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데카당스의 방황 속에서 만난 구원의 여신
시인이자 조각가인 다카무라 고타로는 1902년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한 후 뉴욕과 런던, 파리를 거치며 서구 문화에 심취한다. 그러나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가 마주한 것은 봉건적이고 폐쇄적인 기성 미술계의 모습이었다. 극심한 문화적 괴리에 빠진 그는 아버지를 포함한 일본 미술계의 속물성과 파벌주의를 비판하다 지친 나머지 데카당스에 몸을 맡긴다. 불안과 초조, 절망 가운데서 정신적 위기를 경험하고 있을 때,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 바로 나가누마 지에코였다. 그녀의 청순한 태도와 욕심 없는 소박한 기질, 자연에 대한 무한한 사랑에 강한 감명을 받은 고타로는 열렬한 연애 끝에 그녀와 결혼함으로써 퇴폐에서 벗어나 정화된 삶을 살면서 소박하고 인도주의적인 구어 자유시를 완성한다.
지에코 발병하다
고타로는 가독 상속권을 포기하고 자그마한 아틀리에에서 지에코와 두 사람만의 소박한 가정을 꾸린다. 화가였던 지에코와 시인이자 조각가인 고타로의 결혼 생활은 전형적인 가난한 예술가의 삶이었지만, <어느 날 초저녁>이나 <깊은 밤의 눈> 등 결혼 초의 시들을 보면 이들이 가난한 와중에도 충만한 애정으로 행복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던 와중, 갑작스런 불행이 두 사람을 찾아온다. 지에코가 정신 분열증에 걸린 것이다. 1932년 첫 자살 시도 이후 구주쿠리 해변에서 요양도 했지만 지에코의 병세는 나아지지 않아 1935년 도쿄의 제무스자카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그리고 고타로의 지극한 애정과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1938년 10월 마침내 정신 분열증과 속립성 폐결핵으로 인해 사망한다.
세상에 다시없을 사랑의 노래
1942년, 다카무라 고타로는 사랑하는 아내 지에코를 처음 만나 연애를 시작한 시절부터 결혼 생활, 그리고 발병과 광기, 죽음의 시기를 거쳐 사후 추모기에 이르기까지 지에코의 모습을 담은 시 29수와 우타 6편, 산문 3편을 수록한 시집 ≪지에코초(智恵子抄)≫를 출간한다. 연애 시절과 신혼 초기에 느끼는 애정과 행복, 지에코의 투병을 함께하는 동안의 좌절과 고통, 지에코 사후의 고독과 회한, 그리음이 작품마다 생생히 드러난다. 고타로가 남긴 720여 편에 달하는 시들 중에서도 특히 이 ≪지에코초≫는 지고지순한 순애(純愛)의 시집으로 이름을 남겨 지금까지 일본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열렬한 사랑을 받고 있다.
200자평
일본의 근대 시인 다카무라 고타로가 사랑하는 아내 지에코에게 바친 시집이다. 두 사람이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부터, 정신 분열증에 걸린 지에코를 간호하고, 결국 사별하기까지 아내를 향한 한없이 깊고도 애틋한 사랑을 소박하고 솔직한 언어로 노래했다. 세상에 다시없을 지고지순한 사랑을 만날 수 있다.
지은이
일본에서 국민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다카무라 고타로(1883∼1956)는 그의 생애 동안 720여 편에 달하는 자연과 인간, 사랑을 노래하는 시 작품을 남겼다. 또한 그는 70여 점의 조각 작품을 완성한 조각가로 활약했으며, 이외에도 번역, 평론 등에서 업적을 남긴 예술인으로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다카무라 고타로는 1883년(메이지 16) 도쿄 시타야(下谷)에서 불사(仏師)였던 아버지 고운(光雲)과 어머니 와카[わか, 통칭은 도요(とよ)]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1898년 미술학교에 입학하고 1906년 2월에서 1909년) 6월에 걸쳐 미국 뉴욕,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했는데, 이 시기를 통해 예술혼에 눈뜨고 서구 문명과 그 속에서 형성된 근대적 자아를 체득하게 된 고타로는 귀국 후 제2의 고운이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와의 갈등, 파벌이나 연고(縁故)가 일체를 지배하는 구태의연한 일본 예술계라는 벽을 마주하고, 스스로의 생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시작하게 된다. 귀국 직후 예술 전위 모임인 ‘팬의 모임(パンの会)’에 참여해 질풍노도의 탐미적·데카당스적인 생활을 보냈다. 1909년에는 고마고메(駒込)에 있는 조부의 은거처를 아틀리에로 개조해 예술 활동을 하고, 1910년에는 일본 최초의 실험적 화랑인 로켄도(琅玕洞)를 열기도 했으나, 공조자가 없었기 때문에 실패로 끝났다. 같은 해 12월에 하시모토 야에코의 소개로 지에코를 알게 되는데, 그녀는 일본여자대학 가정과를 나와, 여성 해방을 표방한 잡지 ≪세이토(青鞜)≫의 표지 그림을 그릴 정도로 그림에 재능을 가진 신여성이었다. 깨어 있는 정신을 가진 두 예술가의 만남은 연애 시기를 거쳐 자연스럽게 결혼으로 이어졌다. 고타로의 첫 시집 ≪도정≫은 지에코와 결혼을 앞둔 1914년(다이쇼 3) 10월 출판되었다. 고타로는 지에코와의 연애, 결혼 생활을 내용으로 한 시를 40여 년간 써서 그것을 지에코의 사후 ≪지에코초≫라는 연애시집으로 출간했고(1941. 8), 가난 속에서도 운명적 끈으로 연결된 두 사람의 절절한 사랑을 생생하게 그려 내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고타로는 지에코의 죽음 이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본 정부의 정책에 찬동하는 시를 써서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1945년 9월 공습으로 도쿄에 있던 아틀리에가 소실되자 이와테현으로 피난했는데, 종전 후에도 이와테현 시외에 있는 오타무라 야마구치(太田村山口)의 작은 오두막에서 지내며 자기 유적(自己流謫)의 자연 친화적 생활을 보냈다. 1945년 12월 시집 ≪전형≫을 시작으로 자연과 순수한 시작(詩作)의 정신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작품들을 발표하는가 하면, 1947년 7월에는 인생을 되돌아보는 내용의 자전적 시편인 ≪암우소전(暗寓小伝)≫을 발표함과 더불어 제국예술원(帝国芸術院) 회원으로 추대되지만 이를 사퇴한다.
1950년 11월에는 ≪지에코초 그 후(智恵子抄その後)≫ 시문집을 출판하고, 70세가 되던 1952년 10월에 도와다 호반(十和田湖畔)에 세울 지에코 나부상(裸婦像) 제작을 위해 도쿄로 돌아간다. 1955년 12월 ≪요미우리 신문(読売新聞)≫에 시 <생명의 큰 강(生命の大河)>을 발표한 것을 끝으로 1956년 4월 화가 나카니시 도시오(中西利雄)의 아틀리에에서 7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영원한 반려자인 지에코와의 만남과 결혼, 사별은 다카무라 고타로의 인생에 매우 큰 비중을 차지했다고 볼 수 있으며, ≪도정≫, ≪지에코초≫, ≪기록≫, ≪전형≫, ≪지에코초 그 후≫를 포함하는 그의 7권의 시(문)집은, 일본 근대 시사에 뚜렷한 업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메이지, 다이쇼, 쇼와에 걸친 일본 근대사의 격변기 속에서 한 예술가이자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 내고자 했던 시인의 인생 기록으로서 크나큰 감명을 주고 있다.
옮긴이
김정신(金貞信)은 경북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경북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석·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서정주 시의 변모 과정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19년 2월에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일어일문학과에서 <다카무라 고타로(高村光太郞) 시에 나타난 공간의 표상 연구>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5년 8월부터 경북대학교에서 문학의 이해 등을 가르쳐 왔으며, 현재는 경북대학교 교육개발본부 교양교육센터에서 대학 글쓰기를 강의하고 있다. 전공 분야는 서정주와 최승자 시 연구이고, 현재의 관심 분야는 한일 근현대 비교 문학이다. 저서로는 ≪서정주 시정신≫(국학자료원, 2002), ≪한국 근·현대시 바로 보기≫(새미, 2009), ≪고통의 시 쓰기, 사랑의 시 읽기≫(아모르문디, 2019)가 있고, 논문으로는 <윤동주의 탄식시 연구>(2015), <대학생 글쓰기의 효과적 첨삭 지도 방안−sakubun.org와 TAE 이론의 변용 및 적용을 중심으로−>(2016, 공저), <최승자 시에 나타난 사랑의 의미−번역 텍스트 ≪상징의 비밀≫이 5시집 ≪연인들≫에 미친 영향 관계를 중심으로>(2017), <≪상록수≫와 ≪사선(死線)을 넘어서≫에 나타난 영향 관계 연구−농촌 공동체의 의미를 중심으로>(2018) 등이 있다. 시집으로는 ≪묘비묘비묘비≫(시세계, 1992), ≪이 그물을 어찌하랴≫(문학의전당, 2008),≪당신이 나의 배후가 되었다≫(문학의전당, 2020)가 있다. 공역서로 ≪일본 명단편선≫(지식을 만드는 지식, 2020년 출간 예정)이 있다.
김태영(金兌映)은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어과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대학 대학원 인문사회계연구과 일본문화연구전공(日本文化研究専攻) 석·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일어일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언어문화학부 강사로 재직 중이다. 일본 고전 문학을 전공했으며, 현재는 일본 문학 전반, 일본 문화학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공저로 ≪일본 문학의 기억과 표현≫(제이앤씨, 2015), ≪놀이로 읽는 일본 문화≫(제이앤씨, 2018)가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 <≪源氏物語≫における薫の主人公性に関する一考察−薫の人物造型と<まめ>とのかかわりを中心に−>(2015), <薫と浮舟−宇治十帖後半部の物語における男と女−>(2017), <浮舟巻の方法ー物語の方法としての<関係>を中心に−>(2018), <柏木物語の方法と表現−光源氏物語における位置を中心に−>(2019) 등이 있다. 공역서로 ≪우지 습유 모노가타리≫(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9), ≪일본 명단편선≫(지식을 만드는 지식, 2020년 출간 예정), ≪사이카쿠의 여러 지방 이야기≫(지식을 만드는 지식, 2020년 출간 예정)가 있다.
차례
임에게
어느 날 밤의 마음
두려움
어느 날 초저녁
교외의 사람에게
겨울 아침의 눈뜸
깊은 밤의 눈[雪]
인류의 샘
우리
사랑의 탄미
만찬
나무 아래 두 사람
광분하는 소
메기
밤의 두 사람
당신은 점점 예뻐진다
천진난만한 이야기
동서동류
미의 감금에 건네주는 자
인생 원시
바람을 타는 지에코
물떼새와 노는 지에코
값 매길 수 없는 지에코
산록의 두 사람
어느 날의 기록
레몬 애가
황량한 귀가
떠난 그대에게
매실주
우타 여섯 수
지에코의 반생
구주쿠리 해변의 초여름
지에코의 종이 오리기 그림
부록
다카무라 고타로(高村光太郎) 시에 나타난 공간의 표상 연구−지에코 관련 시를 중심으로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값 매길 수 없는 지에코
지에코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다.
지에코는 갈 수 없는 곳을 가고,
할 수 없는 것을 한다.
지에코는 현신(現身)의 나를 보지 않고,
내 뒤의 나를 연모한다.
지에코는 괴로움의 무게를 이제는 버리고,
끝없는 황막의 무의식권에서 방황한다.
나를 부르는 소리가 자꾸 들리지만,
지에코는 이미 인간계의 차표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