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 ‘초판본 한국시문학선집’은 점점 사라져 가는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을 엮은이로 추천했다. 엮은이는 직접 작품을 선정하고 원전을 찾아냈으며 해설과 주석을 덧붙였다.
각 작품들은 초판본을 수정 없이 그대로 타이핑해서 실었다. 초판본을 구하지 못한 작품은 원전에 가장 근접한 것을 사용했다. 저본에 실린 표기를 그대로 살렸고, 오기가 분명한 경우만 바로잡았다. 단, 띄어쓰기는 읽기 편하게 현대의 표기법에 맞춰 고쳤다.
이하윤은 1926년 ≪시대일보≫에 시 <잃어버린 무덤>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온 이후 한국적 정서를 담은 서정적인 시편들을 발표하면서, 서양 문학을 국내에 소개하는 데 열정을 바쳤다. 이러한 그의 활동적 특징으로 인해서 그는 시인으로 평가되기보다는 외국 문학의 선구적인 소개자로 평가되는 경우가 많다. 설령 그가 문학인의 한 사람으로 정당하게 평가될 때조차도 그는 해외문학파나 시문학파라는 집단적인 평가의 한 부분으로 포함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공식적으로 출간된 이하윤의 창작 시집은 ≪물레방아≫ 단 한 권이다.
이하윤의 시편들은 대개 7·5조나 음수율이 두드러지는 2행시, 4행시가 지배적인 시형이고, 가요시의 경우는 4행이 지배적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이하윤의 시 세계와 시문학파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존재하는데, 시문학파가 언어에 대한 자의식이 강했고 감각의 쇄신이라는 측면에 관심을 집중했다면, 이하윤은 전통적인 가락에서 기원하는 민요적 율격과 애상적인 분위기가 잘 조화된 전통 서정시들을 다수 창작했다.
형식적인 규칙성과 음악적인 요소를 강조한 이하윤 시의 형식적 특징은 그가 118편의 가요시를 남겼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왜 그는 이토록 많은 가요시를 썼고, 7·5조나 2행시, 4행시를 즐겨 창작했던 것일까?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하윤이 7·5조류의 4행시 및 2행시 형식을 한국 시가의 전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것을 근대적 음악 형식에 접맥시킴으로써 한국시의 확장을 모색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인식은 문학사적인 진실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으나, 그는 유성기라는 새로운 매체의 등장 앞에서 전통적인 시 형식이 한국 시의 새로운 도약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유행가 가사를 창작할 때에도 문학적인 성취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내용적인 차원에서 이하윤의 시는 상실, 비애, 비관적인 현실 인식, 귀향, 고전적인 정감의 세계를 벗어나지 않았다. 이하윤의 시에는 하강적인 이미지들이 지배적인 요소로 등장한다. 그의 시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밤’, ‘어둠’, ‘눈’, ‘눈물’, ‘길의 상실’ 등은 모두 현실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하강적 이미지들이다. 인용한 시에서 ‘밤’은 시간적인 배경이면서 자아의 심리 상태를 지시하는 기호다. 그러므로 ‘별’이 없다는 것은 자아가 나아갈 방향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이 깊은 상실감이 ‘눈물’과 ‘울분’의 기원이다. 물론 이러한 현실적 고통과 절망이 식민지 현실에서 비롯된 것인지, 삶의 방향감각을 상실한 데서 오는 실존적인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것은 그가 활동했던 1920~1930년대의 문학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하윤의 시에서 현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과거에 대한 회상과 귀향 의식으로 이어진다. 현실 세계에서 긍정적인 가치를 발견하지 못할 때 인간은 대개 과거나 미래로 실존적 시간을 투사하기 마련인데, 이하윤에게 그것은 ‘고향’이라는 공간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이하윤의 시에서 ‘도시’는 ‘고향’의 반대 개념이며, 도시와 문명을 상징하는 모든 기호들은 어둠에 잠겨 있거나 우울과 처량한 마음만을 환기할 뿐이다. 이러한 시적 인식은 비록 낭만주의적인 감정의 표출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지만, 근대 초기에 시인들에게 도시 문명이 어떻게 경험되었는가를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200자평
이하윤은 서양 문학을 국내에 소개하는 데 열정을 바쳤고 당대 시인 중 가장 많은 가요를 지었다. 그리고 그리고 평생 단 한 권의 시집만을 출간했다. 그러나 그 한 권의 시집으로 우리 근현대시사에 우뚝 섰다.
민요적인 율격과 상실, 비애로 가득 찬 애상적인 분위기로 김소월의 뒤를 이어 전통 서정시의 길을 열었다.
지은이
이하윤(異河潤, 1906∼1974)은 1906년 4월 9일 강원도 이천(伊川)에서 아버지 종석(宗錫)과 어머니 이정순(李貞順) 사이에서 출생했다.
1918년 이천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년간 한문을 수학했고, 1923년 5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현재 경기고등학교) 신제(新制) 제4학년 수료, 1926년 3월 일본 도쿄 법정대학 예과에 입학하여 1929년 같은 대학 법정대학 법문학부 문학과(영어영문학 전공)를 졸업했다. 도쿄 유학 중 아테네·프랑세에서 2년간 프랑스어를, 도쿄 외국어학교 야간부에서 반년간 이탈리아어를, 도쿄제일외국어학원에서 반년간 독일어를 공부했다. 이하윤은 도쿄 유학 당시 홍재범, 김진섭 등과 문학적으로 교류했다.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이하윤이 처음 글을 발표한 것은 1923년 여름이다. 그는 여름휴가 때 잠시 귀국을 했는데, 조선에 머무르는 동안 ≪동아일보≫ 학예란에 투고한 감상문이 호의적인 평가를 받아 그때부터 시와 논문을 발표했다.
이하윤이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26년 ≪시대일보≫를 통해서였다. 그러나 당시 그는 일본 유학 중이었으므로 문단 활동을 하지는 못했다. 1926년 김진섭, 손우성, 이선근, 정인섭, 김온, 함대훈 등과 함께 해외문학연구회를 결성해 친목과 문학 연구를 중심으로 한 활동을 했고, 1927년 1월에는 기관지 ≪해외문학≫을 발간하기도 했다. 귀국 후 경성여자미술학교·동구여자상업학교 교사와 ≪중외일보≫ 학예부 기자, 경성방송국 편성계, 콜럼비아주식회사 조선문예부장,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 등을 지냈다. 이하윤은 ≪중외일보≫ 학예부 기자로 재직하면서부터 많은 문인들과 접촉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시문학≫, ≪극예술≫ 동인 등에 참여했으며, ≪시문학≫이 ≪문예월간≫으로 이름을 바꾸자 그 편집을 맡았고 ≪문학≫ 동인에도 참여했으나 곧 폐간되었다.
1933년 그동안 발표했던 번역시를 모아서 번역시집 ≪실향의 화원≫(시문학사)을 출간했다. 이 책은 우리나라 최초의 번역시집인 김억의 ≪오뇌의 무도≫(1923)를 능가한다고 평가된다. 원전을 직접 번역했고, 잉글랜드 등 6개 나라의 110편이란 많은 양의 작품을 실었기 때문이다. 이하윤은 해방 후에도 ≪불란서 시선≫(수선사, 1948. 18인의 대표작 44편 수록)과 ≪근대영국시인집(영문, 합동사, 1949), ≪영국애란시선≫(수험사, 1954. 영국 36인 68편, 아일랜드 14인 33편 수록)을 출간해 외국 문학을 소개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토마스 불핀치의 ≪전설의 시대≫(한국번역도서, 1959)를 공역하기도 했다.
이하윤은 1930년대에 유행가 가사 창작에도 커다란 관심을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 그는 이미 대중가요 작사가로도 활동했는데, 1939년 청색지사에서 출간된 시집 ≪물레방아≫의 후반부에 실린 28편의 가요시초가 그 일부다. 그리고 가곡 <고향의 노래>(김대현 곡)와 건전가요 <우리 모두 손잡고>(황문평 곡) 등 여러 곡을 작사하기도 했다.
1935년 9월부터 3년간 콜럼비아주식회사 조선문예부장, 1937년부터 1940년 8월 폐간당할 때까지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 등을 지냈다. 그리고 1942년 7월부터 1945년 해방 때까지 동구여자상업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해방 후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대항해 설립된 중앙문화협회 상무위원을 지냈으며, 1954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최고위원에 이어 ≪민주일보≫·≪서울신문≫의 논설위원을 지냈고, 유네스코 한국 부위원장으로 아시아회의에 참석하기도 했다. 1945년 11월 혜화전문학교(현재 동국대학교) 교수로 취임해 다음 해 문과과장 및 제일전문부장을 맡았으며, 1949년 3월부터 서울대 법과대학, 1952년 9월부터 사범대학으로 옮겨 근무하다가 1971년 8월에 정년퇴직했다. 그해 서울대 명예교수가 된 한편 덕성여대 교수 겸 교양학부장에 취임했다. 1974년 3월 12일 간경화로 별세해 서울 진관내동 성공회 묘원에 묻혔다.
엮은이
고봉준은 1970년 부산에서 태어나 충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9년 부산외국어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1995년 같은 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해 <해방기 전위시의 양식선택과 세계인식>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2005년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한국 모더니즘 문학의 미적 근대성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2006년 제12회 고석규비평문학상을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는 ≪반대자의 윤리≫, ≪다른 목소리들≫, ≪모더니티의 이면≫, ≪유령들≫ 등이 있다. 현재 계간 ≪딩아돌하≫, 웹진 ≪문장≫의 편집위원을 맡고 있으며,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차례
물네방아
일허진 무덤
老狗의 回想曲
夕陽에 먼 길을 떠낫드러니
자최 업는 길
살아진 꿈
마을 하눌
追憶 1
追憶 2
追憶 3
彷徨曲
눈물 1
눈물 2
눈을 밟고 감니다
눈
밤
除夜
醉魂
恨 만흔 밤
마음의 꽃
處女의 노−트
嘆息의 가을
落葉 1
落葉 2
파리
샨송·드·카
덧업는 길
새해
아라사ㅅ사람
촌으로 가서
髑髏의 交響樂
悲運
연통 같은 내 마음
나는 들에 핀 국화를 사랑합니다
記念帖에서
이얘기 시절
쪽박 박구지구
접둥새
세상은 변하야
밤車
기다림도 보람 업시
歸鄕曲
또 하로를 기다리는 마음
희미해 가는 기둥
愉快한 陶醉
惡禱
근심 1
근심 2
장터
흐린 夜市로
에트란제
고요한 밤거리를 거러감니다
憂鬱의 午後
안해에게
님 무덤 앞에서
할머니 靈전에
惠英에게
크리스마스 1
크리스마스 2
四行詩 七 篇
喜悅의 瞬間
구두
옛터
祈雨
아이
안해
病友
歌謠詩抄
그 曲調
다드미 소리
버드나무 그림자에
山 넘어 그리운 님
靑春의 故鄕
눈물 어린 그림자
그리운 그 밤
處女 열여덜
섬 색시
서러운 뱃길
꿈에 피엿든 꽃
서울의 밤
서울의 三更
애닯흔 피리 소리 1
애닯흔 피리 소리 2
斷膓怨
수집은 처녀
哀傷曲
孤鳥의 嘆息
이즈시엇나
비 나리는 밤 1
비 나리는 밤 2
望鄕曲
일허진 청춘
꿈길 언덕
山꼴 시악시
春夜小曲
눈물의 술잔
탄식의 노래
離別哀歌
희망의 별
悲戀
流浪의 마음
눈물의 편지
덧업는 靑春
洛東江의 哀想曲
잊지는 안으시겟지오
港口의 哀愁
港口의 未練
追憶의 손톱
嘆息하는 밤
눈 싸힌 달밤에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끝업시 도라가는 물네방아 박휘에
한 닙식 한 닙식 이내 추억을 걸면
물속에 잠겻다 나왓다 돌 때
한업는 뭇 기억이 닙닙히 나붓네
박휘는 끝업시 돌며 소리치는데
맘속은 지나간 옛날을 찾어가
눈물과 한숨만을 지어서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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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흔 방아직이 머리는 흰데
힘업는 視線은 무엇을 찾는지
확 속이다 굉이 소리 찌을 적마다
요란히 소리 내며 물은 흐른다
●눈이 녹아 물 되면
눈물이지오
내 가슴 녹은 물도
눈물입니다
눈은 웨 녹아서
눈물이 되노
내 가슴 타고 타서
눈물 되지만
●덧업시 차저온봄 안마즐수 잇스랴만
비안와 흉년드는 작넌갓진 마르소서
이누리 백성들이 영죽을까 근심이라
몸하나 죽는대야 무슨한이 지트랴만
못죽고 남는자손 사라갈길 막막하다
모조리 못죽으니 비나와서 풍년지라
●터질뜻 젖가슴에 숨겻든 사랑
그때가 그리워서 한숨 짐니다
고흔꿈 깨저버린 오늘 이 밤에
내어이 가신님이 밉지 안흐랴
풀업는 언덕우에 외로히 서서
물마른 시냇가를 바라보는 맘
밤마다 눈물어려 거리 헤매며
향수에 울든꿈도 덧이 업구려
넉일흔 이나그네 갈곳은 어듸
못찾을 그청춘이 그려 움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