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국내 최초로 일본 명작 단편을 인생, 재난, 근대, 동물, 광기, 남녀, 계절, 일상, 허무, 구원 등 10개의 주제로 출판했다. 이처럼 일본 문학을 주제별로 10권 발행한 것은 국내 출판에 전례가 없는 일이다. 작품 127편, 작가 42명, 역자 63명이 참여했다. 대표 기획위원은 최재철 한일비교문화연구소 소장(한국외대 전 일본어대학 학장)이다.
≪일본 명단편선≫을 기획한 의도는 무엇보다도 국내의 일본 문학 소개가 몇몇 현대 인기 작가의 대중적 작품이나 추리 소설류에 편중되어 있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우수한 일본 근현대 단편 명작들을 찾아, 전문가에 의한 질 높은 번역과 적절한 작품 해설 및 작가 소개, 풍부한 주석 등을 독자에게 제공해 가벼운 일본 문학을 소비하는 독서 풍조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자 했다.
이번 기획의 목표는 이처럼 국내 독자들의 일본 문학에 대한 편식을 일깨우고자 함이 그 첫 번째다. 그리고 19세기 말 메이지 시대의 작품부터 전후(戰後)의 작품까지를 망라함으로써 일본 근현대 문학의 기본 흐름과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체계적 읽기를 지향하는 것이 두 번째다.전 10권에는 근현대 일본의 주요 작가들이 다 포함되어 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다자이 오사무, 나쓰메 소세키, 사카구치 안고, 다니자키 준이치로, 시마자키 도손 등 한국에 널리 알려진 작가들의 작품 외에 가지이 모토지로, 니이미 난키치, 도쿠다 슈세이, 우메자키 하루오, 하야마 요시키, 히사오 주란 등 다소 생소한 작가들의 명작들도 포함되었다. 재일 한국인 작가 김사량의 작품도 들어 있다.
특히 일본 근현대 문학사에서 위상에 비해 이제까지 국내에서는 접하기 어려웠던 초역 작품들이 여러 편 포함되었다는 것도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초역 작품들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한 줌의 흙> · <의혹>, 사카구치 안고의 <죽음과 콧노래> · <진주> · <전쟁과 한 명의 여인>,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증념> 등을 비롯해 이즈미 교카의 <그림책의 봄>,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두 줄기의 피> 등 20여 편이다.
‘완성도 높은 명단편선’이 되도록 번역은 원문에 충실하되 한국어로 읽히는 가독성을 고려하고, 각주는 직간접 일본 체험을 반영한다는 ‘문화 번역’을 따랐다. 요즘 일본 문학 작품 번역에 오류가 많고, 쉽게 생략하거나 원문에 없는 어휘를 집어넣어 가독성만을 노리는 세태와는 선을 긋고자 한 것이다.
역자들은 일본 문학을 전공한 전문가들로서,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 등 해외 대학에 재직하고 있는 전공자들도 참여했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
200자평
메이지 시대부터 전후(戰後)의 작품까지, 일본 근현대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명단편을 모았다. 주제별 단편집 10권 출간은 그동안 한국 출판계에 전례가 없는 일이다. 그동안 단편적으로 일본 근대 작품들을 읽은 독자라면 이 시리즈를 통해 일본 근현대 문학의 기본 흐름과 전체를 체계적으로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 근현대 문학 전문가의 정확한 번역과 전문적인 해설, 풍부한 주석은 독자를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격동하는 일본 개화기와 근대화, 전후 부흥의 현장으로 안내할 것이다. 제7권에서는 고다 로한의 <국화-먹거리로서의>를 비롯해 11편의 작품을 소개한다.
지은이
고다 로한(幸田 露伴, 1867∼1947)
본명은 시게유키(成行). 병약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20세 때 스스로 필명을 만들고 전업 작가의 길을 걷는다. 22세 때 <이슬방울(露団々)>을 발표해 등단한 이래 ≪풍류불(風流佛)≫, ≪오중탑(五重塔)≫ 같은 작품들을 잇달아 발표하며 동시대 주요 작가 대열에 합류한다. 평론과 문학 연구에도 두각을 나타내 매우 다양한 주제에 관해 심도 있고 전문성 있는 글을 남겼다. 중국과 일본의 고전 연구에 몰두해 그를 바탕으로 한 다수의 고전 평론, 연구 논문, 역사 소설 등을 집필했다. 제1회 일본 문화훈장을 수상하고 제국예술원 회원으로 추대되었다.
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 1972∼1896)
전통적인 교육 방식으로 문학을 가르치는 ‘하기노야(萩の舎)’에서 고전문학을 배웠다. 어머니와 여동생 등 세 사람의 생활을 책임지는 처녀 가장으로서 궁핍한 삶을 산다. ≪아사히 신문(朝日新聞)≫ 기자이자 문학가 나카라이 도스이에게 사사하며 소설을 발표한다. 대표작은 주로 단편소설로<키대보기(たけくらべ)>,<흐린 강(にごりえ)>,<십삼야(十三夜>, <눈 오는 날(雪の日)>, <섣달 그믐날(大つごもり)>, <처마에 걸린 달(軒もる月)> 등이다. ‘하기노야’의 스승 나카지마 우타코는 이치요를 헤이안 시대의 재녀 세이쇼나곤에 비유했다.
이즈미 교카(泉鏡花, 1873∼1939)
메이지 시대 대표 작가 중 한 사람인 오자키 고요 중심의 ‘겐유샤(硯友社, 벼루 동인)’ 작가다. 어머니는 전통 가면극 노(能)의 큰북 고수의 딸로 교카가 9세 때 사망했다. 11세부터 아버지와 함께 부처의 부인 마야(摩耶) 신앙을 갖기 시작했다. 18세에 고요의 문하생이 되어 사사한 이래 평생의 은인으로 존경했다. ≪고야산 스님(高野聖)≫으로 인기 작가가 되었다. 괴기 취미와 특유의 낭만주의에 의해 일본 근대 환상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대표작으로 ≪야간 순경(夜行巡査)≫, <외과실(外科室)>, ≪데리하 교겐(照葉狂言)≫ 등이 있다.
도쿠토미 로카(徳冨蘆花, 1868∼1927)
로카라는 필명은 헤이안 시대의 여성 작가 세이쇼나곤(清少納言)의 ≪베갯머리 서책(枕草子, 마쿠라노소시)≫의 “갈꽃은 볼품이 없다”에서 연유한다. 형 소호의 지도를 받으며 성장했다. 소호·로카 형제는 일찍 서구 기독교 휴머니즘 정신을 받아들였다. 오랜 기간 닦은 영어 실력을 기반으로 외국 문학을 가까이 접할 수 있었다.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문인은 톨스토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추구한 작가로서 일본의 경승지를 찾아 거주하곤 했다. 기행 소품 ≪자연과 인생≫(1900)은 가나가와현의 자연 관찰과 사색의 산물이다. ‘자연 3부작’이라 불리기도 하는 초기 작품에는 인간이 대자연의 일부에 불과하며 대자연은 조물주의 화신이라는 인식이 잘 드러나 있다.
시마자키 도손(島崎藤村, 1872∼1943)
엄격한 아버지로부터 한학 교육을 받았다. ≪여학 잡지(女學雜誌)≫에 번역을 기고하는 것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그 뒤 ≪일엽주(一葉舟)≫ 등의 시집을 펴내 현실의 고투에서 한발 물러난 장소에서 좌절해 간 심정을 담담한 서정으로 읊는 독자적 시법을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자비 출판한 장편 소설 ≪파계(破戒)≫로 명성을 확립했다. ≪봄≫, ≪집≫, ≪신생≫ 등 일련의 자전적 작품을 잇달아 발표해 자연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문호의 반열에 올랐다. ≪동트기 전(夜明け前)≫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일본의 근대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놓지 않은 작가로 명성을 떨쳤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1892∼1927)
외가에 양자로 들어가 두 이모가 그를 양육하는 환경에서 자랐다. ≪신사조≫ 창간호에 <코(鼻)>를 발표해 나쓰메 소세키의 격찬을 받는다. 초기에는 일본의 고전 작품에서 소재를 얻었다. ‘왕조물’, ‘기독교물’, ‘에도물’, ‘개화기물’, ‘현대물’ 등의 다양한 소재를 가지고, <나생문(羅生門)>,<마죽(芋粥)> 등 150편 정도의 단편 소설을 남겼다. 건강 악화, 염세적 경향의 심화, 어머니의 정신질환, 누이 가족이 연관된 문제, 작품 창작 등의 스트레스로 35세 나이에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세상을 뜬다. 친구인 기쿠치 간이 그를 기념해 제정한 아쿠타가와상(芥川賞)은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이 됐다.
요코미쓰 리이치(横光利一, 1898∼1947)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더불어 일본 신감각파 대표 작가 중 한 명이다. 일가족이 행복하게 안정적으로 살았던 시기는 짧았고, 아버지의 직업과 어머니의 병으로 애정 결핍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상실한 가족과 그 관계 속의 애정에 대한 목마름은 그의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기쿠치 간을 만나며 본격적인 문단 생활을 시작한다. 심리주의 기법의 영향을 받아 대표작인 ≪새(鳥)≫, ≪기계(機械)≫, ≪악마(悪魔)≫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심리주의적 기법과 감각적인 표현의 조화를 통해 신감각파의 중심적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1909∼1948)
대지주의 6남으로 태어나 부모의 사랑을 모른 채 유모의 손에서 자란다. 카페 호스티스와 함께 투신자살을 기도했는데 혼자만 살아남은 체험이 평생 죄의식으로 남는다. 진통제 파비날을 다용, 중독자가 된다. 치료를 위해 입원 중 아내가 불륜을 저지른 사건이 계기가 되어 이혼한다. 재혼 후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누리며 활발한 작가 활동을 한다. 패전 후 윤리적 기반을 잃은 일본 사회에 가장 어울리는 무뢰파 작가로서, 사카구치 안고, 오다 사쿠노스케 등과 함께 ‘데카당스 문학’ ‘무뢰파 문학’이라 불리며 패배감에 사로잡혀 있던 일본 젊은이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얻는다. 대표작은 ≪만년(晩年)≫, ≪사양(斜陽)≫, <달려라 메로스>, ≪쓰기루(津軽)≫, <여학생>, <비용의 아내>, 등. 폐 질환이 악화되자 자전적 소설 ≪인간 실격(人間失格)≫을 남기고 카페 여급과 함께 저수지에 몸을 던진다.
다카무라 고타로(高村光太郞, 1883∼1956)
도쿄 미술학교 조각과를 졸업하고, 로댕이 일본에 소개되자, ≪오귀스트 로댕≫을 읽고 깊은 영향을 받았다. 뉴욕으로 건너가 조각을 공부하고 런던으로 건너가서 오기와라 모리에(萩原守衛)와 친교하고, 버나드 리치를 알면서 서구 전통에 빠졌다. 파리로 가서 보들레르와 베를렌의 시를 접했고, 격절된 문화적 차이에 열등감을 느껴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귀국한다. 대표작으로 ≪지에코초(智恵子抄)≫, ≪위대한 날에(大いなる日に)≫, ≪아저씨의 시(をぢさんの詩)≫, ≪기록(記錄)≫(1944) 등이 있다.
옮긴이
신영언
한국외국어대학교와 와세다대학 대학원을 수료하고, 오차노미즈대학 대학원 문학석사학위를 받았다. 성신여자대학교 명예교수. ≪일본단편소설 해설 감상≫, ≪세계문학 전집≫ 14, 15권,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전집≫ I, III권, ≪오타 쥴리아≫, ≪남편 엔도 슈사쿠를 말한다≫, ≪아름다운 사람에게≫ 등의 저역서가 있다.
김용안
한양여자대학교 실무일본어과 명예교수. 저서는 ≪日本語の粋≫(2011), ≪키워드로 여는 일본의 향≫(2009), ≪명인(名人) 명작(名作) 산책(散策)≫(2011), ≪일본 소설 행간으로 읽다≫(2021) 등이 있다. 논문으로는 <하루키와 바나나 비교> 외 일본 근대문학 관련 30여 편이 있다.
최재철(기획위원)
≪일본 명단편선≫(지식을만드는지식, 2015∼2021) 주제별 전10권을 기획했다. 한일비교문화연구소 소장. 한국외국어대학교 및 동 대학원(일본문학) 수료, 도쿄대학 대학원(비교문학비교문화) 박사과정 수료.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일본연구소장, 외국문학연구소장, 도서관장, 일본어대학장과 세계문학비교학회장, 한국일어일문학회장 등을 역임했다. 사회 봉사로는 한국문학번역원, 대산문화재단, 대한민국학술원 등의 심사 위원을 역임하고, 서울시교육청동대문도서관과 협력하여 시민인문대학을 개설 운영한다.
김난희
중앙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제주대학교 일어일문학과 교수다. 저역서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문학의 이해≫, ≪20세기 일본 문학의 풍경≫, ≪일본 근대 작가·작품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전집1~8≫ 등이 있다.
김태영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어과 졸업. 도쿄대학 인문사회계연구과 일본문화연구전공과정 석·박사과정을 수료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일어일문학과에서 <≪겐지 모노가타리≫의 인물과 표현-사랑의 인간관계를 중심으로>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언어문화학부 강사로 재직 중이다.
권정희
성균관대학교 졸업 후 시라유리(白百合)여자대학 대학원 아동문학전공 연구생 수료 후 도쿄대학 총합문화연구과(초역문화과학전공 비교문학비교문화코스)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일본 센슈대학과 경원대학교 강사를 역임하였으며 성균관대학교의 BK박사 후 연구원과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동대학의 비교문화연구소 선임연구원이다.
김정숙
중앙대학교에서 문학박사를 취득했다. 중앙대학교, 서울여자대학교 강사를 역임했다. 대표 업적은 박사학위 논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문학에 나타난 서정>이 있고, 역서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전집≫(1권∼8권, 제이앤씨, 공역) 등이 있다.
오현진
중앙대학교에서 일본 근현대문학을 전공,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의 동시대성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연구하고 있다. 발표 논문으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 연구-인물들의 지진 후 심리 상태를 중심으로>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고찰> 등이 있다.
김정신
경북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경북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석·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서정주 시의 변모 과정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19년 2월에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일어일문학과에서 <다카무라 고타로(高村光太郎) 시에 나타난 공간의 표상 연구>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5년 8월부터 경북대학교에서 문학의 이해 등을 가르쳤고, 현재는 경북대학교 교육혁신본부 교양교육센터에서 대학 글쓰기를 강의하고 있다.
차례
국화-먹거리로서의(菊-食物としての) ― 고다 로한 / 신영언
섣달 그믐날(大つごもり) ― 히구치 이치요 / 김용안
새의 화신(化鳥) ― 이즈미 교카 / 최재철
풍경화가 코로(風景画家コロオ) ― 도쿠토미 로카 / 김난희
사생첩(寫生帖) ― 도쿠토미 로카 / 김태영
황혼(黄昏) ― 시마자키 도손 / 권정희
스미다 강물(大川の水)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 김정숙
마쓰에 인상기(松江印象記)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 김정숙
봄은 마차를 타고(春は馬車に乗って) ― 요코미쓰 리이치 / 오현진
아, 가을(ア、 秋) ― 다자이 오사무 / 최재철
봄이 되어(春になつて) ― 다카무라 고타로 / 김정신
책속으로
1.
국화의 계절이 되었다. 그 산뜻한 향기와 조신하고 귀여운 꽃송이의 모습, 가지의 멋스런 모양새, 잎사귀의 빛깔, 어느 것 하나 은연중에 보는 이의 마음을 아름다운 세계로 불러들이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나 국화의 범주에 속하는 어떤 꽃은 속된 취향으로 유별나게 좋지 않은 냄새가 나는 것도 더러 있기는 하다. 특히 요즘 널리 퍼져 상품화된, 그럴싸한 이름이 붙은 꽃을 마치 조화처럼 둥글게 묶어 비단 주머니에 넣어 만든 축하용 장식품은 유럽에서 다시 일본으로 되돌아온 유행으로, 그다지 좋은 느낌이 들진 않는다. 여러 해 전부터 이 달리아 향이 나는 국화는 어쨌든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그 깊고 진한 향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름다움을 기준으로 이야기하자면, 꽃잎의 겉면과 뒷면이 각기 다른 다홍색인 가장 세련된 두 가지 빛깔을 띤 전통적인 국화가 본래 갖고 있는 아름다움과는 조금 다른 방면으로 발달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또한 나이든 사람의 감성일지 모르겠다.
-고다 로한, <국화-먹거리로서의>
2.
갑자기 울리는 소리가 나더니 아, 하는 외침이 귓가에 들렸을 때 ‘그’의 몸은 이미 절벽에 걸려 있었다. 미끄러져 떨어졌고, 바닥으로 떨어지려 할 때 ‘그’는 한 줄기 억새풀을 움켜쥐었다. 손은 억새풀을 쥐었고 몸은 공중에 걸려 있었다.
“자네!”
그 1초 동안, 새파랗게 질린 그의 얼굴에는 공포와 실망, 애원이 한순간에 스쳐 지나갔다.
그 1초 동안, 절벽에 선 내 마음속에는 과거와 미래, 복수와 동정심 등 여러 가지 감정이 일어나 서로 싸웠다.
나는 그를 내려다보고 섰다.
“자네!”
애원하는 그가 움켜쥔 억새풀이 소리를 내며 뿌리째 뽑히려고 한다.
-도쿠토미 로카, <사생첩>
3.
“드디어 봄이 왔어.”
“아, 예쁘네요.” 아내가 말하며 옅은 미소를 지었고 여위어 애처로운 손을 꽃을 향해 뻗었다.
“정말 예쁘지?”
“어디에서 왔을까요?”
“이 꽃은 마차를 타고, 바다를 건너 봄을 알리면서 와 주었어.”
아내는 그에게 꽃다발을 받아 양손으로 가슴 가득히 안아 쥐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밝은 꽃다발 속으로 창백해진 얼굴을 묻고 황홀하게 눈을 감았다.
-요코미쓰 리이치, <봄은 마차를 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