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AI, 창작의 주체와 의미를 묻다
인공지능이 예술을 창작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인공지능이 만든 작품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오늘날 예술철학에서 중요한 논의로 자리 잡았다. 이 책은 인공지능 예술이 가져온 철학적 문제를 탐구하며, 예술의 본질과 의미 해석의 기준을 재조명한다. 예술 작품의 의미가 창작자의 의도에 의해 결정되는지, 혹은 관객의 해석에 의해 결정되는지에 대한 기존 논쟁을 바탕으로 인공지능 예술을 조망한다. 인공지능이 예술적 의도를 가질 수 있는지, 그렇지 않다면 개발자나 사용자의 의도가 창작의 주체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다양한 철학적 관점을 검토한다. 특히, ‘의도주의’와 ‘비의도주의’라는 해석 이론을 중심으로 인공지능 예술이 기존 예술 해석의 틀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분석하며 인공지능의 창의성과 예술적 가치를 논의한다.
200자평
인공지능이 예술을 창작할 수 있는지, 그 작품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지를 탐구한다. 예술의 의미가 창작자의 의도에 의해 결정되는지, 혹은 관객의 해석에 따라 달라지는지를 논의하며, 인공지능이 창의성과 예술적 가치를 가질 수 있는지 검토한다. 또한 ‘의도주의’와 ‘비의도주의’ 해석 이론을 바탕으로 인공지능 예술이 기존 예술 개념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분석한다.
지은이
윤주한
대구대학교 성산교양대학 자유전공학부 조교수. 서울대학교 미학과에서 허구적 예술의 본성과 가치에 관한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허구와 관련된 미학적 논의에 새로운 전환점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주제로서 인공지능, 메타버스, 컴퓨터 게임 등으로 관심을 확장하고 있다. 대구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교양교과로서 철학의 역할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다. 한국교양교육학회, 현대미술학회, 한국예술교육학회, 한국공학교육학회, 한국지역문화학회 등 다수의 학회에서 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인공지능 예술은 해석 가능한가: 의도주의의 전망”(2023), “컴퓨터게임의 철학을 위하여”(2022), “메타버스를 활용한 교양철학 교육에 관한 고찰: ‘VR챗 학교’ 사례를 중심으로”(2022), “인공지능과 문예적 창의성: 허구적 상상력을 중심으로”(2021) 등이 있다.
(웹사이트: https://sites.google.com/view/yoonjuhan)
차례
‘인공지능 예술’이 던지는 철학적 문제
01 해석에 관한 비평철학의 논의
02 의도와 해석의 관계에 관한 전통적 논쟁
03 의도와 해석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논의
04 ‘인공지능 예술’이 의도주의 논쟁에 던지는 문제
05 의도주의의 첫 번째 선택지: 무의도론
06 유의도론(1): ‘개발자’의 의도에 호소하기
07 유의도론(2): 사용자(프롬프터)의 의도에 호소하기
08 유의도론(3): 캐스팅론
09 인공지능이 의도를 가질 수 있을까
10 인공지능은 예술철학에 어떤 도전을 제기하는가
책속으로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상상해 보자. 예를 들어 박두진의 시 <해>는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여기서 ‘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해 갑·을·병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갑은 “작품의 역사적 맥락을 고려할 때, ‘해’는 ‘광복’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해”라고 주장했다. 한편 을은 “‘해’는 당연히 낮을 밝히는 태양계의 저 항성을 뜻하지”라고 주장했다. 병은 “‘해’는 내가 작년에 정동진에서 보았던 새해 첫 해를 의미해”라고 주장했다. 물론 갑·을·병의 해석 모두를 맞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적어도 갑·을·병의 해석 중에서 가장 그럴듯한 해석, 혹은 널리 받아들일 만한 해석이 무엇인지를 묻고 판단하는 것이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01_“해석에 관한 비평철학의 논의” 중에서
가설의도주의의 해석 모델은 다음의 두 논제로 구성된다. 첫째, 예술 작품의 의미는 그 작품을 적절하게 감상할 수 있는 관객의 입장에서 작가의 의도일 법한 의미에 대해 세운 가설들 중 가장 정당화된 가설이다. 가설의도주의는 예술 작품이 예술가의 의도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직관을 받아들이므로, 우리가 예술 작품을 감상하면서 예술가의 의도가 무엇일지를 파악하고자 한다는 점 역시 받아들인다. 즉, 우리는 예술 작품을 감상하면서 예술가가 어떠한 의도를 가졌을지에 관한 가설을 세워 나가며, 이것이 바로 작품의 의미가 된다. 다만 아무 가설이나 작품의 적절한 의미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적절한 의미가 될 수 있는 가설은 우선 그 작품을 적절하게 감상할 수 있는 감상자의 입장에서 세워진 것이어야 하고, 또한 작품의 내외적 증거를 통해 정당화된 것이어야 한다.
-03_“의도와 해석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논의” 중에서
가령 내가 애완용 뱀에 잉크를 묻힌 뒤, 그 뱀이 캔버스 위를 기어다니도록 풀어 주었다고 하자. 나중에 그 뱀이 기어다닌 흔적을 봤더니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문장으로 읽힐 수 있음을 발견했다. 이때, 나는 뱀을 통해 임의적인 시각적 패턴을 만들고자 하는 의도를 가졌을 수 있고, 따라서 그 의도는 뱀이 남긴 흔적의 원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문장을 통해 특정한 의미를 구현하고자 한 의도, 즉 의미론적 의도를 가지지 않았고, 따라서 그 문장의 의미가 나의 의미론적 의도에 기반하여 의미를 가진다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06_“유의도론(1): ‘개발자’의 의도에 호소하기” 중에서
그렇다면 누군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은 그가 자신의 행위의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물론 행위의 이유를 실제로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 행위자가 의도를 가질 수 없음을 반드시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설명하는 능력은 의도를 가지는 능력과 별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누군가 자신의 행위의 이유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가 행위의 의도를 가졌다고 가정할 만한 좋은 이유가 될 수 있다.
-09_“인공지능이 의도를 가질 수 있을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