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랭보(Arthur Rimbaud, 1854∼1891)는 생전에 문학적으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20세기 초반 문학과 예술의 모든 영역에서 과거와 전통을 뛰어넘어 현대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면서 그의 시 세계와 작품들은 새롭게 발견되었다. 특히 초현실주의 같은 과거, 또 이성이나 합리 등과 단절하고 새로운 인식과 사고에 기초한 전위적이고 현대적인 미학을 추구하는 시인과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시인이 삶과 문학에서 보여 준 실존적, 미학적 양상은 소위 모더니티 문학의 개척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따라서 랭보는 현대 시문학과 예술의 의미 있는 출발점으로서 주요한 시학을 구축하고, 그 미학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랭보의 시 세계에서 지속적인 시적 경향과 명확한 시 이론을 뚜렷하게 파악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이는 랭보가 살아간 격동적이고 찰나적인 시인의 모습과 그 사이 문학적이고 실존적인 삶의 격렬하면서도 부단한 변화와 함께 시인의 문학 세계가 내포하는 시 의미의 난해성에도 그 원인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시 세계와 그 의미, 그리고 시 특성에 접근이 쉽지 않다는 것이 바로 랭보의 시 세계가 가지는 다른 얼굴이다. 말하자면 랭보의 시 세계는 ‘무질서의 질서(ordre de désordre)’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랭보의 초기 시는 주로 목가적이고 이상적인 자연을 노래하며 ‘이상(l’idéal)’과 ‘조화(l’harmonie)’에 대한 전형적인 ‘비전(Vision)’의 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고전적 또는 파르나스적 경향의 시인에서 벗어나 랭보 고유의 역동성과 상상력을 특징으로 하는 그의 시적 세계를 최초로 보여 주는 작품으로 <취한 배(Le Bateau ivre)>를 들 수 있다. 랭보의 이러한 시적 방향 전환에서 아주 중요한 일명 ‘투시자(Voyant) 이론’을 포함하고 있는 ‘투시자의 편지(lettre du voyant)’를 보면, 이 편지에서 랭보는 자신의 시 세계의 근본이 되는 ‘투시자의 이론’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시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의 첫 번째 연구는 자신에 대한 인식입니다, 완전한 인식요. 그는 자기 영혼을 탐색하고, 그것을 검사하고, 그것을 시험하고, 그것을 깨닫지요. 그가 그것을 알게 되는 순간부터, 그는 그것을 가꾸어야 합니다.
이렇게 철저한 자기 인식 아래 영혼을 가꾸고 계발함으로써 시인은 스스로 ‘투시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랭보는 이러한 자아 인식과 인식의 한계에 대한 고찰을 통해 시인의 역할을 탐구하며, 시인의 임무가 현실을 깨닫고,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며, 언어를 통해 이를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랭보는 시가 개인의 내면세계와 경험을 탐구하는 수단임을 강조함으로써, 그의 시에서는 자아의 내면을 탐구하고, 이를 통해 개인적인 감정과 경험을 객관적이자 현대적으로 표현하는 데 큰 관심을 두게 된 것이다.
이런 투시자 이론은 이전의 작가들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예를 들면 미슐레나 발랑슈 또는 고티에 같은 작가들에게서 ‘투시자’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재능이고 그래서 시인은 선택된 사람이라는 오르페우스 이미지이지만, 랭보에게는 위에서 보듯 철저한 자기 검증과 연구를 통해 이르는 노력의 결과다. 물론, 서구의 전통적 이미지인 구도자로서의 시인의 역할을 전면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런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능력과 자신감을 얻기까지의 과정에서 이전 작가들과 다른 성격을 보이는 것이다. 랭보는 시인의 고전적 전형인 오르페우스 이미지에서 인간에 더 가까운, 프로메테우스(Prométhée) 이미지가 투영된 새로운 현대적 시인상을 정립하려는 것이다.
200자평
보들레르와 함께 현대 프랑스 시문학의 출발점이라 할 랭보의 시와 시론 모음이다. 초기 작품에서 벗어나 자신의 문학 세계를 구축하는 과도기에 해당하는 산문시집 <<지옥에서 한 철>>과 그의 문학론을 드러내는 편지를 함께 번역함으로써, 랭보의 문학 세계를 집중적으로 조망한다. <<지옥에서 한 철>>의 시 9편 전편을 수록한 책으로 국내 유일하다. 랭보 시학 이론과 그 적용의 정수를 가려 실으며 책을 관통하는 랭보의 문학관을 설명하는 <‘불의 도둑’ 프로메테우스 시인 랭보>를 곁텍스트로 수록했다.
지은이
아르튀르 랭보(Arthur Rimbaud, 1854∼1891)는 1854년 북프랑스 샤를빌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빈번한 주둔지 이동과 어머니와의 성격 차이로 거의 부재 상태였고, 후에는 완전한 별거 상태에 들어감으로써 어머니 혼자 아이들을 데리고 가정을 이끌어 가게 된다. 이로 인해 유년 시절부터 아버지의 부재에 대한 그리움과 혼자서 가정을 이끌어 가야 하는 어머니의 차가운 성격과 기독교적 엄격함에 대한 반항과 저항이 나타나기 시작해서, 그의 초기 시에 이런 성향이 잘 드러나고 있다.
16세가 되던 1870년은 랭보에게 의미 있는 한 해가 된다. 1월에 프랑스어로 된 그의 첫 시작품인 <고아들의 새해 선물>이 발표되고, 후에 시인의 시 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며 스승이자 친구 관계로 지내게 되는 수사학 교수 이장바르를 만나게 된다.
1871년은 랭보에게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이 시기를 전후로 랭보는 결정적으로 파르나스 경향의 시 세계를 버리고 독창적인 문학 세계를 추구하게 된다. 그는 당시 파리 문학계의 유명 인사였던 베를렌에게 편지를 하고, 그의 대표적인 작품인 <취한 배>와 함께 파리로 올라가 그를 만난다. 이후에 그 유명한 두 사람 사이의 일화가 펼쳐진다. 방금 결혼해 신혼 가정을 꾸리고 있고 랭보보다 10년이나 연상인 베를렌은 가정을 버리고 랭보와 함께 유럽 전역을 같이 돌아다니게 된다. 그러나 두 사람의 성격은 판이하고 또한 서로 추구하는 문학적 성향도 달라, 결국은 다툼으로 브뤼셀에서 베를렌이 랭보에게 총을 쏘고, 이 사건으로 베를렌은 감옥에 가게 되고 랭보는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때 고향에서 쓰게 되는 작품이 바로 《지옥에서 한 철》로서, 시인 자신이 유일하게 펴낸 산문 시집이다. 이후 둘은 거의 왕래가 없었고, 랭보는 여전히 그 특유의 방랑벽으로 또다시 다른 시인과 유럽 전 지역을 돌아다니는데, 이때 쓴 시가 바로 그의 사후에 나오게 되는 시집 《일뤼미나시옹》이다. 이때가 시인의 나이 25세.
이어 그는 문학 세계를 완전히 버리고 다른 일을 하게 된다. 유럽 전역은 물론, 중동 그리고 자바 지역 등을 전전하면서 노동자, 용병, 건축 감독 등으로 일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 아프리카에서 무기 거래를 하며 상인으로 일하다, 병이 나 프랑스로 돌아와 다리 절단 수술을 받은 후 곧 사망한다. 시인의 그때 나이는 37세였다.
옮긴이
연세대학교 불어불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 4대학에서 <랭보의 《일뤼미나시옹》 시집에 나타난 시적 현대성에 대하여> 논문으로 프랑스 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중앙대학교 연구교수로 재직하며 프랑스 문학(19∼20세기 시문학)과 문화 그리고 그리스 신화에 대해 연구, 강의하고 있으며, 20∼21세기 프랑스와 유럽의 멀티미디어와 문화적 다양성에 관해서도 연구하고 있다.
차례
지옥에서 한 철
예전에, 내가 제대로 기억한다면
나쁜 혈통
지옥의 밤
헛소리 1. 분별없는 처녀 − 지옥의 남편
헛소리 2. 언어의 연금술
불가능
섬광
아침
이별
투시자의 편지
편지 01
1870년 5월 24일 테오도르 드 방빌에게 보낸 편지
편지 02
1870년 8월 25일 조르주 이장바르에게 보낸 편지
편지 03
1870년 11월 2일 조르주 이장바르에게 보낸 편지
편지 04
1871년 5월 13일 조르주 이장바르에게 보낸 편지
편지 05
1871년 5월 15일 폴 드므니에게 보낸 편지
편지 06
1871년 6월 10일 폴 드므니에게 보낸 편지
편지 07
1871년 8월 15일 테오도르 드 방빌에게 보낸 편지
편지 08
1871년 8월 28일 폴 드므니에게 보낸 편지
편지 09
1872년 6월 에르네스트 들라예에게 보낸 편지
편지 10
1873년 5월 에르네스트 들라예에게 보낸 편지
편지 11
1873년 7월 4일 폴 베를렌에게 보낸 편지
편지 12
1873년 7월 5일 폴 베를렌에게 보낸 편지
편지 13
1873년 7월 7일 폴 베를렌에게 보낸 편지
부록: ‘불의 도둑’ 프로메테우스 시인 랭보
해설
지은이에 대해
지은이 연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나는 모든 존재들이 행복의 숙명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 행동은 삶이 아니라, 어떤 힘을 허비하는 방법이며, 신경질이지. 도덕은 뇌의 나약함이고.
-44쪽
지금, 저는 저 자신을 가능한 한 최대로 천박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왜냐고요? 저는 시인이 되고 싶으니까요, 그래서 저 자신을 투시자로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결코 이해하지 못하실 거고, 그래서 저도 선생님께 좀처럼 설명드리지 못할 것 같네요. 그것은 모든 감각들의 착란을 통해 미지에 도달해야 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 고통들은 엄청나지요, 그렇지만 강해져야 하고 시인으로 태어나야만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저 자신을 시인으로 인식했습니다. 그건 제 잘못이 아니에요.
-9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