(柳宗元, 773∼819)은 이른바 ‘당송 팔대가(唐宋八大家)’라고 하는 중국의 가장 대표적인 문장가 여덟 명 가운데 한 사람이다. 유종원이 활동한 중당(中唐) 시기에는 육조(六朝) 시대에 성행한 문체로 내용을 경시하고 형식미를 중시하는 변려문(騈儷文)이 문단을 지배하고 있었는데 그는 이러한 형식주의의 문풍(文風)이 문단을 풍미하는 현상을 심히 우려해 한유(韓愈, 768∼824)와 더불어 고문운동(古文運動)을 전개했다.
유종원의 시는 당송 팔대가로 꼽힐 만큼 두드러진 그의 문장에 가려서 제대로 빛을 발하지 못한 면이 있지만 사실 그의 시 역시 그의 문장 못지않게 뛰어난 성취를 이루었다. 그의 시는 북송(北宋)의 대문호 소식(蘇軾, 1036∼1101)의 높은 평가에 힘입어 진가를 인정받기 시작했다. 소식은 <유자후의 시를 평함(題柳子厚詩)>에서 “유종원의 시는 도연명(陶淵明)의 아래 위응물(韋應物)의 위에 있다. 한유(韓愈)는 호방(豪放)하고 기험(奇險)한 점은 그를 능가하지만 온려(溫麗)하고 유심(幽深)한 점은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 고담(枯澹)한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겉은 메마르면서도 안은 기름지고, 담담한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아름다운 것을 귀하게 여긴다는 말로, 도연명이나 유자후 같은 사람의 시가 그러하다. 만약 안과 겉이 다 고담하다면 이것 역시 무슨 이야기할 가치가 있겠는가?”라고 높이 평가했다. 또 혜주와 담주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도연명과 유종원의 문집을 가장 즐겨 읽으면서 이 두 문집을 ‘남방 유배의 두 친구(南遷二友)’로 여기기도 했는데, 이것은 유종원의 시가 세인들의 주목을 받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200자평
당송 팔대가의 한 사람인 유종원의 시를 소개한다. 시의 뜻은 굴원을 이어받았고 풍격은 도연명, 사영운과 나란하며, 율시는 두보에 뒤지지 않는다. 소박하고 담담한 시어 너머로 큰 뜻을 펼치지 못하고 좌천당한 시인의 비애와 우수가 느껴진다. 소동파가 왜 이를 유배 시절의 벗으로 삼아 애송했는지 알 수 있다.
지은이
유종원[柳宗元, 773∼819, 자(字) 자후(子厚)]은 하동[河東, 지금의 산시성(山西省) 용지(永濟)] 지방의 명문 대족 출신이었다. 네 살 때 벌써 고부(古賦) 14편을 숙독했을 정도로 어릴 때부터 남다른 재주를 보여 ‘기동(奇童)’이라고 불렸다.
그는 덕종 정원 9년(793)에 스물한 살의 나이로 진사에 급제하고, 이어서 정원 14년(798)에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급제해 집현전서원정자(集賢殿書院正字)에 임명됨으로써 벼슬길에 발을 들여놓았다. 당시는 부패한 관리들이 정권을 전횡하는 정치적 암흑시대였는데 유종원은 몇몇 동지들과 함께 당시의 정치적 폐단을 개혁하려는 열망을 품고 정치 개혁의 의지를 불태웠다. 순종(順宗) 영정 원년(805)에 조정을 장악하고 정치 개혁을 주도하던 왕숙문(王叔文)이 유종원의 이러한 의지를 알아보고 그를 일약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으로 발탁했다.
그러나 그해 8월에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을 침해당한 환관(宦官)과 번진(藩鎭) 및 기타 보수파 인사들의 반격을 받은 순종이 물러나고 헌종(憲宗)이 즉위함으로써 ‘영정혁신(永貞革新)’이라고 불린 왕숙문의 정치 개혁이 100여 일 만에 끝나 버렸다. 영정혁신의 핵심 인사들은 모두 원지로 폄적(貶謫)되었고 그 이듬해에 영정혁신의 주도자였던 왕숙문이 유배지에서 사사(賜死)되었다. 유종원은 영정 원년(805) 9월에 소주자사(邵州刺史)에 임명되었다가 부임 도중인 11월에 다시 영주사마(永州司馬)로 좌천되었다. 이때 유종원과 함께 영정혁신의 동지였던 유우석(劉禹錫)·위집의(韋執誼)·한태(韓泰)·진간(陳諫)·한엽(韓曄)·능준(淩準)·정이(程異) 등도 모두 조정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의 사마로 쫓겨났다. 이것이 이른바 ‘팔사마 사건(八司馬事件)’이다.
유종원은 약 10년 동안 영주에 머물면서 아열대 지방인 영주 지역의 이국적인 산수와 풍토를 몸소 겪어 보고 그곳 민중의 삶의 애환을 들여다본 후 그것을 시문으로 승화시켰다.
헌종(憲宗) 원화 10년(815) 봄에 유종원은 도성으로의 소환령을 받아 재기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안고 장안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달리 그해 3월에 바로 유주자사(柳州刺史)에 임명되었다. 그는 풍속도 다르고 말도 알아듣기 힘든 유주에서, 풍토병의 발병 요인이 되는 독기인 장기(瘴氣)와 싸워 가며, 농작물의 수확을 늘리기 위해 노력하고, 학교를 열어 후진을 양성하며, 노비를 해방해 억울한 백성이 없게 하는 등 여러 가지 선정을 베풀었다.
다시 5년이 지난 원화 14년(819)에 대사면령이 내려져 유종원도 조정으로 귀환하게 되었지만 유주에 머무는 동안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그는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조서(詔書)가 유주에 도착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향년 47세였다.
옮긴이
류종목(柳種睦)은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대구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 및 역서로 ≪소식사연구(蘇軾詞硏究)≫, ≪당송사사(唐宋詞史)≫, ≪여산진면목(廬山眞面目)≫, ≪논어의 문법적 이해≫, ≪송시선(宋詩選)≫, ≪한국의 학술 연구−인문사회과학편 제2집≫, ≪범성대시선(范成大詩選)≫, ≪팔방미인 소동파≫, ≪육유시선(陸游詩選)≫, ≪소동파시선≫, ≪소동파사선(蘇東坡詞選)≫, ≪소동파사(蘇東坡詞)≫, ≪당시삼백수(唐詩三百首) 1·2≫, ≪중국고전문학정선−시가 1·2≫, ≪정본 완역 소동파시집 1·2·3≫, ≪중국고전문학정선−시경 초사≫, ≪소동파 산문선≫, ≪중국고전문학정선−사곡(詞曲)≫, ≪소동파 문학의 현장 속으로 1·2≫, ≪송사삼백수 천줄읽기≫ 등이 있다.
차례
새장 속의 매(籠鷹詞)
험난한 인생행로(行路難)
법화사의 서쪽 정자에서 밤에 술을 마시며(法華寺西亭夜飮)
초가을 밤에 앉아 오무릉에게(初秋夜坐贈呉武陵)
양백화(楊白花)
염계(冉溪)
시냇가에 사노라니(溪居)
초여름에 비 내린 뒤 우계를 찾아(夏初雨後尋愚溪)
비가 내린 뒤 새벽에 혼자 우계 북쪽의 연못으로 가서(雨後曉行獨至愚溪北池)
비가 갠 뒤에 강나루로 갔더니(雨晴至江渡)
아침에 산인 사씨를 데리고 우지로 가며(旦㩦謝山人至愚池)
유이십팔과 함께 형주자사 여씨를 위해 통곡하고 아울러 강릉의 이씨·원씨 두 시어사에게 부친다(同劉二十八哭呂衡州, 兼寄江陵李元二侍御)
남간에서(南磵中題)
황계로 들어가서 원숭이 소리를 듣고(入黃溪聞猿)
어사중승 최씨를 따라 소부 노씨의 시골집에 들러(從崔中丞過盧少府郊居)
새벽에 초사가 계시는 절로 가서 ≪묘법연화경≫을 읽고(晨詣超師院讀≪蓮經≫)
밤중에 일어나 서원을 바라보다 달이 뜨는 것을 보고(中夜起望西園値月上)
해석류를 막 심고(新植海石榴)
일찍 핀 매화(早梅)
매우(梅雨)
영릉의 초봄(零陵早春)
농가 1(田家 其一)
농가 2(田家 其二)
늙은 어부(漁翁)
여름밤에 너무 더워 서쪽 누각에 올라가서(夏夜苦熱登西樓)
혼자 잠 깨어(獨覺)
교외 집의 설(郊居歲首)
가을날 새벽에 남쪽 계곡으로 가다가 황폐한 마을을 지나며(秋曉行南谷經荒村)
여름낮에 우연히(夏晝偶作)
강가의 눈(江雪)
어명을 받고 도성으로 가는 도중 영릉의 친구들에게(詔追赴都回寄零陵親故)
형산을 지나가다 새 꽃이 핀 것을 보고 영주에 있는 동생에게(過衡山見新花開却寄弟)
멱라강에서 바람을 만나(汨羅遇風)
어명을 받고 도성으로 가는 도중 2월에 파정에 이르러(詔追赴都二月至㶚亭上)
상산의 길가에 외솔이 있는데 사람들이 오며 가며 베어서 관솔로 삼는지라 호사가가 그것을 가련하게 여겨서 대를 엮어 울타리를 만들어 줌으로써 그것이 잘 자라게 해 놓았기에 느낀 바가 있어서 시를 짓는다(商山臨路有孤松, 往來斫以爲明, 好事者憐之, 編竹成援, 遂其生植, 感而賦詩)
형양에서 유몽득과 작별하며(衡陽與夢得分路贈别)
다시 유몽득과 작별하며(重别夢得)
다시 상강을 거슬러 오르며(再上湘江)
영남 지방에서 강을 따라가며(嶺南江行)
유주 성루에 올라서 장주·정주·봉주·연주 등 네 고을의 자사에게(登柳州城樓寄漳汀封連四州)
유주의 동족 백성(柳州峒氓)
유주의 2월에 용수 잎이 다 졌기에(柳州二月榕葉落盡偶題)
동생 종일과 작별하고(别舎弟宗一)
유주의 아산에 올라(登柳州峨山)
형주자사 노씨의 편지를 받았기에 시를 부친다(得盧衡州書因以詩寄)
호초상인과 함께 산을 바라보며 서울에 있는 친구에게 부친다(與浩初上人同看山寄京華親故)
유주성 서북쪽 모퉁이에 홍귤나무를 심고((柳州城西北隅種甘樹)
버드나무를 심고 나서 장난삼아 짓는다(種柳戱題)
목곡화를 심고 나서(種木槲花)
시랑 조씨가 상현을 지나가다 부쳐 보낸 시에 화답해(詶曹侍郎過象縣見寄)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새장 속의 매
찬 바람이 솨솨 불어 된서리가 날릴 때
푸른 매가 치고 올라가 새벽빛 속에 날았으리.
구름을 헤치고 안개를 뚫고 무지개를 끊으며
번개에 이어 벼락이 치듯 언덕을 스쳐 갔으리.
휙 하고 튼튼한 깃으로 가시나무를 자르고
내려가 여우와 토끼를 잡아 하늘로 솟았으리.
발톱의 털과 부리의 피에 온갖 새들 달아난 뒤
홀로 서서 두리번거리다 때로 격앙했으리.
뜨거운 바람과 무더위가 홀연 닥쳐왔을 때
날개가 떨어져 나가고 스스로 상처를 입었네.
풀밭의 살쾡이와 쥐에게 물릴까 벌벌 떨면서
하룻저녁에 열 번 돌아보며 놀라고 걱정하네.
청상의 계절이 다시 힘이 되어 주어
온갖 장애 다 없애고 구름 속에 날기만 바라네.
籠鷹詞
凄風淅瀝飛嚴霜
蒼鷹上擊翻曙光
雲披霧裂虹蜺斷
霹靂掣電捎平岡
砉然勁翮剪荆棘
下攫狐兎騰蒼茫
爪毛吻血百鳥逝
獨立四顧時激昻
炎風溽暑忽然至
羽翼脱落自摧藏
草中狸鼠足爲患
一夕十顧驚且傷
但願清商復爲假
拔去萬累雲間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