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초판본 한국 근현대소설 100선’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그의 작가로서의 삶은 <흑산도>부터 시작되었다. 이 작품은 1954년 9월 그가 서울대학교와 국립도서관이 공동으로 주최한 ‘흑산도 학술답사대’의 언어반 일원으로 참여해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창작되었다. 용왕제 전날 밤 축전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주인공 북술이 살고 있는 마을과 축전의 묘사가 상세히 이어지며 이 지역의 민요, 방언 등이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사수>는 어린 시절부터 경쟁 관계에 있던 친구 B의 사형 집행에 직접 참여하게 된 ‘나’가 충격으로 쓰러진 뒤, 병원에서 의식을 회복해 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어린 시절부터 나와 B 사이에는 잦은 경쟁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우정을 뒤흔들어 놓을 만큼 중요하고 미묘한 경쟁은 경희를 차지하기 위한 것이다. B는 나의 약혼녀나 마찬가지였던 경희와 6·25전쟁 중 내가 없는 사이를 틈타 결혼해 아이까지 둠으로써 나에게 극심한 배신감을 준다. 내가 배신감에 휩싸여 있을 때, 마침 B는 모반 혐의로 구속되어 사형수가 된다. 그리고 나는 공교롭게도 그를 죽이는 사수 중 한 명이 되어 B를 총살하는 데 가담하게 된다. 이 작품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보여 주는 나와 B의 대결 구도와 경쟁 심리의 묘사가 뛰어난 작품이다.
<충매화>는 앞서 살펴본 작품들과는 달리 현재와 과거가 복잡한 양상으로 뒤섞여 있다. 마치 공식이라도 되듯 현재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현재로 나오는 구성 방식이 이 작품에서는 보다 복잡한 구성 방식으로 과거와 현재가 뒤엉켜 나타난다. 사회적 편견과 인습이 한 인간의 삶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를 다루면서, 우리가 믿고 있는 윤리적인 잣대가 진정 옳은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꺼삐딴 리>는 같은 해 제7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유명해진 작품으로 전광용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과거 회상을 통해 드러나는 일제시대부터 해방기를 거쳐 1950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의 흐름을 타고 카멜레온처럼 변모해 온 기회주의자 이인국의 삶의 행적이 이 소설에서는 중요하다. 더욱이 반민족적 행위나 사고방식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고사하고 시대의 흐름을 타지 못하고 임기응변에 능하지 못한 자는 ‘멍추’라고 믿는 몰지각한 이인국을 통해 시대 인식과 비판을 보여 준다.
<죽음의 자세>는 남과 북이라는 분단의 상황이 개인의 삶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에 주목하고, 이로 인해 고통 받는 인물을 보여 준다. 즉, 민족적 비극의 역사적 현실 속에서 알게 모르게 고통 받았던 수없이 많은 개인들의 삶을 덕수의 개인사를 통해 드러낸다. 이는 작가의 관심이 사회적 문제로 확대된 것을 의미하며, 덕수가 보이는 처남에 대한 신고와 은닉 사이의 갈등은 작가의 윤리의식에 대한 고민을 나타낸다.
200자평
전광용의 소설은 자신의 주변 이야기에서 벗어나 다양한 소재를 취재함으로써 다채로운 이야기를 보여 준다. 또한 유달리 형식미를 염두에 두어, 치밀한 구성을 통한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묘사로 작품을 형상화해 소설의 전범을 마련하려 했다. 이 책에는 그러한 특징을 잘 살펴볼 수 있는 <흑산도>, <사수>, <충매화>, <꺼삐딴 리>, <죽음의 자세>를 수록했다.
지은이
전광용(全光鏞)은 1919년 3월 1일, 3·1운동이 일어난 날 함경남도 북청에서 부친 전주협과 모친 이녹춘 사이에서 2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37년 북청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한 뒤, 1945년 경성경제전문학교(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전신)에 입학, 2년 수료했다. 1947년에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고, 김기영, 박암 등과 더불어 ‘국립대학극장’을 결성해 창립 기념으로 체호프 원작 <악로>를 서울대학교 강당에서 공연했다. 일찍이 문학에 심취했던 전광용은 193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별나라 공주와 토끼>로 입선한 바 있으며, 서울대 국문과 진학 후에는 정한숙과 더불어 정한모가 관계하는 <시탑> 동인이 되어 김윤성, 조남사, 공중인, 구경서 등을 알게 된다.
‘낙산문학회’ 제1회 작품발표회를 가졌던 1948년에는 정한숙, 정한모, 남상규, 김봉혁 등과 <주막> 동인을 구성해 매월 합평회를 가졌다. 또 김기영, 박암 등과 극단 ‘고려예술좌’를 창립하고, 이듬해 입센 원작 <유령>을 가지고 중앙극장에서 ‘고려예술좌’ 창립 공연을 했다. 같은 해 단편 <압록강>을 <서울대학신문>에 발표했으며, 고명중학교 교사를 사임하고 한성일보 기자로 입사했다.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을 졸업한 1951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했고, 1953년 대학원을 수료했다. 1954년에는 ‘흑산도 학술조사단’에 참가했고, 이때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쓴 <흑산도>가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정식으로 문단에 등장했다. 같은 해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로 취임했다.
1958년에는 <주막> 동인 재건 월례 합평회 제1회 모임을 정한숙의 집에서 가지고, 단편 <지층>(<사상계>), <해도초>(<사조>), <벽력>(<현대문학>) 등을 발표했다. 이듬해 창작집 ≪흑산도≫가 을유문화사에서 출간되었고, <사수>(<현대문학>), <크라운 장>(<사상계>)과 장편 ≪현란공석사≫(<문예>)를 발표했다. 1962년 대표작 <꺼삐딴 리>(<사상계>)를 발표하고 이 작품으로 제7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이어 1963년에 장편 소설 ≪태백산맥≫(제1부, <신세계>)과 ≪나신≫(<여원>)을 연재했다. 1975년 창작집 ≪꺼삐딴 리≫를 을유문화사에서, 1977년 단편 선집 ≪동혈인간≫을 삼중당에서 출간했고, 1979년에는 <곽서방>으로 제2회 흙의 문학상을 수상했다.
한편, 학자로서의 역할도 커 1955년부터 1984년까지 서울대학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1972년 문리대 문학부장을 지내고 1973년 <신소설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사이 소설 연구에 몰두해 <설중매 연구>(1955), <이인직(李人稙) 연구>(1957) 등을 비롯해 <한국어 문장의 시대적 변천> 등 평론과 논문을 다수 발표해 한국문학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또 사회 활동에도 참여해 1974년부터 1981년까지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부회장, 1980년부터 1985년까지 한국비교문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71년에는 제38차 세계작가대회(에이레공화국 더블린 개최)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고, 대만, 홍콩, 태국, 이스라엘, 그리스, 이탈리아, 일본 등 각국 교육 문화 시찰을 했다. 1974년에도 제39차 세계작가대회(이스라엘 예루살렘 개최)에 참석하고 대만, 홍콩, 일본 등 각국의 교육 문화 시찰을 했다.
1984년부터는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세종대학교 초빙교수를 지냈고, 1988년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고문, 한국비교문학회 고문, 한국소설가협회 대표위원, 한국 현대문학연구회 회장 등을 역임하다 같은 해 6월 20일 당뇨병으로 별세했다.
엮은이
윤효진은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주요 논문으로는 <종군위안부 여성에 대한 재조명-노라 옥자 켈러의 ≪종군위안부≫론>, <손창섭 소설의 인물 연구> 등이 있다. 현재 경희대학교, 대진대학교에 출강 중이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흑산도
사수
충매화
꺼삐딴·리
죽음의 자세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방아쇠를 힘껏 당겼다. 총신이 위로 퉁겨 올라가는 반동을 느꼈을 뿐이다. 화약 냄새가 코를 쿡 찌른다. 그때는 이미 B는 다른 네 방의 탄환을 맞고 쓰러진 뒤였다. 그는 넘어지면서도 끝까지 나에게 이겼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총소리와 함께 나 자신도 그 자리에 비틀 비틀 꼬꾸라졌다.
-68쪽
‘흥, 그 사마귀 같은 일본 놈들 틈에서도 살았고, 닥싸귀 같은 로스케 속에서도 살아났는데, 양키라고 다를까… 혁명이 일겠으면 일구, 나라가 바뀌겠으면 바뀌구. 아직 이 이인국의 살 구멍은 막히지 않았다. 나보다 얼마든지 날뛰던 놈들도 있는데 나쯤이야…’
-15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