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앙드레 말로의 작품에서 별로 탐색할 필요도 없이 첫눈에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공통점, 그것도 어떤 이념이나 사상, 테마 등속과는 관계없이, 분명한 형태로 드러나는 공통점은 등장인물들의 삶의 형태다. 등장인물 거의 모두가 조국을 떠나거나 국적 의식이 상실되고, 일정한 사회에 뿌리박지 않고 ‘부동(浮動)하는’ 인물들이며, 정상적인 가정이나 부부관계조차 가지지 않은, 따라서 자연스런 전통적인 일체의 연줄(Liens)을 끊어 버린 ‘고립된’ 인간군이라는 점이다.
작품의 내용으로 보나, 중국 현대사의 전개로 보나 ≪정복자≫의 연장선 위에 놓일 ≪인간의 조건≫의 등장인물들도 마찬가지로 ‘잡종’들이고, 상하이로 흘러들어 온 잡다한 부동 인간들이다. 주인공 기요 일가는 예외적으로 부(父)·부부(夫婦) 3인으로 한 가족을 이루면서도, 그 점에서 매우 상징적이다. 부친 지조르(Gisors)는 프랑스인(은퇴 전 베이징대학교 교수, 이데올로기 주입·전과자), 사망한 모친은 일본 여인, 그 혼혈아 기요의 처는 상하이에서 출생한 독일 여인, 3국적이 동거하며, 혈통상으로는 프랑스·일본·그 혼혈·독일, 이렇게 네 혈통이 모인 셈이다. 메이가 혁명 진영의 병원 의사로 근무할 뿐, 부자(父子)는 일정한 직업이 없다. ≪정복자≫의 고아 테러리스트 홍은 ≪인간의 조건≫에서는 첸(Tchen)이라는 이름으로 좀 더 심화된 인간상으로 다시 등장한다. 그를 어린 시절부터 돌보며 가르친 지조르 노인이 보기에는, 첸은 ‘거의 비인간적인 철저한 자유로 해 철두철미 이념에 몰입’함으로써 ‘이에 중국인이 아니며’, ‘중국을 떠났다’고까지 평한다.
여기서 또한 클라피크(Clappique)라는 인물을 등장시킴으로써 이 무국적·실향·부동 인간상의 한 전형을 보여 준다. 상하이를 무대로 무기·예술품·골동품 따위를 닥치는 대로 중개 거래해 그 커미션을 유일한 수입원으로 삼으며, 창가(娼家) 겸 유흥소 ‘블랙 캣’이 본거지인 양 주색과 도박으로 수입을 털어 버린다. 아주 총명하면서도 항상 도화역자(道化役者) 같은 언동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연막을 치는 등, 기행(奇行)으로 좀 종잡을 수 없지만, 속은 정직하고 의리를 지킬 줄 아는 남작(男爵)으로 통하고 있다. 스스로 모친은 헝가리 여인이고 부친 혈통은 프랑스인이라고 밝힌다.
200자평
1932년 앙드레 말로에게 프랑스 최고의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안겨준 작품. 20세기 초 상해혁명을 배경으로 다양한 인간군상의 모습을 치밀한 필치로 그려냈다. 역자의 매끄러운 번역이 돋보인다.
지은이
앙드레 말로는 프랑스의 소설가, 예술가, 정치가. 1901년에 태어났다. 서구 문명에 대한 회의주의와 이국주의적 호기심에 사로잡혀 스무 살에 인도차이나로 향했다. 고대 크메르 왕국의 조각상을 밀반출하려다 체포되어 실형을 선고받았다가, 프랑스 지식인들의 구명운동으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감옥에서 느낀 식민당국에 대한 혐오감으로 열렬한 반식민주의자이자 사회 변혁의 옹호자가 되었다. 인도차이나 피식민지 국민들의 각성을 촉구하며 신문을 발간하기도 하고, 중국 땅에 들어가 사회주의 혁명이란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를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스페인 내전에는 민간 항공군 대장으로 반파시즘 전선에 참여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는 레지스탕스 대원으로 적극 가담했다. 결국 혁명활동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지난날의 열정을 버리고 예술의 세계를 발견하게 된다. 드골 장군의 첫 번째 내각에서 공보장관을, 1958년 드골이 재집권한 후 10년 동안 제5공화국 초대 내각의 문화부장관을 지내며 강력한 문화 행정을 펼쳤다. 1976년 생을 마쳤고 1996년 서거 20주기를 맞아 파리 팡테옹 사원에 유해가 안장되었다. 주요 작품으로 <서구의 유혹>(1926), <왕도>(1930> <인간의 조건>(1933, 공쿠르상 수상) <상상 박물관>(1954) <침묵의 소리들>(1951) <신들의 변신>(1957) 등의 예술 비평서가 있다. 사후 1977년에 <덧없는 인간과 예술>이 발간되었다.
옮긴이
김붕구는 1922년에 황해도 옹진에서 태어났다. 호는 석담(石潭)이다. 1944년에 일본 와세다대 정치경제학과를 수학하고, 1950년에 서울대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했다. 1953년부터 1987년까지 서울대 교수를 역임했다. 스탕달의 ≪적과 흑≫, 보들레르의 ≪악의 꽃≫, 르나르의 ≪홍당무≫, 말로의 ≪왕도로 가는 길≫, 생텍쥐페리의 ≪야간 비행≫, 카뮈의 ≪반항인≫,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 등을 번역했고, ≪불문학 산고≫, ≪작가와 사회≫, ≪프랑스 문학사≫ 등의 저서를 남겼다.
차례
제1부
제2부
제3부
제4부
제5부
제6부
제7부
앙드레 말로 연구 / 김붕구
불문학자 김붕구 선생님을 추억하며 / 오생근
책속으로
“자, 이거 받아, 쏸. 손을 내 가슴 위에 얹어. 내 손이 닿거든 꼭 쥐란 말이야. 청산가리를 줄게. ‘절대로’ 두 사람 몫밖에 없으니 그리 알아.”
‘오직 두 사람 몫밖에 없다’는 말을 하고 나서 그 밖의 모든 것을 그는 이미 단념했다. 옆으로 누워 청산가리를 둘로 나누었다. 등불은 보초들로 가려져 불빛이 후광처럼 흐릿하게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러나 놈들이 움직이지나 않을까? 어떤 일이 일어나도 볼 수는 없었다. 카토프는 자기 목숨보다도 더 귀중한 선물을 자기 가슴 위에 내민 그 뜨거운 손에-육체에게 주는 것도 아니고 목소리에게 주는 것도 아니다-넘겨주었다. 그 손이 짐승처럼 움찔 오므라들더니 곧 물러갔다. 카토프는 온몸을 긴장시키며 기다렸다. 갑자기 둘 중의 한 사람이 뭐라고 말했다.
“잃어버렸어. 떨어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