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 천줄읽기>는 오리지널 고전에 대한 통찰의 책읽기입니다. 전문가가 원전에서 핵심 내용만 뽑아내는 발췌 방식입니다.
량치차오는 격동의 중국 근대 전환기에 끊임없이 시대를 주도하며 유신파(維新派) 계몽주의 지식인의 대표 이론가이자 실천가 역할을 수행했다. 19세기에 들어서며 내적으로 극심한 체제 이완과 외적으로 서구로부터의 충격이라는 총체적 위기 상황에 처한 중국의 지식인들은 적극적으로 생존과 구국을 위한 변화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특히 19세기 말엽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멸망의 위기로 치닫는 격심한 변화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며 정치·사상적 대응 논리를 정립했고, 그에 부응해 문화 전반에서도 새로운 기풍을 일으켰다. 1880∼1890년대 가장 중요한 진보 정치 세력이자 지식인 집단은 바로 캉유웨이(康有爲)·량치차오 사제(師弟)를 비롯한 유신파 계몽주의 지식인들이었다. 이들은 갈수록 심각해지는 위기 속에서 수구파(守舊派)의 낙후성과 양무파(洋務派)·중체서용(中體西用)의 한계를 인식하고, 사회 변혁·경세치용(經世致用)의 경향에서 보다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특히 청일전쟁의 실패를 계기로 그러한 인식을 더욱 강화하며 일종의 개량주의적·계몽주의적 사회 사조(社會思潮)를 형성했다.
이러한 사조의 핵심 인물인 량치차오는 학술 사상적으로 경세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금문공양학(今文公羊學) 기반 위에 사회 진화론·민족주의·계몽주의를 비롯한 근대 서구 사상을 적극 수용해 그 개혁 운동의 중요한 근원으로 삼고, 봉건 왕조의 법제와 사회를 개량할 것을 주장했다. 특히 서구 제국을 모델로 삼아 과학 기술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 각 분야에서 총체적으로 개혁을 추진해 부강한 민족 국가를 건립하자고 역설했다.
그러나 당시 량치차오를 중심으로 추진된 개혁은 결국 민중으로부터 개혁을 이끌어 내는 데 이르지 못하고 끝내 수구파에 의해 좌절했다. 1898년 무술정변(戊戌政變)으로 변법유신(變法維新)이 실패로 끝나자 량치차오는 일본으로 망명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후 그는 오히려 정치적 실패를 교훈 삼아 국민 개혁을 위해 학술·사상 및 문화 전반에 걸쳐 계몽 운동을 전개해 당시에 이미 커다란 호응을 얻은 것은 물론이고 현대에까지 계속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시대 요구에 대응하고 시대를 이끌어 나간 량치차오의 초인적인 역량은 문사철(文史哲)을 중심으로 한 학술 연구에 기반을 두었다. 그의 학문 활동은 문학·역사·철학·정치학·경제학·사회학·교육학 등등 수많은 분야를 망라했고, ‘세계 제일의 박학가(博學家)’니 ‘저술가의 제일인자’니 하는 평가에 명실상부하게 다양한 방면의 깊이 있는 연구 성과를 방대한 저술 속에 담아내어 ≪음빙실전집(飮冰室專集)≫·≪음빙실문집(飮冰室文集)≫[합해서 ≪음빙실합집(飮冰室合集)≫]으로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인구에 회자되는 대표적인 작품들을 골라 맛만이라도 볼 수 있게 했다.
량치차오의 학문 활동이 매우 다양한 분야를 망라하고, 백과사전식의 연구와 저술로 말미암아 역량이 분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 학술계 전 분야에서 그의 지위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근대 학술계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룩한 인물로는 그 외에도 스승인 캉유웨이(康有爲)와 왕카이윈(王闓運)·랴오핑(廖平)·류스페이(劉師培)·장타이옌(章太炎) 등을 꼽을 수 있지만, 문사철은 물론이고 정치·경제 등 분야까지 종합해서 본다면, 모두 량치차오를 능가하지 못한다. 문학 분야에서도 물론 량치차오의 앞뒤로 콩쯔전(龔自珍)·황쭌셴(黃遵憲)과 후스(胡適)가 있어, 기풍을 열고 집대성한 공을 세웠다고 하지만, 민중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 널리 실질적인 기반을 닦아 놓은 량치차오의 역할은 더욱 중대한 것으로 여겨진다.
200자평
무술변법의 주인공 량치차오. 그의 계몽 사상과 학술·문학계의 혁신 노력은 중국뿐 아니라 조선의 지식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사상을 잘 드러낸 글들을 뽑아 옮겼다. 서구 문명 수용을 제창하고 애국 계몽사상을 고취하는 글에서 열강의 유린에 직면한 조국을 지키려는 동아시아 지식인의 고뇌를 느낄 수 있다.
지은이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는 자(字)가 탁여(卓如), 호(號)는 임공(任公)이며, 필명(筆名)은 음빙실주인(飮冰室主人)·음빙자(飮冰子)·만수실주인(曼殊室主人)·신민자(新民子)·소년중국지소년(少年中國之少年) 등등이다. 서구 열강의 침략과 대항의 최전방 지역이었던 광둥성(廣東省) 신후이(新會) 사람으로, 반경반독(半耕半讀)의 향신(鄕紳) 가정에서 태어났다. 동치(同治) 12년(1873), 즉 아편전쟁이 일어난 지 33년 뒤, 태평천국의 난이 평정된 지 10년 뒤, 서구의 충격이 한창 중국으로 물밀듯이 거세게 쳐들어오던 시기였다.
량치차오는 중국 역사상 그 어느 시기보다 중요한 근대 전환기를 살면서 끊임없이 시대를 이끌어 간 대표적 지식인이었다. 신문·잡지 및 교육을 기반으로 변법유신(變法維新)을 도모하고, 근대화된 서구 문명을 선전함으로써 폐쇄되었던 근대 중국에 새로운 개혁의 기풍을 일으켰으며, 특히 탁월한 계몽주의 사상가·정치가·언론인·교육자·문학가로서 중국 문화사(文化史)에서 절대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일반적으로 량치차오의 생애는 크게 수학(修學) 시기(1873∼1894), 유신 운동과 계몽 활동 시기(1895∼1903), 입헌 추진과 정치 재개 시기(1904∼1917) 그리고 강학(講學)과 저술 시기(1918∼1929) 등 네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의 인생 역정은 한마디로 중국의 근대화를 위한 투쟁의 역사였다. 정계에서 은퇴한 1917년 무렵까지는 주로 정치가로서 학술 활동을 병행하면서 자신이 말한 학자의 임무인 ‘세상을 깨우쳐야 한다(覺世)’는 사명감 아래 근대 중국의 신문화(新文化) 창도자·실천자로서 소임을 충실히 수행했으며, 1918년 이후로는 학술 연구에 전념하면서 ‘세상에 전하고자 하는(傳世)’ 전통문화의 수호자로서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도 그 변화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도록 1918년 이후의 작품도 일부 실었다.
옮긴이
최형욱(崔亨旭)은 1962년 서울에서 태어나 한양대 중문과를 졸업하고, 1988년 타이완 국립정치대학 대학원에서 <청대 양호파의 원류 및 그 문학 이론 연구(淸代陽湖派的源流及其文學理論硏究)>라는 논문으로 문학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연세대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마치고, 1996년 <량치차오의 문학 혁명론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4년부터 한양대, 연세대 등에서 시간 강사를 역임하고, 1998년부터 2000년까지 경동대 전임 강사를 거쳐 현재 한양대 중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6년 여름부터 1년간 방문학자로서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 캠퍼스 중국학센터에서 연구한 바 있다. 주요 논문 및 저역서로 <조선의 량치차오 수용과 량치차오의 조선에 대한 인식>, <량치차오의 중국 국민성론 및 조선 국민성 비판 탐구>, <중국 근대의 계몽주의 문학 사조>, <량치차오의 시계 혁명론이 개화기 한국 시론에 미친 영향>, <량치차오의 추풍단등곡(秋風斷藤曲) 탐구>, <한중 전통문화 관련 디지털 인문 콘텐츠 실태 비교 및 수준 향상 방안 연구>, ≪신편 명심보감≫, ≪량치차오, 조선의 망국을 기록하다≫ 등이 있다.
역자는 평소 중국의 근현대 문학 이론, 근현대 한중 사상·문학 비교, 특히 중국 근대 문학과 현대 문학의 연계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대체로 1910년대 후반, 즉 5·4 운동 무렵을 기점으로 보는 중국 현대 문학사는 왕왕 이전의 장구한 중국 문학이나 역사와 단절시켜 논의하는 경향이 있다.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전통은 계승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루쉰(魯迅, 1881∼1936) 이전에는 마치 문학이 없다시피 한 것으로 보이게 했다. 중국 근현대 문학의 발전 양상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또 그 가운데서 이전 문학과 연계된 흐름을 이해한다면, 중국 문학 특히 근현대 문학 연구에 새로운 시야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연구에 임하고 있다.
또한 중국 근현대 문학 및 사상에 대한 연구는 그 자체로서뿐만 아니라 이 시기 우리 문학과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도 상당한 연구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다. 근현대 사회로 접어들면서 전통적인 관념들이 왜, 어떻게 새로운 방향으로 변화해 갔는가, 문학을 비롯한 서구 문명이 밀려들어 중국과 충돌하고 또 융화되면서 어떤 양상을 보였는지 등에 관한 많은 문제는 우리나라의 경우와 비교해서도 큰 관심을 갖게 한다. 즉, 우리나라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근대화 시기에 서구 열강 및 일본의 침탈을 겪음으로써, 부득이 우리의 본모습을 잃고 커다란 곤혹과 수모를 치르며 파행적인 근대화의 과정을 겪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근대화에서도 서구적 근대화에 대한 저항과 수용이 중요한 문제 중 하나였으며, 이로 인해 중국과 유사한 모습들이 보였다. 때문에 본서의 작업을 포함한 역자의 연구 과제들은 중국 근현대 문학 및 사상의 형성·연계와 그 본질을 살피는 데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에 대한 이해를 통해 또 다른 각도에서 중국과 우리나라 및 세계의 근현대 문화와 사회를 이해하는 기반을 만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변법에 대해 두루 논의함(變法通議)
남의 나라를 멸망시키는 새로운 법(滅國新法論)
조선 멸망의 원인(朝鮮滅亡之原因)
중국이 허약해진 근원을 논함(中國積弱遡源論)
국민에게 필요한 10대 원기를 논함(國民十大元氣論)
서로 반대가 되고 동시에 보완해 주는 열 가지 덕성(十種德性相反相成義)
과도기론(過渡時代論)
방관자를 꾸짖노라(呵旁觀者文)
신민설(新民說)
≪중국의 무사도≫ 서문(≪中國之武士道≫自敍)
음빙실자유서(飮冰室自由書)
‘이룰 수 없음을 알면서도 하는’ 주의와 ‘하되 가지지 않는’ 주의(知不可而爲主義與爲而不有主義)
학문하기와 사람 되기(爲學與做人)
학문의 취미(學問之趣味)
학문 연구에 관해(治國學雜話)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1
그러므로 옛날에 남의 나라를 멸함에는 쳐서 정벌하는 것으로 멸했는데, 지금 남의 나라를 멸함에는 가엾게 여기고 따뜻하게 해 주는 것으로 멸한다. 옛날에 남의 나라를 멸할 때에는 갑작스럽게 했는데 지금 남의 나라를 멸할 때에는 점진적으로 한다. 옛날에 남의 나라를 멸함에는 드러나게 했는데 지금 남의 나라를 멸함에는 은밀하게 한다. 옛날에 남의 나라를 멸함에는 그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알아서 대비하게 했는데 지금 남의 나라를 멸함에는 그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친해져서 끌어당기게 한다. 옛날에 남의 나라를 멸하는 자는 호랑이나 이리 같았는데 지금 남의 나라를 멸하는 자는 여우나 살쾡이와 같다. 통상으로 멸하기도 하고, 빚을 놓는 방법으로 멸하기도 하고, 군사를 대신 훈련시켜 주다가 멸하기도 하고, 고문을 두었다가 멸하기도 하고, 도로를 뚫어 주고 멸하기도 하고, 당쟁을 부채질해 멸하기도 하고, 내란을 평정해 멸하기도 하고, 혁명을 도와주어 멸하기도 한다. 그 나라의 정화가 이미 고갈되어 기회가 익으면 일거에 그 국명을 바꾸고 그 지도의 색깔을 바꾼다. 그 나라의 정화가 아직 고갈되지 않아 기회가 익지 않으면 비록 그 나라의 이름을 이어 가고 그 지도 색깔을 그대로 두더라도 백 몇 십 년 후에는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아! 서구 열강으로서 이런 새로운 법을 약소국에 시행하는 나라가 몇 나라인지도 모르겠다. 이 말을 믿지 못하겠는가?
2
대체로 전 세계에서 개인주의가 가장 발달한 나라로는 조선이 그 으뜸이다[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조선 사람들은 말하기를 아주 좋아한다. 두세 사람이 서로 만나면 하루 종일 이야기로 날을 보낸다. 외국 사람으로 조선인의 성격을 조금 아는 자는 말하기를, “조선 사람이 하는 말은 하나도 충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없다”라고 한다[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조선 사람은 화를 잘 내고 일을 만들기를 좋아한다. 한번 모욕을 당하면 곧 팔을 걷어붙이고 일어난다. 그러나 그 성냄은 얼마 안 가서 그치고 만다. 한번 그치면 곧 이미 죽은 뱀처럼 건드려도 움직이지 않는다[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조선 사람은 미래에 대한 관념이 매우 박약하다. 서민들은 한번 배부르면 서로 삼삼오오 짝을 지어 차를 달이며 나무 그늘에서 쉬면서 한담으로 날을 보낸다. 내일은 또 어떻게 먹을 것을 구할까 하는 생계 문제를 계획하지 않으니, 태곳적 복희씨 시대 사람들처럼 한가로이 얽매임이 없다. 벼슬하는 사람들도 또한 그러하다. 다만 오늘 벼슬을 하고 권세가 있으면 내일 나라가 망하더라도 본래 상관할 바가 아니다.
3
넷째, ‘소매파(笑罵派)’, 즉 비웃고 욕이나 하는 파다. 이 파의 사람들은 방관파라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후관파(後觀派)’, 즉 뒤에서 구경하는 파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그들은 늘 남의 등 뒤에 서서 비꼬는 말이나 욕설로 남을 비평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저들은 단지 스스로가 방관자일 뿐 아니라 또 남들로 하여금 방관자가 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저들은 수구(守舊)를 욕하고, 또 유신(維新)을 욕한다. 소인배를 욕하고, 또 군자도 욕한다. 노인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무기력이 이미 깊음을 욕하고, 청년들에 대해서는 경솔하게 일을 많이 벌인다고 욕한다. 일이 성공하면 보잘것없는 놈이 요행히 공을 세웠다고 말하고, 일이 실패하면 내가 진즉에 알았다고 말한다. 저들은 늘 지적할 수 없는 입장에 스스로 서 있으니 무엇 때문인가? 일을 하지 않는 까닭에 지적할 수 없고, 방관하고 있으니 지적할 수 없다. 자기는 일도 하지 않으면서 일을 하는 사람 뒤에 서서 자기와 다른 이를 배척해 비웃고 공격한다. 이것은 가장 교활한 술수로, 용기 있는 자로 하여금 기가 꺾이게 하고 겁쟁이로 하여금 절망하게 한다. 단지 사람들로 하여금 절망하게 하고 기가 꺾이게 할 뿐 아니라, 장차 이루어질 일에 대해서도 저들은 비웃고 욕하고 가로막는다. 이미 이루어진 일에 대해서도 저들은 비웃고 욕하고 망가뜨린다. 그러므로 저들은 세상의 음험한 자들이다.
4
나는 취미에 속하는 것들은 모두 다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떠해야 ‘취미’라고 할 수 있는지는 설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일이든 해 나갈 때 취미와 상반되는 결과를 낳지 않을 수 있는 것, 그것이 곧 취미의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라고 나는 말합니다. 그렇다면 돈내기하는 게 취미가 될까요? 지면 어쩌죠? 술 마시기가 취미가 될까요? 그러다 병나면 어쩌죠? 관리가 되는 게 취미가 되나요? 자리가 없으면 어쩌죠? (…) 어떤 것들은 비록 짧은 시간 내에는 취미가 되는 것 같지만, 결국 속담에서 말하는 “불행이 한꺼번에 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으므로, 그것들을 취미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무릇 취미의 성질은 결국 취미로 시작해 취미로 끝나야 합니다. 따라서 취미의 주체가 될 수 있는 항목은, 첫째 노동, 둘째 유희, 셋째 예술, 넷째 학문 등입니다. 여러분은 나의 이 말을 들으시고 내가 도덕관념에 따라 취미를 선택한 것으로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는 도덕적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는지 없는지를 따지는 것입니다. 나는 결코 도박이 부도덕해서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도박이 본질적으로 재미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으며, 재미없는 결과는 나의 취미주의를 망가뜨리기 때문에 도박을 배척합니다. 나는 결코 학문이 도덕적이기 때문에 학문을 제창하는 것이 아닙니다. 학문의 본질은 충분히 취미로 시작해 취미로 마칠 수 있는 것으로, 나의 취미주의 조건에 가장 부합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학문을 제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