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초판본 한국소설문학선집’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한국문학사상 전례 없는 사회적인 관심을 받으며 외설 시비에 올랐던 작품이며, 최초의 베스트셀러다. 교수의 부인이 가정에서 벗어나 자유를 즐기다 탈선의 길로 빠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설정이었다. 1954년 ≪서울신문≫에 연재되던 당시 사회 지도층 인사들로부터 “중공군 40만 명보다 더 무서운 해독을 끼치는 소설”, “북괴의 사주로 남한의 부패상을 낱낱이 파헤치는 이적 소설”이라는 혹평을 받았다. 작가는 여러 계층의 인사들이 올린 투서로 인해 당국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외설 시비 등이 일어난 까닭에 이 작품은 보수적인 주제 의식에서 벗어난 소설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는 오히려 보수적인 가치관을 옹호하는 것이다. ≪자유부인≫은 교수 부인 오선영의 행보를 통해 전쟁 이후 혼란한 사회상을 보여 주며 이를 비판한다. 작가는 전쟁 이후 심해진 여러 계층의 부정부패에 대해, 사회 지도층 인사들을 중심인물로 설정해 비판함으로써 사태의 심각성을 주장하려 했다.
그런데 이러한 작가의 사회 비판 의식은 가부장적 가치관으로 인해 굴절되어 있다. 그로 인해 비윤리적인 행위에 대한 비판의 기준을 남성과 여성에게 다르게 적용한다. 즉, 가부장적 가치관에 위배되는 여성을 비윤리적인 여성으로 묘사한다.
작가는 작품 초반에 상류층 여성 모임에 관해 서술하면서 당시 여성들이 지녔던 가치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런데 작가는 그 모임의 사치성이나 비윤리성보다는 여성의 사회 진출이나 사회적 모임 결성 등에 대해 비난한다.
반면 작가는 오선영의 남편인 장태연 교수에 대해 옹호적 입장을 보인다. 장 교수는 직업 사명감에 충실하며 융통성 없고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이다. 변화한 사회 분위기와 달라진 가치관을 거부하는 장 교수는 당대의 각종 비양심적 인물들과 대비된다. 그런데 이러한 장 교수가 옆집 처녀에게 연정을 품는다. 작가는 윤리적인 인물의 대표인 교수조차 그릇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음을 비판하려 했다. 그러나 작가는 실제 서울대 교수로부터 비판을 받은 뒤, 장 교수의 탈선 문제를 가볍게 처리하고 만다. 그러면서 장 교수의 곧은 성격을 부각시키는 쪽으로 서술, 독자들에게 도덕적인 장 교수의 이미지를 주게 만든다. 그리고 그러한 독자의 기대에 부응하듯, 작품 말미에 장 교수는 모범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작가는 장 교수를 가정을 수호하기 위해 탈선한 아내를 기꺼이 용서하는 포용력 있는 인물로 미화한다.
한편 주인공 주변의 부정적 가치관을 지닌 인물들은 파멸하거나 회개하는 것으로 결말이 난다. 오선영도 “훌륭한 남편을 몰라보았구나!” 하고 뉘우친 후 가정으로 돌아온다. 이로 인해 작품의 권선징악적인 주제와 해피엔드의 구성이 완성된다. 당시 대중은 오선영의 탈선에서 대리 만족을 느끼고 오선영의 귀환에서 올바르다고 믿었던 가치관이 붕괴되지 않았음에 안도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처럼 ≪자유부인≫은 가부장적 가치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1950년대 한국 사회를 반영한 작품이다.
200자평
한국문학사상 전례 없는 사회적인 관심을 받으며 외설 시비에 올랐던 작품이며, 최초의 베스트셀러다. 교수의 부인이 가정에서 벗어나 자유를 즐기다 탈선의 길로 빠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설정이었다.
지은이
정비석의 본명은 서죽(瑞竹)이다. ‘비석’은 스승이었던 김동인이 지어 준 이름이다. 1911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났다. 1932년 일본에 있는 니혼 대학 문과를 중퇴했다. 귀국 후에는 ≪매일신보≫에서 기자로 근무했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졸곡제(卒哭祭)>가 입선되었고, 193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성황당(城隍堂)>이 당선됐다. 일제강점기에는 친일 문인 단체인 조선문인보국회 간사를 지냈다. 해방 후에는 ≪중앙신문≫ 문화부장을 지냈고, 이후 전업 작가로 소설 창작에 매진해 100여 편이 넘는 작품을 발표했다. 1954년(1. 1∼8. 6) ≪서울신문≫에 연재한 장편 ≪자유부인≫은 당시 대중의 폭발적인 관심을 받아 정비석의 대표작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자유부인≫ 때문에 신문소설의 윤리성과 창작의 자유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후 정비석은 역사를 소재로 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1976년에는 장편 ≪명기열전≫을 ≪조선일보≫에 4년 동안 연재하였고, 1980년에는 장편 ≪민비≫를 발표했다. 1981년 6월 2일부터 1989년 7월 23일까지 8년여 동안에는 ≪한국경제신문≫에 장편 ≪손자병법(孫子兵法)≫, ≪초한지(楚漢志)≫, ≪김삿갓 풍류 기행≫을 잇달아 연재했다. 소설집으로 ≪청춘의 윤리≫(1944), ≪성황당≫(1945), ≪고원(故苑)≫(1946) 등 80여 권이 있다. 수필집으로는 ≪비석(飛石)과 금강산의 대화≫(1963), ≪노변정담(爐邊情談)≫(1971), 평론집으로는 ≪소설작법(小說作法)≫(1946)이 있다. 1991년 서울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엮은이
추선진(秋善眞)은 1977년 부산에서 출생했다. 문학에 매료된 청소년기를 보내고, 1995년 경희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 1999년 졸업했다. 같은 해 경희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 진학, 2012년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민족 문화권의 문학 1·2≫, ≪한국현대문학 100년 대표소설 100선≫, ≪문학비평용어사전≫ 집필에 참여했다. 지식을만드는지식 고전선집의 ≪천맥≫, ≪박팔양 시선≫을 엮었다.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화교회
환상교향악
신성가침
백척간두
갱진일보
사면초가
온고지신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가정을 가진 여자가 사교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집을 나섰다는 것은, 남자들로 치면 세계 일주 유람 여행을 떠나는 이상으로 호화로운 일일른지 모른다. 일체의 가정적 구속을 떠나서, 창공에 나는 솔개미와 같이 자유로운 기분이었다. 집구석에 들어앉았을 때에는 장작이 떨어졌느니 김장을 해야겠느니 하고 잔소리 끊일 때가 없다가도, 일단 차리고 나서기만 하면 그런 걱정을 쓸은 듯이 잊어버리는 것이 여자들의 습성이기도 하다. 여자에게는 과거가 없다. 오직 눈앞의 현실이 있을 뿐이다. 실로 행복스러운 건망증(健忘症)인 것이다. 그런 행복스러운 건망증이 있음으로 해서 어제의 악처(惡妻)가 오늘의 현부(賢婦)도 될 수 있고, 오늘의 가정부인이 내일의 매소부로 전락할 소질도 있는 것이다.
아무튼 거리에 나선 오선영 여사는 지극히 자유로운 기분이었다. 여자들이 외출을 위하여 화장을 할 때에는, 얼굴만을 화장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조차도 자유라는 화장품으로 화장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진실로 자유라는 것은, 거리를 걸어 다니는 여자들의 마음을 가리켜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리라.
도대체가 화교회라는 정체불명의 사교회부터가 그런 자유를 갈망하는 마음에서 생겨난 조직체였다. 무릇, 부유하고 세도 있는 집 가정이란, 대개 안에는 침모와 식모가 있고, 밖에는 사환과 문직이가 있으므로, 주부 자신은 별로 할 일이 없다. 지극히 유한(有閑)한 것이다. 집에 앉아서는 하루해가 지루하도록 할 일이 없으므로, 자연히 밖으로 나다니자니 화교회 같은 사교 단체가 필요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