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초판본 한국 근현대소설 100선’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구체적인 현장성을 담지 못했던 여타의 지식인 카프 작가들과 달리, 이북명은 ‘흥남질소비료공장’에서의 직공 생활을 바탕으로 열악한 작업 환경과 산업재해 문제, 그리고 그에 대응하는 노동자들의 모습 등을 현실성 있게 표현해 ‘조선 최초의 노동자 작가’로 불렸다.
그의 공장 배경 소설에서 나타나는 열악한 작업 현장의 모습은 그러한 억압적 노동을 강요하는 자본가와의 대립 구도를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거기에 더해 소설 속에서는 자본가뿐 아니라 그 자본가의 논리를 현장에서 관철하는 하급 관리인 감독도 일본인이다. 따라서 당시 식민지 노동자의 현실이 계급 모순과 함께 민족 모순이라는 이중 모순의 질곡 속에 놓여 있었음이 드러난다.
이북명은 초기의 공장 소설을 거쳐 도시 빈민과 소시민의 모습을 그리기도 하고, 일제 말에는 친일 요소가 나타나는 작품을 내놓기도 한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는 다시 초기의 공장 소설과 연계된 작품을 쓰는데, 이때는 당시의 북측의 사회 상황에 맞춰 수령을 중심으로 한 당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해방 이후 북측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발표한 작품들은 ‘북한 문학사의 전개 과정에 그대로 대응되는 것’으로 평가받지만, 남측에서는 이에 대한 논의가 많지 않다.
여기서는 이북명의 초기 공장 소설인 <질소비료공장>(1932), <암모니아 탕크>(1932), <여공>(1933), <민보의 생활표>(1935)와, 이와는 조금 다른 작품 세계를 보여주는 <답싸리>(1937), 그리고 친일적 요소를 보이는 <빙원>(1942) 등을 통해 해방 이전의 이북명의 작품 세계를 살펴본다.
200자평
조선 최초의 노동자 작가 이북명의 공장 소설들을 소개한다. 식민지 노동자의 암울한 삶을 생생한 현실감으로 드러낸다. 자본가와 노동자, 일제와 조선의 이중 대립 구도를 볼 수 있다. 문학사적으로 더 의의가 큰 해방 이전의 작품을 통해 그의 작품 세계를 깊이 살펴본다.
지은이
이북명(李北鳴, 1910∼1988)은 주로 1930년대에 작품을 발표하고 해방 이후에는 북측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남측에는 그 행적이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은 작가 중 한 명으로서 그의 생몰 연대조차 불명확했다. 그동안 연구자들은 그가 남긴 자전적인 요소가 강한 글들과 지인들의 기록 등을 바탕으로 그의 행적을 추적해 왔는데, 1999년에 북측의 사회과학원에서 ≪문학대사전≫(총5권)을 펴냄으로써 이북명의 전반적인 행적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간의 연구와 ≪문학대사전≫의 내용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이북명[본명 순익(淳翼)]은 1910년 9월 18일에 함경남도 함흥의 사무원 가정에서 태어났다. 1927년에 함흥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흥남질소비료공장에 취직한 후 공장 ‘친목회’ 사건으로 경찰에 체포되기까지 3년간 근무했다. 그 후 한설야와 경성에서 잡지 편집을 했고, 흥남에서 서적상을 하기도 한다. 1937년부터 장진강 수전공사장에 근무하면서 1945년 해방을 맞이하여, 장진강 발전소 노동자들과 함께 발전소 보위에 나섰으며 그 후 장진강 발전부 ‘전로조합’ 선전부장으로 일했다. 1948년에 북로당 중앙위원이 되고, 함경남도 인민위원회 문화선전과에서 일했다. 1949년에 중앙당학교 6개월반을 졸업하고 중앙당 과장을 역임했다. 그는 6·25전쟁이 일어나자 문화공작대 성원으로 충청북도에 파견되었으며, 그 후 중앙당학교를 다시 졸업하고 당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부부장을 지냈다. 1956년에 노동당 중앙위 후보위원, 조선작가동맹 부위원장 겸 상무위원을 지냈다. 1961년에는 조국 평통위 위원을 거쳐 1967년에는 조선작가동맹 중앙위 부위원장직을 맡은 바 있다. 그는 생의 말년에 금성청년출판사 창작실에서 현역 작가로 활동하다가 1988년에 병으로 사망했다.
이북명은 공장 체험을 바탕으로 여러 작품을 창작해 ‘최초의 노동자 작가’라 불리기도 했으며, ‘카프’의 방향 전환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등단작인 <질소비료공장>(<조선일보>, 1932. 5. 29∼31)은 단 2회 연재된 후 중단되었지만, 같은 해에 <암모니아 탕크>, <기초공사장>, <출근정지> 등의 단편을 계속 발표했다. 이어서 <여공>(1933), <병든 사나이>(1934), <정반(正反)>(1934), <오전 3시>(1935), <민보의 생활표>(1935), <공장가>(1935) 등 공장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꾸준히 발표한다. 그러다가 1930년대 후반부터는 소재에 변화를 보여 공장 체험 이외의 내용을 다루기도 한다. <구제사업>, <현대의 서곡>, <요양원에서>, <도피행>, <암야행로>(이상 1936년) 등과 <아들>(1937), <연돌남>, <답싸리>(이상 1937년), <비곡(悲曲)>, <의학박사>(이상 1938년), <칠성암(七星岩)>, <야회>(이상 1939년) 등이 그것이다. 일제 말엽에 들어서는 작품 발표 빈도가 낮아지지만 계속되었다. <화전민>, <희비자(喜悲者)>(이상 1940년), <형제>, <빙원>(이상 1942년), <갑돌어미>(1944) 정도다. 그런데 이 작품들은 일제에 협력하는 내용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어서 친일 문학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해방 이후에는 북측에서 이른바 평화적 건설 시기의 노동 소설로 꼽히는<로동일가>(1947)를 발표했다. 그리고 장편 ≪당의 아들≫(1961), ≪등대≫(1975) 등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런데 해방 이후 재북 작가로서 창작한 작품들은, 노동계급의 혁명성에 대해 강조했던 식민지 시기의 작품들의 주제가 지속되면서도 ‘김일성 중심의 당파성’이라는 새로운 요소가 부가되었다고 지적되기도 한다.
또한 평론으로 <사실주의 절대기술>(1935), <주제의 적극성 기타>(1936), <공장 문학과 농민 문학>(1936), <문학 건설에 자(資)할 신제창(新提唱)>(1939), <자기비판과 소설의 순수성 파악>(1939) 등을 발표하기도 했다.
엮은이
이정선은 경원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경희대학교 대학원에서 <최인훈 소설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요즘은 조명희를 비롯해 구소련 지역 고려인의 문학을 탈식민주의적 관점에서 살피고 있다. 한반도의 상황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재외 한민족이 처한 다양한 상황과 문학작품을 통해서 일제 식민주의와 맞물린 우리의 근대를 새롭게 조망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차례
해설 ······················11
지은이에 대해 ··················22
질소비료공장(窒素肥料工場) ···`········27
암모니아 탕크 ··················39
여공(女工) ····················47
민보(閔甫)의 생활표(生活表) ····`·······71
답싸리 ·····················109
빙원(氷原) ···················155
엮은이에 대해 ··················191
책속으로
쇠 썩는 냄새 급도로 도라가는 긔계에서 타는 기름 냄새 거미줄 가튼 물색 칠한 파이프 짬으로 씨-씨- 하며 슴새여 나오는 암모니아 내가 서루 얼키여 마스크를 쓴 그들의 코를 잔침질한다. 눈독도 그리고 식욕까지를 빼아서 가는 고약한 냄새다. 뿐만 아니라 얼골이 노-래지고 기침을 컥컥 하게 된다. 게다가 콘크리-트 벽과 바닥이 흔들리는 요란한 모-터-와 푸로워-(送風機) 벨트의 소리에 신경은 극도로 과민해지고 가슴은 빈 구역이 치민다.
-33쪽
“이건 만치 못하다만 어머님께 듸려라.”
감독은 한 장의 지페를 정희의 손에 쥐여주엇다.
“그만두서요. 어머니가 알면 큰일 나요.”
정희는 내밀엇다.
“일 업다. 어데 돈 시려하는 사람이 잇겟니?”
감독은 억지로 정희의 손에다 쥐여주엇다. 동시에 감독은 정희의 히사시가미를 막 끌안엇다. 키쓰를 하자는 수작이엿다. 정희는 날사게 팩 도라서면서 감독의 손에서 빠젓다.
“웨 이 모양이오. 이런 썩은 돈으로 남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 당신네들이 하는 수작이오?”
정희는 쥐엇든 오 원자리 지페를 감독의 얼골에 내던지고 막 달녀 직장을 나왓다.
정희는 뒤에서 달녀 나가는 자기 등을 노려보면서 악마의 우슴을 띄우는 감독의 얼골을 보지 못하엿다.
-59~6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