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도스토옙스키와 “죽음의 집”의 경험
≪가난한 사람들≫로 엄청난 문학적 성공을 거둔 28세의 다소 오만한 젊은 작가는 페트라솁스키 서클에서 당대 인텔리겐차 사이에 유행하던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에 대한 이론에 접하게 된다. 그는 푸리에주의, 그리고 공산적 경제 원리와 그것을 기반으로 한 지상에서의 이상 국가 건설 이론에 심취해 전 민중이 하나같이 잘 사는 사회에 대한 꿈과 그들의 이론에 크게 공감한다. 그러나 자유주의 사상과의 이 같은 짧은 놀음은 도스토옙스키로 하여금 저 유명한 가짜 처형극과 시베리아 감옥에서의 4년간의 수감, 시베리아 도시에서의 6년의 유형이란 가혹한 대가를 치르게 한다.
4년간의 수감 생활은 도스토옙스키에게 그를 둘러싸고 있던 밀수꾼, 화폐 위조자, 어린이 강간범, 부친 살해범, 강도 등과 같이 일상생활에서는 마주치기 어려운 인간상과 그들이 저지른 거의 모든 형태의 범죄에 대해서 깊이 있게 관찰할 기회를 제공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죄수를 보며 그들의 범죄와 이에 대해 죄수들이 갖는 심리적인 태도, 그리고 그들 하나하나의 심리적 메커니즘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이러한 관찰을 통해 시베리아 유형 전 도스토옙스키가 갖고 있던 이데올로기는 많은 변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첫째, 작가는 인간 본성의 어둡고 야만적인 면을 발견하게 된다. 시베리아의 감옥은 작가에게 악을, 그것도 추상적인 원리가 아닌, 매일매일 한 사람 한 사람의 실제적 행동으로 나타나는 구체적인 악과 대면시켰다. 인간 본성의 심연 속에 있는 선과 악의 카오스와 악마적 요소의 우세를 보고 난 후, 푸리에주의의 인간 본성 이론으로부터 작가가 자신의 신념으로 받아들였던 ‘본성적인 선’에 대한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했다.
둘째,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라는 것에 대한 작가 자신의 신념에 대한 수정이 가해졌다. 도스토옙스키는 죄수들의 병적으로 야심 있는 성질이 때로는 자아의 이성에 반대되는 행동과 결과를 낳음을 보았고, 인간의 행위는 더 이상 이성으로 예측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셋째. 죄수들 간의 힘의 역학 관계에 대한 관찰을 통해, 그는 자신의 이전의 신념, 즉 인류가 어떤 지배자도 피지배자도, 또 가해자도 피해자도 없이 평등하고 동등한 관계에서 조화로이 살아갈 수 있다는 신념에 대한 명백한 반증들을 발견했다. 죄수들 간의 격렬한 우위 다툼을 목격하고 가해자이며 피해자가 되고자 하는 인간 본성의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 이 발견은 도스토옙스키로 하여금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개인들이 평화로이 공존할 수 있다는 이전의 믿음을 지지할 수 없게 했다.
이렇게 시베리아 유형이라는 개인적인 불행은 후일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천재 작가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경험이 된다. 범죄 심리와 심리 분석의 대가로 일컬어지는 작가 도스토옙스키의 많은 부분이 온갖 형태의 죄수들과 부대끼며 보낸 4년간의 시베리아 유형 생활에 빚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또한 이런 시베리아 경험과 성서 읽기를 통해, 종교 작가로서의 도스토옙스키가 태어나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가 경험한 4년간의 “죽음의 집”의 경험은 물론 개인적이고 현실적인 차원에서는 벌이요, 고통이었겠으나, 예술적 차원에서는 위대한 작가로 태어나기 위한 산고의 세월이었으며, 철학적 차원에서는 민중과 러시아성에 대한 깊은 깨달음의 기회였고, 종교적 차원에서는 길을 잃고 헤매던 어린 양이 다시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여정이었으며, 작가가 자신을 죽음을 통해 부활한 나자로와 동일시하게 되었던 대사건이었다.
200자평
생의 행로에서 만나는 시련과 장애-그것은 벌인가, 상인가?
천재 작가 도스토옙스키가 실제 유형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반기록적인 소설 ≪죽음의 집의 기록≫.
온갖 종류의 범죄자를 모아 놓은 “죽음의 집”의 모습을 통해 작가는 앞으로 나오게 될 그의 대작들의 주요 테마인 죄와 벌의 문제, 농노와 귀족의 문제, 감옥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 타락과 구원의 문제, 러시아성과 서구성의 문제 등에 대해 진지하게 사고하고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지은이
표도르 도스토옙스키(Фёдор Михайлович Достоевский, 1821∼1881)는 1821년 10월 30일(신력으로는 11월 11일) 군의관이었던 미하일 안드레예비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모스크바 빈민 병원에서 일을 했으며, 잔인할 정도로 엄격한 성격의 소지주였다. 종교적이고 온화한 성격의 어머니와는 달리, 잔혹한 아버지의 이미지는 도스토옙스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쳐, 그의 작품 속 아버지들은 처음부터 부재하거나, 무능하거나, 잔학하여 자신의 자식들을 길거리로 내몰아 몸을 팔게 하거나, 자식들에게 살해당하거나, 아니면 그 자신이 자녀에 대한 육체적, 정신적, 심지어 성적인 폭군으로 등장하거나 한다.
도스토옙스키가 태어나고 유년시절을 보낸 곳은 그의 아버지가 의사로 일하던 모스크바 빈민 병원이었는데, 그 병원의 많은 환자들은 모두가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으며, 어린 도스토옙스키는 이들과 대화하기를 즐겼다. 가난의 심리학의 대가가 될 씨앗이 여기서부터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작가 스스로도 평생을 가난의 굴레에서 허덕였다. 그는 돈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결코 “현실적”이지 못했던 사람이고, 자신이 감당할 능력이 있건 없건 간에 떠넘겨지는 짐을 사양할 줄 몰랐다.
도스토옙스키의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1846년)에는 작가의 가난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과 가난이 인간 심리와 삶에 끼치는 영향들, 그리고 가난하고 핍박받는 자들에 대한 강한 동정심이 잘 나타나 있다. 이런 젊은 날의 도스토옙스키에게 형제애 속에서 모두가 풍요롭게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가르치는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의 모임인 페트라솁스키 서클은 목마른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반가운 만남이었다. 하지만 차르 니콜라이 1세의 반동 정치하에서는 당대 현실에 대한 비판뿐만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유토피아 등에 대해 토론하는 것, 금지 서적을 읽는 것들만으로도 총살감이었다.
고골에게 보내는 벨린스키의 편지를 낭독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된 도스토옙스키는 사형은 간신히 면했으나 시베리아로 끌려갔고, 4년간의 감옥 생활과 또 4년간의 유형이 끝난 후, 도스토옙스키의 인간관 및 세계관은 완전히 다른 것이 되어 있었다. 1840년대 사회주의적 유토피아를 지향했던 도스토옙스키는 1860년대 완전히 극우 보수주의자(슬라브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유형을 마치고 돌아온 작가는 1861년 러시아의 문화적 정치적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그의 형 미하일과 함께 잡지 ≪시대(Время)≫를 창간했고, 1863년 ≪시대≫지가 정치적 이유로 발행정지 조치를 받게 되어 폐간된다. 이듬해 형 미하일과 함께 두 번째 잡지, 더욱더 극우적이고 슬라브주의적인 잡지 ≪세기(Эпоха)≫를 발간하여, 그 첫 호에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발표한다.
1866년, 후에 그의 부인이 된 속기사 안나를 고용하여 ≪노름꾼≫과 ≪죄와 벌≫을 속기하게 하여 발표하고, 1868년 그리스도를 닮은 “긍정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인간”을 그리고자 한 ≪백치≫를, 1872년 ≪악령≫을, 죽기 한 해 전인 1880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모두 ≪러시아 통보≫에 발표했다.
이렇게 해서 세계문학사 중 가장 위대한 작가 도스토옙스키는(역자는 이렇게 말하는 데 일말의 주저함도 없다) 1881년 1월 28일, 그의 소설만큼이나 극적인 사건들이 넘쳐 나는 자신의 삶을 마감했다. 러시아 철학자 니콜라이 베르댜예프가 말한 것처럼, 도스토옙스키라는 작가를 낳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지구상에 러시아인의 존재 이유는 충분하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제대로 접한 독자라면 베르댜예프의 이 말에 충분히 공감을 할 것이다.
옮긴이
김정아는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서울대학교 박사과정 중 미국으로 유학해, 일리노이 대학교(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 슬라브 어문학부 대학원에서 슬라브 문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부전공으로는 폴란드 문학을 공부했다. 박사 논문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 나타난 숫자와 상징>이며, 다수의 소논문을 국내외 언론에 발표했고, 서울대학교 등에서 문학을 강의했다. 번역서로는 ≪집에서 한 남자가 나왔다≫(다닐 하름스, 청어람 미디어), ≪부실한 컨테이너≫(미하일 조셴코, 청어람 미디어), ≪되찾은 젊음≫(미하일 조셴코, 청어람 미디어), ≪지하생활자의 수기≫(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식을만드는지식), ≪카람진 단편집≫(니콜라이 카람진, 지식을만드는지식), ≪무엇을 할 것인가?≫(니콜라이 체르니솁스키, 지식을만드는지식), ≪가난한 사람들≫(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식을만드는지식) 등이 있다. 20세기 소비에트 문학과 소비에트 여성의 문제, 그리고 유토피아 문학에 관심을 두고 연구하고 있으며,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소비에트 시기 문학작품의 번역을 준비하고 있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제1부
제2부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 감옥에 들어가던 날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12월의 어느 해 질 녘이었다. 이미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고 있었고, 죄수들은 일터에서 돌아와 점호를 준비하고 있었다. 콧수염을 기른 하사관이 마침내 내게 이 이상한 집의 문을 열어 주었다. 이 집에서 나는 그 뒤 그토록 기나긴 세월을 지내야만 했고, 실제 체험하지 않고서는 백 번을 죽었다 다시 깨어나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느낌들도 참아 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예를 들어 나의 수감 생활 10년을 통틀어 가장 끔찍한 고통이 바로 단 한 번도, 단 1분도 혼자 있을 수 없다는 데 있을 줄 내가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작업장에서는 항상 감시병이 따라붙었고, 집에 돌아오면 200여 명의 동료 죄수들이 있어 단 한 번도, 절대로 혼자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내가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 우리나라 민중의 가장 숭고하고 가장 눈에 띄는 선명한 특징은 공정함과 그것에 대한 열렬한 갈망이다. 어디서나 장소를 가리지 않고, 또 그것을 할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떠나서 무슨 일이든지 앞장서는 수탉과 같은 습성이 우리 민중에게는 없다. 표면에 뒤집어쓴 겉껍질을 벗기고 알맹이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일체의 편견을 떨쳐 버리고, 그것을 좀 더 주의 깊게 관찰한다면 민중 속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현인들이 민중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자신 있게 말하는데 오히려 그 반대다. 현인들이야말로 민중에게 배워야 할 것이 아직 많다.
● 말이 났으니 말이지, 죄수를 도망가지 못하게 하거나, 적어도 그들이 도망가는 것을 좀 어렵게 하기 위해서, 정말로 그런 이유에서만 사람에게 족쇄를 채우는 것일까? 단언하건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족쇄는 하나의 수치이자, 치욕이며, 육체적 정신적 압박일 뿐이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족쇄는 절대로 그 누구의 도망에도 걸림돌이 될 수는 없다. 아무리 서투르고 손재주 없는 죄수일지라도 족쇄의 이음새를 톱으로 베거나 돌로 내리쳐 순식간에 쉽사리 부술 수가 있다. 족쇄는 정말로 아무것도 예방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만약 족쇄가 기결수에 대한 벌로써만 채워지는 것이라면, 그럼 또다시 묻겠다. 정말로 다 죽어 가는 죄수에게 벌을 줄 필요가 있을까?
● 족쇄가 떨어져 나갔다. 나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것을 손에 들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찬찬히 바라보고 싶었다. 그것들이 방금 전까지도 내 발에 붙어 있었던가 하고 생각하니 새삼 놀라웠다.
“그럼, 안녕히! 안녕히 가시게들!” 죄수들이 띄엄띄엄, 거칠지만 그러나 뭔가 만족스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안녕히! 자유여, 새로운 삶이여,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이여…. 이 얼마나 눈부시게 빛나는 영광의 순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