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정관집≫에는 서문(序文) 2편과 시(詩) 64편 74수, 잡저(雜著) 13편이 실려 있다. 상당히 적은 양이긴 하지만, 현재로는 일선 스님의 유일한 저작물이다. 서문은 경신년(庚申年) 석총도인(石潨道人)의 것과, 신사년(辛巳年)에 창수가 쓴 것 두 가지가 있다.
선승(禪僧) 일선(一禪)은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의 인물로, 서산대사 휴정[淸虛休靜]의 4대 제자 중의 한 분이었다. 조선조 불교계가 휴정 문하로 도배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른바 4대 문파의 수장이었다고 하니 스님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세속 나이는 4대 제자 중 가장 많다. 그는 깊은 산속 암자에서 청정 수도로 일관한 인물이다. 그의 시 속에는 자연과 함께하는 즐거움과 풀뿌리 속에서 느껴지는 향긋한 정취가 들어 있다. 별다른 수식이나 전고도 찾기가 힘들다. 그냥 담박하니 당시의 느낌을 몇 자 적어 두었을 뿐이다. 또한 그의 편지글 속에는 전쟁터로 나간 도반들의 안녕과 무운을 비는 마음이 가득 차 있다.
정관일선의 문학을 한마디로 규정하자면 ‘청정(淸淨) 수도(修道)와 출세간(出世間)의 불도(佛道)를 향한 탐구’라 할 수 있다. 그는 시를 통해 출가자의 본분과 수행 방법에 대한 철저한 인식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출가란 속세를 벗어나 인간 근원의 자성(自性)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나선 고달픈 길이다. 그 과정으로 짚신짝 하나로 온 천지를 답파한다. 자성을 찾기 위한 고행은 필요 불가결한 과정이다. 추위와 굶주림 등 육신의 고통을 수행자는 달게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구도자의 길이 늘 외로운 것만은 아니다. 숱한 자연의 모습이 옆에 있고, 그 과정에서 정신세계로 차 들어가는 깨달음의 기쁨[法悅]이 있다. 이제 연기와 노을, 그리고 산천은 친숙한 수행의 동반자가 된다. 영욕(榮辱)으로 가득 찬 세속의 범부(凡夫)들이 뭐라 하든 참선에 든 승려는 끝없는 구도의 길을 가야 한다.
또한 그는 시를 통해 주객 대립(主客對立)을 초월한 불도(佛道)의 세계를 그려 내었다.
정관일선은 이제 자신이 느낀 출세간의 경지를 다양한 모습의 시를 통해 전달함과 동시에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관일선이 추구하고자 했던 출세간의 세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깨달음을 표현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일단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여실(如實)하게 보는 요오(了悟)의 경지’라고 정의해 볼 수 있겠다. 세상 만물의 경계로부터 분별심을 끊고서, 다시 그 분별심이란 인식마저 끊어 버린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러서야 시인은 사물의 본질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이런 경지가 바로 ‘곧장 보되 보지 않고, 곧장 듣되 듣지 않는다(直見不見 直聞不聞)’는 경지다. 즉, 대상을 보지 않고 보는 것 또는 보되 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보지 않는다는 것은 견문지각(見聞知覺)의 단절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보고 듣고 알되, 그것을 의식하지 않고 그저 단적으로 보고 듣고 아는 무분별의 분별로서의 견문을 말하는 것이다. 단절된 것은 오직 주객 대립에서 본 대상적 세계일 뿐이지, 그것이 단멸된 뒤 높은 것은 높은 대로, 낮은 것은 낮은 대로의 여여(如如)한 실상(實相)의 세계는 분명히 현존하기 때문이다.
결국 정관일선은 교계(敎界)의 원로로서, 산사에서 철저한 청정 구도를 행한 인물이다. 그의 구도는 화두 참선의 방편으로 일관되게 진행되었다. 또한 그가 지향한 전미개오의 세계는 주객 대립의 분별상(分別相)을 끊어야 접근이 가능한 출세간의 세계였다. 그의 문학에는 용맹 정진의 끝에 맛보는 법열(法悅)의 세계에 깊게 침잠(沈潛)한 모습이 잘 형상화되어 있다.
200자평
산을 보니 그저 산이고, 물을 보니 그저 물이로다.
서산대사의 4대 제자 중 한 사람이자 16세기 청정수도의 대표자인 정관 일선대사의 문집.
꾸밈 없는 정갈한 그의 시를 통해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참다운 진리를 맛볼 수 있다.
지은이
정관 일선(靜觀一禪, 1533∼1608)은 1533년(중종 28)에 태어나 1608년(선조 41)년에 죽었다. 임진왜란 시기의 선사(禪師)로 성은 곽(郭), 호는 정관(靜觀)이며 연산(連山) 출신이다. 사명유정(四溟惟政), 편양언기(鞭羊彦機), 소요태능(逍遙太能)과 함께 청허휴정(淸虛休靜)의 4대 제자 중 한 사람이다. 15세에 출가해 백하선운(白霞禪雲)에게 ≪법화경≫을 배우고 그의 법화 사상(法華思想)을 전수했다. 그 뒤 법화 신앙에 심취해 ≪법화경≫을 부지런히 독송했고 그 공덕의 뛰어남을 역설하는 한편, 시주를 얻어 3000권의 종이를 마련하고 3000부의 경전을 인출해 보시(布施)하는 등 경전 유포에 큰 공훈을 남겼다. 한때 속리산 법주사(法住寺)에 머물렀고, 만년에 휴정(休靜)의 강석에 참학(參學)해 그의 심인(心印)을 이어받았다. 1608년 가을에 병을 얻어 덕유산 백련사(白蓮社)에서 입적했다. 그는 임진왜란 중에 승려들이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의승군(義僧軍)으로 나아가 전쟁에 참여함을 보고 승단(僧團)의 장래를 깊이 걱정했고, 전쟁에 참여하는 일이 승려의 본분인가에 대해 개탄했다. 또한 도반인 유정(惟政)에게 글을 보내 전쟁이 끝났으니 한시바삐 관복을 벗고 승가(僧家)의 본분을 다할 것을 권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당시 수도승이 보여 줄 수 있는 다양한 양상 중 청정 수도의 측면을 몸소 실천한 인물로 꼽힌다. 저서로는 ≪정관집≫ 1권이 있다.
옮긴이
배규범은 1998년 문학박사 학위(<임란기 불가문학 연구>)를 받은 이래, 한국학 및 불가 한문학 연구에 전력하고 있다. 한자와 불교를 공통 범주로 한 ‘동아시아 문학론’ 수립을 학문적 목표로 삼아, 그간 한국학대학원 부설 청계서당(淸溪書堂) 및 국사편찬위원회 초서 과정을 수료했으며, 수당(守堂) 조기대(趙基大) 선생께 사사했다. 경희대학교 국제교육원에서 지난 10여 년간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어 및 한자 강의를 진행했으며, (사)한국한자한문능력개발원의 한자능력검정시험 출제 및 검토 위원으로 재임 중이다. 2002년부터 2008년까지 학술진흥재단의 고전 번역 프로젝트를 수행했으며, 2000년부터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고·순종≫ 교열 및 교감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경희대(학진연구교수), 동국대(학진연구교수), 북경 대외경제무역대학(KF객원교수)을 거쳐 현재 중국 북경공업대학 한국어과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중국 학생들에게 한국어 및 한국 문화를 강의하고 있다. 해외에서 우리의 말과 문화에 대한 보다 심도 깊은 연구와 전파라는 새로운 뜻을 세우고 활동 중이다. 주요 논저로는 ≪불가 잡체시 연구≫, ≪불가 시문학론≫, ≪조선조 불가문학 연구≫, ≪사명당≫, ≪한자로 배우는 한국어≫, ≪요모조모 한국 읽기≫, ≪외국인을 위한 한국 고전문학사≫, ≪속담으로 배우는 한국 문화 300≫ 등이 있고, 역저로는 ≪역주 선가귀감≫, ≪한글세대를 위한 명심보감≫, ≪사명당집≫, ≪허정집≫, ≪허응당집≫, ≪청허당집≫, ≪무의자 시집≫, ≪역주 창랑시화≫, ≪정관집≫, ≪초의시고≫ 등이 있다.
차례
정관집 서문(靜觀集序)
원효암에서 자다(宿元曉庵)
대둔사(題大芚寺)
은선대에 머물면서 우연히 읊다(留隱仙偶吟 二首)
화두조(話頭鳥)
우연히 읊다(偶吟)
고적대로 돌아가다(歸高寂臺)
설잠 스님에게(贈雪岑)
현묵 스님에게(贈玄黙)
우연히 읊다(偶吟)
상원암에서(題上院 三絶)
맹롱 노스님에게(贈盲聾禪老)
임종게(臨終偈)
불망기(不忘記)
산당에 비 온 뒤에(山堂雨後)
산에서 지내며(山居)
밤에 앉아(夜坐)
준 도인에게 드리다(贈俊道人)
비 온 뒤 은선대에 올라(雨後登隱仙臺 二絶)
우연히 읊다(偶吟)
도파원으로 돌아가며(歸兜波院留別 二絶)
화장사에서 우연히 읊다(華藏寺偶吟)
진 선백에게(贈眞禪伯)
낡은 절간(古寺)
산에서 우연히 만나(邂逅山中)
태전 화원에게(贈太顚畵員 二絶)
두견 소리 들으며(聞杜鵑)
시승에게(贈詩僧)
지 법사의 시운을 빌려(次智法師韻)
망선루(題望仙樓)
두류산을 바라보며(望頭流山)
다시 금강대에 올라(重上金剛臺)
늦가을 단풍객에게 장난삼아 드리다(戱贈秋後遊山客)
맹롱 선자에게(贈盲禪者)
칼을 보내 준 것에 감사하며(謝惠劒)
천병이 부채 보내 준 것에 감사하며(謝天兵惠扇)
호남으로 스님을 보내며(送湖南禪伯)
보은 태수에게 올리다(上報恩太守)
우연히 읊다(偶吟)
도적을 피해 떠도는 진 수재에게(贈陳秀才避賊流寓)
임종게(臨終偈)
이른 봄(早春)
지 선객에게(贈芝禪客)
홍 생원에게 올리다(上洪生員)
삼로 스님의 시운을 빌려(次三老韻)
오대산으로 돌아가는 해 선백을 보내며(送海禪伯歸臺山)
관 선자에게 드리다(贈觀禪子)
정 수재에게 드리다(寄丁秀才)
소 수재에게 드리다(贈蘇秀才)
칠불암(題七佛庵)
반야봉에 올라(登般若峯)
장춘사에서 묵으며(宿長春寺)
통도사(題通度寺 二首)
준 선백에게 드리다(贈俊禪伯)
길 가기 어려움(行路難)
선자에게 드리다(贈禪者)
벗님에게(寄友人 二首)
일본으로 가는 정 대장을 전송하며(送政大將往日本)
본원 자성 천진불(本源自性天眞佛)
윤 선화에게 드리다(贈允禪和)
두류산의 스님에게 드리다(贈頭流僧)
권사(勸詞)
행각하다 옛 산에 돌아오다(行脚歸故山)
도솔산에 돌아와(歸兜率山)
희 법사에게 드리다(贈法師熙上人)
시자인 보천 선자에게 보이다(示侍者普天禪子)
박 거사에게 인지라는 도호를 지어 드리다(朴居士須道號以仁智書贈)
경전을 만든 뒤의 발문(印經後跋)
정 법사의 편지에 답하다(答靖法師書)
도대장 연형에게 올리다(上都大將年兄)
송운대사에게 올리다(上松雲大師)
한식 제문(寒食祭文)
관음 기도문(觀音祈禱文)
미타·관음·세지의 점안문(彌陀觀音勢至點眼文)
죽은 아비를 위한 제문(亡父疏)
죽은 어미를 위한 제문(亡母疏)
죽은 스승을 위한 제문(亡師疏)
물과 뭍에서 죽은 이를 위한 제문(水陸疏)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출가인은 모름지기 범류(凡流)를 벗어나는 것
몸에는 한 바리때뿐이니 온갖 일 다 그만이라.
내 마음 물외의 자연과 이미 하나 되었거늘
인간 세상의 영욕을 어찌 구하리오.
그윽하니 세월 소요하며 보내며
산천 곳곳을 자유롭게 노니네.
말로써 자성을 알려고 할진대
불 속 헤쳐 물거품 찾는 꼴이리.
●일찌감치 속세를 잊고 고향을 떠나
짚신 한 짝으로 명산들을 두루 답파했지.
어제는 가을 달 구름 따라가더니
오늘은 봄바람 물을 건너오네.
고기 먹는 이 어찌 쓴 나물 맛을 알 것이며
비단옷 입은 이 어찌 추운 장삼을 알리오.
산수(山水) 속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되
만 리 길 아득하니 길 가기 어렵구나.
●세상에 가진 것 무엇이더냐
이 한 몸밖에 남은 것 없다네.
사대는 끝내 흩어져 버릴 것이니
허공을 날아오를 듯 상쾌하구나.
●생 입으로 지껄이던 것 부끄러이 여겼더니
이제야 요연히 많은 생각을 뛰어넘었구려.
말하는 것이나 말하지 않는 것 모두가 도(道) 아니니
엎드려 청하노니 그대들은 스스로 깨달을지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