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평론선집’은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공동 기획했습니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는 한국 근현대 평론을 대표하는 주요 평론가 50명을 엄선하고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를 엮은이와 해설자로 추천했습니다. 작고 작가의 선집은 초판본의 표기를 살렸습니다.
이광수는 소설 65편 외에도 350여 편에 달하는 논설과 평론을 쓴 걸출한 논객이자 근대 비평의 선구자였다. 소설사의 궤적이 워낙 선명하기 때문에 그 외의 글들은 부산물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문명사적 전환기의 다양한 지적 문화 풍조의 세례를 받은 문제적 개인이자 이를 독자적인 예술론과 문학론으로 체계화한 시대의 석학이었다.
이광수가 문학론 성격의 글을 발표하기 시작한 1910년대는 ‘비평’이나 ‘평론’의 개념이 명확히 확립되기 전이었다. 이때 그는 비평이나 평론이 문예 글을 일차 텍스트로 삼아 비판하는 메타 장르라는 인식을 드러냄으로써 이를 다른 장르와 구별하고자 했다.
1916년 발표한 <문학이란 하오>에서는 비평과 평론이 논문의 하위 범주로서 문학 텍스트를 전문적으로 평가하는 활동을 의미한다는 점을 부각한다. 이후 점차 문예비평적 글쓰기를 지칭하는 분류 체계가 따로 설정되면서 1920년대 초 문예 동인지에는 비평적 성격을 지니는 산문을 지칭하는 용어로 ‘평론’ 또는 ‘비평’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문학에 뜻을 두는 이에게>(1922)와 <조선 문단의 현상과 장래>(1925)에서 그는 평론이 창작에 못지않은 중요한 가치임을 밝히고 비평을 다른 문예 영역에서 분리해 독립된 활동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을 구체화하며, 비평가에게 ‘문예’라는 분화된 영역에서 활동하는 전문가로서의 독립적 위상을 부여한다.
춘원 이광수의 사상적 기반은 개인의 감정 계발과 인격 수양, 그리고 계몽적 공리주의라는 주춧돌 위에서 다져진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이것은 한국 근대문학의 존재론을 모색하는 원론적인 질문으로, 그의 문학론과 비평관은 평론의 개념조차 미비하던 근대 초기 한국문학계에 선구적 혜안을 제시했다. 평론가로서 이광수는 문학의 개념을 정의하고 문학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보장할 것을 주장했으며 인생과 사회에 대한 효용성을 강조함으로써 근대성 획득의 도구로서 문학의 역할과 필요성에 주목했다. 그는 개별 평론 작업에 앞서 평론을 하는 기준을 수립하고 올바른 평론의 방향을 실천적으로 모색했다. 물론 이 때문에 그의 비평은 실제 작품 분석과 유리된 관념적 성격이 짙고 선동적인 차원에 머물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광수의 선구적 저작들은 평론 장르의 발전과 정착을 위한 출발점이 되었다. 이것이 역사적 공과와 무관하게 한국 근대문학과 민족문학의 원점으로 이광수라는 존재가 수성(守成)한 변치 않는 가치다.
200자평
근대문학사의 첫머리에 자리매김하고 있는 춘원 이광수. 소설가가 아닌 평론가 이광수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평론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비전문적 판단이 횡행하던 1910년대 조선에서 문학과 비평에 대한 선구적 혜안을 제시했다.
지은이
이광수(1892∼1950)는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춘원(春園) 이광수는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보경(寶鏡)이고, 작가이자 문학평론가, 사상가이자 기자, 논객으로 활동하며 고주(孤舟), 외배, 올보리, 장백산인(長白山人), 춘원생, Y생 등의 필명을 썼다.
이광수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1905년 일진회(一進會) 유학생으로 도일해 일본 와세다 대학 문학과와 철학과에서 수학하면서 신학문을 접하게 된다. 홍명희·최남선 등과 교류하고 톨스토이·바이런 등의 외국 사상가의 저서를 읽으면서 세계를 향해 시야를 넓혀 가던 이 시절은 그가 한국 근대문학의 기틀을 닦는 사상적 자양분을 마음껏 흡수할 수 있던 시기였다. 이때 발표한 <문학이란 하오>는 한국 근대문학의 범주와 방향을 제시한 본격적인 근대문학론이라 할 수 있다. 이광수는 1909년 첫 작품 <사랑인가>를 발표한 이후 <어린 벗에게>, <윤광호>, <소년의 비애> 등의 소설을 통해 자유연애를 옹호하고 기성의 도덕을 부정하는 진보적 사상을 고취했다. 특히 1919년 학비 보조를 위해 ≪매일신보≫에 연재하기 시작한 ≪무정≫은 계몽주의적 자유연애론과 근대적 자아의 각성 문제를 다룸으로써 인습에 반기를 들고 신문명의 기치를 든 청년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 냈다.
소설뿐 아니라 시와 논설, 평론 등을 발표해 사상가로서 초석을 닦고 있던 이광수는 이미 재일 유학생 사회에서 저명인사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였다. 이에 따라 그는 자연스럽게 유학생 활동에 앞장서면서 1919년 ‘2·8독립선언서’의 초안을 작성하는 일을 맡게 된다. 이후 상하이로 탈출해 그곳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주간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여기서 그는 도산 안창호를 만나고 그의 사상에 깊이 감화되어 그를 ‘아비’로 칭하고 평생에 걸쳐 존경심을 표한다.
1921년 귀국한 즉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지만 춘원의 후원자인 아베 요시이에(阿部充家)의 도움을 받아 불기소처분을 받아 풀려난 뒤로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낸다. 1921년 ≪개벽≫에 조선 민족의 민족성을 개조하자는 내용을 골조로 하는 <민족 개조론>을 연재해 조선 사회에 엄청난 반향과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춘원의 집과 개벽사가 습격당할 만큼 거센 반발이 있었지만 그의 입장에서 이 논설은 돌출되거나 변질된 사상이 아니라 그가 일관되게 주장해 온 민족 개조론과 실력 양성론을 실천적으로 구체화한 글이라 할 수 있다.
1924년 ≪동아일보≫에 발표한 소설 ≪재생≫은 문학사적 의의 외에도 이광수가 본명을 사용한 첫 소설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이를 계기로 춘원은 10여 년간 가장 왕성한 문학 활동을 펼치면서 문단의 중심에 서게 되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그는 순문예지 ≪조선 문단≫의 주재로 활동했고, ≪혁명가의 아내≫, ≪사랑의 다각형≫, ≪삼봉이네 집≫에 이르는 ≪군상≫ 3부작과 역사소설 ≪단종애사≫, ≪마의태자≫ 등의 작품을 발표했을 뿐 아니라 ≪흙≫(1932), ≪유정≫(1933) 등의 대표작을 남겼다. 특히 ≪흙≫은 그가 조직한 흥사단의 국내판 수양동우회와 ≪동아일보≫ 편집국장 신분으로 전개한 ‘브나로드 운동’의 방편으로 쓰인 농촌계몽소설이다. 1938년에 발표한 전작 소설 ≪사랑≫에는 아들의 죽음, 도산의 죽음, 수감 생활로 이어지는 일련의 고통스러운 사건을 거친 후 종교적 세계에 안주하려는 춘원의 현실 초극 의식이 잘 드러나 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은 이광수에게 변절의 오명을 덧씌운 결정적 계기가 되는데, 이 사건 이후 그는 “천만 동포를 천황의 독자로 만드는 데 여생을 바치겠다”는 맹세에 따라 친일 행각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그는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로 창씨개명을 하고, 황국 위문 작가단을 결성하고, 친일 단체인 조선문인협회 초대 회장으로 앞장서 내선일체 구현을 강조하는 일본어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후에 이 모든 행위가 조선 민족을 보호하기 위한 타협책이었다고 변명하기도 했으나 광복 후 반민특위에 의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이때 이미 폐병과 결핵으로 온몸이 만신창이 상태였던 이광수는 아들의 탄원 덕분에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불행히도 1950년 납북된 후 그의 마지막 모습은 확인할 수 없으나, 평양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자강도 고개동에서 사망, 모처에 매장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광수의 삶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해방에 이르는 역사의 파고 가운데 민족의 운명과 더불어 부침을 겪었다. 그는 문사(文士)이자 지사(志士)로 공론의 장에 참여해 목소리를 높이면서 역사 속으로 자신의 삶을 투항했다. 비록 친일의 낙인이 찍힌 ‘흠 많은’ 우리 문학의 아버지일지언정, 이광수의 삶과 문학에는 우리 근대사의 공과가 그대로 새겨져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엮은이
임정연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1920년대 연애 담론 연구−지식인의 식민성을 중심으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은 1920년대 ‘연애’의 공론화 과정을 추적하고 연애 서사를 분석해 ‘연애’가 배타적인 독서 경험을 통해 구성된 지식인의 특권적 소통 형식이라는 점을 규명한 것이다.
그 연장 선상에서 지식인의 집단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심리적 기저를 밝히기 위해 ‘지식’과 ‘문화’를 의제로 일제강점기 문화 담론의 근대성과 식민성에 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아울러 젠더적 시각에서 문학 텍스트를 읽는 일과 한국문학의 감수성이 형성되는 과정을 통해 한국 낭만주의문학의 계보를 밝히는 작업에도 관심을 두고 후속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논문으로는 <근대 젠더 담론과 ‘아내’라는 표상>, <임노월 문학의 악마성과 탈근대성 연구>, <여성 연애 소설의 양가적 욕망과 딜레마>, <근대소설의 낭만적 감수성−나도향과 노자영의 소설을 중심으로>, <여성 문학과 술/담배의 기호론>, <청춘의 표상과 감성의 정치−해방기 이봉구 소설을 중심으로>, <1950∼80년대 여성 여행 서사에 나타난 이국 체험과 장소 감수성>, <김유정 자기 서사의 말하기 방식과 슬픔의 윤리>, <1930년대 초 소설에 나타난 연애의 모럴과 감수성> 등이 있으며, 엮은 책으로는 ≪임노월 작품집≫, ≪방인근 작품집≫, ≪지하련 작품집≫, ≪노자영 시선≫이 있고, 공저로는 ≪한국어문학 여성 주제어 사전≫ 1∼5권이 있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에 재직 중이다.
차례
婚姻에 對한 管見
婚姻論
子女 中心論
문학이란 何오
文士와 修養
藝術과 人生−新世界와 朝鮮 民族의 使命
朝鮮 文學의 槪念
余의 作家的 態度
톨스토-이의 人生觀−그 宗敎와 藝術
해설
이광수는
엮은이 임정연은
책속으로
今日 所謂 文學이라 함은 西洋人이 使用하는 文學이라는 語義를 取함이니 西洋의 Literatur 或은 Literature라는 語를 文學이라는 語로 翻譯하얏다 함이 適當하다. 故로 文學이라는 語는 在來의 文學으로의 文學이 아니오 西洋語에 文學이라는 語義를 表하는 者로의 文學이라 할지라. 前에도 言하얏거니와 如此히 語同意異한 新語가 多하니 注意할 바이니라.
―<문학이란 何오>
나는 일즉 文士로 自處하기를 질겨 한 일이 없엇다. 내가 ≪無情≫, ≪開拓者≫를 쓴 것이나 ≪再生≫, ≪革命家의 안해≫를 쓴 것이나 文學的 作品을 쓴다는 意識으로 썻다는 것보다는 대개가 論文 代身으로 내가 보는 當時 朝鮮의 中心 階級의 實狀−그의 理想과 現實의 乖戾, 그의 모든 弱點을 如實하게 그려 내어서 讀者의 鑑戒나 感奮의 材料를 삼을 兼 朝鮮語 文의 發達에 一刺激을 주고 될 수 잇으면 청년의 文學慾에 不健全치 아니한 讀物을 提供하자−이를테면 이 政治 알에서 自由로 同胞에게 通情할 수 없는 心懷의 一部分을 말하는 方便으로 小說의 붓을 든 것이다. 그럼으로 小說을 쓰는 것은 나의 一餘技다. 나는 只今도 文士는 아니다.
―<余의 作家的 態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