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제갈량은 위(魏)·촉(蜀)·오(吳) 삼국시대에 실존했던 역사적인 인물이다. 문학이나 영화, 드라마 등에서 무소불위의 인물로 형상화되면서 한국과 일본에도 널리 알려졌다. 그는 ‘삼고초려(三顧草廬)’, ‘적벽대전(赤壁大戰)’ 등의 역사적 사건을 근거로 해서 다양한 작품에서 신출귀몰한 예지와 신선 같은 풍모를 지닌 신비한 인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대개의 작품에서 그를 지나치게 허구적인 인물로 과장하고 있다. 이는 각 작품들이 시대적 요구와 가치관의 변화를 수용한 결과다. 그러나 이런 과장된 모습이 그의 진면목은 아니다.
이 책의 목적은 삼국시대라는 역사적 배경에서 실존했던 제갈량의 진면목을 탐색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관련 문헌들을 엄선해 작품을 선별했다. 저자가 생존했던 시기와 근접한 진(晉), 수(隋), 당(唐) 시대 사료인 ≪삼국지(三國志)≫, ≪수경주(水經注)≫, ≪북당서초(北堂書抄)≫, ≪태평어람(太平御覽)≫ 등에 수록된 관련 자료를 선택해서 원문을 명시하고 내용을 해석했다. 설명이 필요한 경우에는 비교적 상세히 주석을 달았다.
제갈량은 문집류 같은 독립된 저술을 남기지는 않았다. 동한(東漢)과 삼국시대는 전쟁과 혼란으로 점철된 격랑(激浪)의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를 살면서 일관된 사상을 대변하는 저술을 남기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장편의 철학적· 문학적인 그의 글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촉한의 중신으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남긴 글에는 시대적 가치와 실사구시를 실천하고자 했던 고뇌와 깊은 뜻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200자평
제왕이 아니었다. 혁혁한 전공을 세운 장군도 아니요, 자신의 주군을 천하의 주인으로 만들지도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삼국지의 그 누구보다도 더 뚜렷이 그의 이름을 기억한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유명하게 만들었을까? 소설에서, 영화에서, 고사성어에서, 우리는 여러 형태로 포장된 제갈량을 만나 왔다. 그러나 이제 가공된 형상이 아니라 진실 그대로의 그를 만날 때다. 그가 남긴 글 한 편 한 편에는 정치에 대한 포부, 신념 등 정치가로서의 모습뿐 아니라 자기반성과 자식에 대한 사랑 등 한 인간으로서의 고뇌가 그대로 묻어 있다.
지은이
제갈량(諸葛亮)은 중국 삼국시대의 저명한 정치가다. 자(子)는 공명(孔明)이고 동한시대 영제(靈帝) 광화 4년(181) 7월 23일에 서주의 낭야군 양도현에서 태어났다. 부친 제갈규(諸葛珪)는 태산군의 승(丞)을 지냈고, 세 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을 두었다. 첫째 아들이 제갈근(諸葛瑾), 둘째 아들이 제갈량(諸葛亮), 막내아들이 제갈균(諸葛均)이었다. 제갈량은 어릴 적에 생모인 장씨(章氏)가 병으로 사망했고, 이에 부친은 얼마 후에 재가했다. 이후 부친 역시 영제 중평(中平) 6년(188)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때에 제갈량은 나이 겨우 8세로 그의 가족 모두는 숙부인 제갈현(諸葛玄)에게 기탁했다. 제갈현은 예장 태수로 부임하며 어린 제갈량, 제갈균과 두 명의 조카딸들을 데리고 갔고, 나이가 많은 제갈근과 그 계모는 고향에 남겨 두었다.
형주목 유표에게 의탁한 제갈현을 따라 양양에 거주하던 제갈량은 제갈현 사후 방덕의 보살핌으로 양양의 서쪽 교외인 융중에서 농사일과 독서를 하며 은거 생활을 했다.
건안 12년(207) 유비의 삼고초려를 통해 유비의 군사가 되었다. 그는 조조와 대항하기 위해 손권과 동맹을 맺고 촉한과 한실의 부흥을 위해 노력했다. 건흥 원년(223) 유비가 백제성에서 대패한 후 사망하자 그 아들 유선을 후주로 즉위시키고 보필했으며 촉한의 내정에 주력했다. 이후 중원을 평정하기 위해 6차례에 걸쳐 북벌을 단행했으나 군량미 부족 등 여러 원인으로 실패하고 건흥 12년(234) 과로로 인해 오장원에서 사망했다.
옮긴이
조영래(趙永來)는 중국 고대사에 관심을 두고 있는 연구자로서 경희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중국의 베이징대학교 역사학과에서 중국 고대사를 전공했다. <북조(北朝) 시기 잡호(雜戶)의 연구>로 석사 학위를, <북위(北魏) 탁발(拓跋) 통치 집단의 형성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베이징수도사범대학교 역사학과 객원교수를 거쳐서 현재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와 경희사이버대학교, 숭실사이버대학교 등에 출강하고 있다. 중국 고대사 가운데 특히 진한(秦漢)과 위진남북조사(魏晉南北朝史)의 통치 집단의 형성과 민족 문제에 관심을 두고 북방 민족의 정권 수립과 지역화 과정에 관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아울러 선진(先秦) 시기의 제자백가의 사상과 목록학에 관심을 갖고 있는데, 특히 역사 문헌학적인 지식을 근간으로 역사 문헌의 체계적인 분류와 문헌 사료의 효율적인 이해와 활용에 관한 문제를 주의 깊게 보고 있다. 역서로는 ≪중국학 개론≫, ≪신자≫가 있으며, <16국 시기 호군제(護軍制) 연구-호한 분치(胡漢分治)를 중심으로>, <盛樂及代北地區與拓拔鮮卑的建國>, <중국 소수민족 정책과 민족 간부 양성>, <‘신중화주의’ 속의 ‘통일적 다민족국가론’>,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 사부(史部)의 분류 체계에 관한 기원 연구>, <중국 역사지리 문헌의 문헌학적 분류와 그 기원의 연구>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차례
1. 초려에서 나눈 문답(草廬對)
2. 후제를 대신해 쓴 조위 정벌을 알리는 조서(爲後帝伐魏詔詔書)
3. 돌아가신 황제의 유언 선포를 요청하는 표문(請宣大行皇帝遺詔表)
4. 남방의 정벌 상황을 알리는 표문(南征表)
5. 출사표(出師表)
6. 후출사표(後出師表)
7. 여개를 천거하는 표문(薦呂凱表)
8. 이평을 탄핵하는 표문(彈李平表)
9. 요립을 탄핵하는 표문(彈廖立表)
10. 요립을 다시 탄핵하는 표문(又彈廖立)
11. 사건을 아뢰는 표문(上事表)
12. 기산 사건을 아뢰는 표문(祁山表)
13. 장완을 추천하는 비밀 표문(擧蔣琬密表)
14. 후주에게 올리는 표문(自表後主)
15. 상서에 올리는 공문(公文上尙書)
16. 감 부인을 소열황후로 추존할 것을 아뢰는 글(上言追尊甘夫人爲昭烈皇后)
17. 가정에서 자신의 강등을 요청하는 상소(街亭自貶疏)
18. 정의에 대해서 논의하다(正議)
19. 맹약을 파기하는 것이 좋다는 주장에 대한 논의(絶盟好議)
20. 법정에게 답변한 서신(答法正書)
21. 관우에게 답변하는 서신(答關羽書)
22. 두미에게 보내는 서신(與杜微書)
23. 두미에게 답변하는 서신(答杜微書)
24. 유파에게 보내는 서신(與劉巴書)
25. 이엄에게 답변하는 서신(答李嚴書)
26. 이엄에게 다시 보내는 서신(又與李嚴書)
27. 장예에게 보내는 서신(與張裔書)
28. 장예와 장완에게 보내는 서신 1(與張裔·蔣琬書 1)
29. 장예와 장완에게 보내는 서신 2(與張裔·蔣琬書)
30. 장완과 동윤에게 보내는 서신(與蔣琬·董允書)
31. 맹달에게 보내는 서신(與孟達書)
32. 보즐에게 보내는 서신(與步骘書)
33. 육손에게 보내는 서신(與陸遜書)
34. 손권에게 보내는 서신(與孫權書)
35. 조운이 적애의 잔도를 소각한 일에 대해 형 제갈근에게 알리는 서신(與兄瑾言趙云燒赤崖閣道書)
36. 형 제갈근에게 홍수로 인해 잔도가 파괴된 일에 대해 보내는 서신(與兄瑾言大水赤崖橋閣悉壞書)
37. 수양곡 길에 대해 형에게 알리는 서신(與兄瑾言治綏陽谷書)
38. 진진에 대해 형에게 알리는 서신(與兄瑾論陳震書)
39. 손송에 관해 형 제갈근에게 알리는 서신(與兄瑾言孫松書)
40. 아들 교에 대해서 형 제갈근에게 알리는 서신(與兄瑾言子喬書)
41. 아들 첨에 대해 형 제갈근에게 알리는 서신(與兄瑾言子瞻書)
42. 아들을 훈계하는 서신(誡子書)
43. 아들을 재차 훈계하는 서신(又誡子書)
44. 외조카를 훈계하는 서신(誡外生書)
45. 법정에 대한 답변과 질문(爲法正答或問)
46. 죄인의 사면이 인색하다는 의견에 대한 답변(答惜赦)
47. 강유에게 답하는 글(答姜維)
48. 이풍에게 보내는 교서(與李豊敎)
49. 내민을 파면하는 교서(黜來敏敎)
50. 요주를 칭찬하는 교서(稱姚伷敎)
51. 군신 속관에게 내리는 교서(與群下敎)
52. 재차 군신 속관에게 내리는 교서(又與群下敎)
53. 참군과 연속에게 보내는 교서(與參軍掾屬敎)
54. 장병에게 자신의 과실 지적을 권하는 교서(勸將士勤攻己闕敎)
55. 군령(軍令)
56. 팔진도법(八陳圖法)
57. 목우와 유마를 만드는 방법(作木牛流馬法)
58. 군사들이 긴 강을 건너는 첩(師徒遠涉帖)
59. 교유에 관해 논함(論交)
60. 선제에게 황충에 대해서 논함(與先帝論黃忠)
61. 마속 참수에 관해서 논함(論斬馬謖)
62. 장완을 재차 칭찬함(又稱蔣琬)
63. 양보음(梁甫吟)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장군은 황가의 후손이고, 신의(信義)는 천하에 알려져 있습니다. 널리 영웅들을 모으고 애타게 인재를 구하고 계시니, 만약 형주와 익주를 차지해 험한 지형을 이용해서 방어하고, 서쪽으로 제융과 화친하며 남쪽으로는 이족과 월족들을 위로하고 달래면서 밖으로는 손권과 동맹을 맺고, 안으로는 내치에 주력해 청명한 정치를 실행하신다면 천하의 형세에는 반드시 변화가 생길 것입니다. 그때 훌륭한 장수를 파견해 형주의 군대를 이끌고 남양과 낙양(洛陽)을 공략하십시오. 그리고 장군이 익주의 백성과 군마들을 이끌고 친히 관중을 향해 북벌을 단행하십시오. 그렇게 하신다면 백성들이 어찌 대나무 소쿠리에 음식을 준비하고 호리병에 마실 것을 담아서 장군을 영접하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대업은 가히 성공할 것이며, 한(漢) 황실은 다시 부흥하게 될 것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소신에게 도적을 토벌하고 한을 부흥하라는 직무를 위임해 주십시오. 이를 이루지 못하면 죄과에 따라서 소신을 처벌하시고, 선제의 영전에 고해 주십시오. 폐하의 성덕(聖德)이 널리 알려지지 않는다면 곽유지와 비의, 동윤 등의 허물을 꾸짖고, 그 과실을 처벌하시면 됩니다. 폐하께서도 마땅히 간언을 고려하시어 치국의 좋은 책략을 구하시매, 이들의 아언을 명찰(明察)해 채납(採納)하십시오. 그리고 마음속 깊이 선제의 유언을 따르시길 바랍니다.
소신은 받은 은혜에 감격하면서도 못내 먼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에 표를 올리니 눈물이 흘러 무슨 말을 올려야 할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국사를 함께 논의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지혜를 모아서 나라에 유익한 의견을 결집하는 것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꺼리고 싫어함이 있어 이를 피하려고 한다면 지속적인 토론은 어려울 것이고, 결과적으로 많은 오류와 손실이 발생할 것이다. 거듭된 토론을 통해서 적합한 방법을 얻는다면 그것은 마치 다 해진 짚신을 버리고 주옥을 얻는 것과 같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은 항상 여러 걱정 때문에 마음속에 있는 말을 모두 하지 못한다. 오직 서원직만이 이런 것에 대해서 우려하지 않았다. 그리고 동유재는 나를 도와서 7년 동안이나 국사를 의논했고, 내가 일을 주도면밀하게 처리하지 못하는 점에 대해서 그는 열 번이라도 계속해서 지적하고 의견을 개진했다. 만약 사람들이 서원직의 10분의 1만 배운다면, 혹은 동유재와 같이 성실하게 자신의 의견을 제시한다면, 이는 나라에 대한 충성일 뿐만 아니라 나 제갈량으로 하여금 잘못을 줄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첨은 올해로 이미 여덟 살인데 총명하고 사랑스럽습니다. 저는 이 아이가 너무 일찍 성숙해서 큰 인물이 되지 못할까 봐 걱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