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이광명은 정제두(鄭齊斗)에게 양명학을 배워 성리학 중심의 조선 유학과 대립되는 양명학을 수용해 발전시킨 인물이다. 그의 백부인 이진유가 신임사화 때 노론 대신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가 영조 등극 후 죽임을 당했는데, 1755년 나주괘서(羅州掛書) 사건이 일어나면서 이미 사망한 이진유에게 역률이 추시되고, 이광명도 연좌율에 따라 함경도 갑산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24년을 살다가 78세에 삶을 마감했다. 사후에 이조참의로 추증되었다. 《증참의공적소시가(贈參議公謫所詩歌)》는 그가 갑산 유배 기간 중 지은 작품집이다. 가사 〈북찬가〉, 풍속기 〈이주풍속통(夷州風俗通)〉, 시조 세 편 그리고 한시 200여 수를 담고 있다. 이 책에서는 그중 국문으로 된 작품들을 상세한 해설, 주석과 함께 소개한다. 책 말미에는 영인본도 함께 수록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사대부 유배 가사, 〈북찬가〉
〈북찬가〉는 크게 유배 가기 전, 유배지로 가는 도중, 유배지 도착 후의 심경을 서술한다. 유배 가기 전 편모슬하에서 효를 행했으나, 충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기에 유배형을 언도받은 것을 군주의 은전(恩典)이라 여기고, 연좌에 따른 화(禍)를 가문 부활의 계기로 삼으려는 의지를 보인다. 유배지로 가는 도중에도 자신의 고통스러운 처지를 그림과 동시에 관심을 사회와 국가로 확장해 백성에게 삼일우(단비)가 되고 싶은 마음, 군주를 향한 연군지정,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우국 정신을 새로이 각성한다. 유배지에 도착한 이후에는 전거(典據)와 역사적 인물들을 떠올리며 자신을 굴원, 백거이와 같은 반열에 놓고 새로운 도약을 꿈꾼다.
함남 갑산 풍속기, 〈이주풍속통〉
이 작품은 이광명이 유배지인 갑산에서 1756년 3월 16일경 지은 것으로, 이 지방의 지리, 풍속 등을 기록한 풍속기다. ‘이주(夷州)’는 갑산의 별칭이고 ‘풍’은 인간 이전의 자연환경을, ‘속’은 인간에 의해 이루어진 문화 일체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매우 다양하다. 갑산의 지세, 산천, 기후부터 농사, 토산, 교역, 주거, 음식, 의복은 물론 토속, 예절, 인심, 신앙, 자녀 생산 등을 담고 있어 일종의 인문 지리적 성격을 보이고 있다. 험한 귀양지로 유명했던 갑산을 실제 찾아가 그곳에서 주인을 만난 것에서부터 여러 갑산의 풍속을 서술하고 말미에서는 이곳의 교화와 방비책을 제언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 작품은 한글 산문으로 기록된 풍속기인 데다, 함경도 방언을 적극적으로 구사하고 있는 점, 함경도 갑산의 생활 현장과 지역민의 정서를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는 점 그리고 갑산 지역 인민들과 그들의 삶에 대한 깊은 관심과 너그러운 시선 등을 담고 있는 점 등에서 특히 의의가 있다.
200자평
18세기 학자 이광명이 갑산 유배 기간 중에 쓴 글 중 국문으로 된 작품을 소개한다. 이광명은 스승 정제두와 함께 우리나라에 양명학이 자리잡을 수 있도록 정리, 발전시킨 인물이다. 이 책에서는 연로한 모친을 두고 유배 가는 서글픔과 임금에 대한 사모의 정을 읊은 국문 가사 〈북찬가〉, 국문 시조 세 편, 그리고 갑산 지역의 풍속을 함남 방언으로 묘사한 풍속기 〈이주풍속통(夷州風俗通)〉을 소개한다. 전형적인 사대부 유배 가사의 특징을 보여 국문학적으로도 의미 있을 뿐 아니라, 함남 지역의 방언, 지리, 풍속 등을 생생히 드러내고 있어 국어학과 인문 지리학적으로도 높은 연구 가치가 있다.
지은이
이광명(李匡明, 1701∼1788)은 호가 해악장인(海嶽丈人)이며, 숙종 27년(1701)에 서울 서대문 밖 반송방(盤松坊)에서 태어나 정조 2년(1778) 함경도 갑산 유배지에서 78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부친은 소론인 이진유(李眞儒)의 막냇동생인 이진위(李眞偉, 1681∼1710)이고 모친은 송병원(宋炳遠)의 딸 은진 송씨(恩津宋氏)다. 그가 10세 때 부친상을 당하자 강화도(江華島) 사기리(沙器里)에서 장사 지내고 그곳에서 복거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건창(李建昌) 대까지 250여 년 동안 그의 가문의 세거지(世居地)가 되었다. 또한 이광명이 강화도에 살게 된 것은 당쟁의 결과였다. 그의 백부 이진유는 소론으로서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노론의 거두를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가 영조 등극 이후 노론이 정권을 재탈환하자 그는 추자도로 유배를 가게 되어 그곳에서 〈속사미인곡(續思美人曲)〉을 지었다. 몇 년 후 이진유는 서울로 압송되어 국문(鞠問) 중 장폐(杖斃)하게 된다. 이로부터 이진유 일가는 정계에서 멀어지게 되고, 종질(從姪)이던 이광명은 어려서 편모와 함께 강화도에서 살게 되었다.
한편, 이광명은 강화도에서 모친의 훈육을 받았으며 강화도 진강(鎭江)에 있던 정제두(鄭齊斗)에게 사사(師事)했다. 우리나라 양명학(陽明學)은 정제두에 이르러 학문 체계가 정리되어 성장하게 되는데 그 근거지가 강화도였다. 정제두가 강화로 간 것은 1709년이고 이광명이 그곳에 이주한 해는 1710년으로, 자연스럽게 이광명은 정제두로부터 양명학을 수학했고 그의 손서(孫壻)가 되어 이후 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조선의 양명학이 계승 발전하게 되었다. 이처럼 이광명은 성리학 중심의 조선 유학과 대립되는 양명학을 수용해 발전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이후 이광명이 55세 되던 1755년에 나주괘서(羅州掛書) 사건이 일어나, 신임사화 때 노론 대신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가 영조 등극 후에 죽임을 당한 이진유에게 역률이 추시되자[을해옥사(乙亥獄事)], 이광명도 연좌율에 따라 갑산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24년을 살다가 78세에 삶을 마감했다.
옮긴이
김명준(金明俊)은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고려대학교, 상지대학교, 충북대학교, 상지대학교 강사, 고려대학교 초빙 교수, 파키스탄 국립외국어대학교 한국어학과 조교수 및 학과장을 역임했다. 지금은 한림대학교 인문대학 인문학부 국어국문학 전공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조선 중기 시가와 자연》(공저, 2002), 《악장가사 연구》(2004), 《한국 고전 시가의 모색》(2008), 《중세 동서 문화의 만남》(공저, 2008), 《중세 동서 시가의 만남》(공저, 2009), 《고려 속요의 전승과 확산》( 2013), 《고전 시가 여행》(공저, 2016), 《한국 고전 문학 작품론》(공저, 2018), 《어촌 심언광의 문학과 사상 2》(공저, 2018), 《생각하며 읽는 한국 고전 시가》(2018), 《중세 동서 시가의 만남》(공저, 2009) 《한국 고전 문학과 정치》(2021) 등이 있고, 번역·자료서로 《악장가사 주해》(2004), 《교주 조선 가요 집성》(2008), 《개정판 고려 속요 집성》(2008), 《악장가사》(2011), 《시용향악보》(2011), 《악학궤범》(2013), 《신증 고려 속요 집성》(2017), 《한국 고시조 선집》(2019), 《덕온 공주가의 한글2》(공저, 2020), 《주해 신정가보》(2021) 등이 있다.
차례
북찬가(北竄歌)
고독한 상황
은거지에 정착
편모 봉양을 통한 효의 실천
유배형을 당한 처지와 노모 걱정 그리고 군은
노모와 작별
귀양길의 고통과 사회로의 관심 전이
귀양길의 어려움과 사회적 관심 확대
귀양길에서 들은 비보와 유배지에 도착
유배인의 처지와 고통스러운 삶 그리고 갈망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의지의 좌절
희미한 희망, 효친과 연군
시조 세 편
청천에
놀기 좋은
하늘 땅
이주풍속통(夷州風俗通)
갑산의 풍속을 적다
갑산에 도착
갑산의 물산과 식생활
주인의 은덕
토산품
농경
축산과 특산품
상거래
주거
민속과 유풍
육아와 인사 예절
갑산의 상황 및 실태 그리고 제언
원문
해설
참고 문헌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후손이 없어 처량해 내 몸 다해
천만 근심 다 버리고 여생을 즐기려니
놀랍게도 뜻밖에 재앙을 당해
30여 년 묵힌 임금의 특전 오늘날에 또 면할까
시골 감옥에 스스로 찾아가서 처분을 기다릴새
맑은 날 벼락 내리고 눈 위에 서리 치니
눈썹에 떨어진 재앙 독에 들어간들 피할런가
내 몸 화와 복이야 저 하늘만 믿었던들
외로운 우리 편모 누구로 위안 삼을꼬
해와 달이 높고 밝아 옥석(玉石)을 가릴 것이니
임금의 명령이 울렸으니 더하기야 하겠는가
죽은 나무 봄을 만나 마른 뼈에 살이 오르니
남쪽에 숨든 북으로 유배 가든 죄가 아니라 영광일세
베틀 북 던졌던 놀란 마음 동구 밖에서 감격해 목메어 우네
임금의 은혜와 하늘이 준 행운은 결초한들 다 갚을까
〈북찬가〉에서
하늘땅 생긴 후에 삼수감산(三水甲山) 척박하다
풍상을 겪어 보니 세상과 다른 곳인 듯
두어라 이 또한 임금 영토이니 성은(聖恩)을 내리실까 하노라.
〈시조 세 편〉에서
삭방(朔方)이 추워 삼복(三伏)에도 누비옷 못 벗고, 8, 9월부터 바람이 쓰리고 심동(深冬)에 얼핏 나서도 살이 에이고 곧 얼음이 얼되, 방이 끓기에 한고(寒苦)를 모르니 도시(都是 : 아무리 해도) 주인의 은혜를 [어찌 다] 이르오리?
가는 데 없이 갇힌 듯이 꼭 앉아 듣고 보니 외촌(外村) 성중(城中) 사람들이 다 이 집에 복주(輻湊)해(몰려들어) 대소사(大小事)를 의논하니, 뇌실(牢實)하기(믿음직하기) 제일 인물이요, 오는 사람마다 밥 먹여 재우고 대접하며, 유걸(流乞 : 거지)까지 못 미칠 듯이 주어 보내니 심덕(心德)으로 90세 노친 데리고 있는 친척 자손까지 성당(成黨)해 식속(食粟)하는(먹고사는) 아치(雅致 : 아름다운 풍속)더라.
〈이주풍속통〉에서
농상(農桑 : 농사와 양잠)을 4월에야 시작하는데 오히려 추워, 쇤 아이들이 해 퍼진 후에 일어나 털갓 쓰고 개가죽 저고리 개가죽 바지 입고 소가죽 다로기(가죽신)를 무릎까지 동치고 샤발(미끄럼 방지용 기구)이라 해서 쇠등자 같은 데 바닥에 대갈(징) 박아 신고, 식전(食前)에 둥굴소(수소) 암소 두셋에 가다기에 보습 맞추어 발구(수레)에 싣고, 조총(鳥銃) 같은 속 빈 나무에 씨 넣어 가지고 나가 한 소약이(송아지) 쇠! 쇠! 쇠! 하며 갈아 보리, 귀 밀, 수수, 조, 기장, 피, 콩, 목밀을 차차 심고 인하여 기슴(김)[이 난 밭]에 들어 조전(朝前)에 쌍훌치기(소 두 마리로 하는 후치질)하고 들어와 밥 먹고, 느긋하게 자다가 인해서 점심 먹고 또 한낮에 나가니 실없이 애태워 보이되, 이 땅 농사가 적게 부쳤다가 조상(早霜)하여 미처 못 채우면 실수 되매 광작(廣作)해서 날현날현하고(나른하고), 추수까지 하면 실은 쉴 때 없고, 풍년에야 엄부렁한 듯해도 서른 뭇을 한 하지라 하고 한 하지에 열댓 말 한 섬이 나서 보니 한 섬 덖으면 막해서(마지막에) 쌀 서 말 다 배니 종세근고(終歲勤苦)하여 소출이 맹랑하고, 가을부터 겨우내 소발구에 피나무, 황철, 익갈 두어 아름이나 하고 여남은 길 나무를 동동이(도막도막) 잘라 실어다가 뫼처럼 가리니 이곳 것 중에 으뜸 보배요, 서울 같으면 무비판재(無非板材)도 좋은 재목(材木)이라, 수삼백금(數三百金)을 쉬 받을 것을 큰 도끼 두셋으로 서로 보라 박아 가며 때려 일조(一朝)에 똑 따개니, 실로 아깝되 허허 소리 하며 내팽개치듯 하는 상(象)이 보기 구경이러라.
〈이주풍속통〉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