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초판본 한국 근현대소설 100선’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창작이 아닌 번역소설이라는 점에서 ≪지장보살≫은 그동안 주목받지 못한 작품으로 남았다. 그런데 번안과 창작 시비를 일단 제쳐 놓고 한 편의 ‘작품’으로 ≪지장보살≫을 읽어 보면 기본적인 소설적 요소와 형태를 갖추진 못한 이야기여서 당혹감을 감추기 어려울 것이다. 황당무계한 상황, 작위적인 구성, 인과성이 결여된 사건 전개, 종잡을 수 없는 인물 성격, 식상한 교훈, 주제의식의 착종 등 소설이 피해야 할 모든 결격 사유를 집약시켜 놓았다고 할 정도로 ≪지장보살≫은 소설적 완성도가 크게 떨어진다. 원작의 내용을 자의적으로 축소하고 변조한 번역이라는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지장보살≫의 이야기는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는데, 전반부는 우물 안 동굴에 갇히게 된 복내덕과 고명녀의 생존기이고, 후반부는 형리의 고백으로 고명녀의 정체가 밝혀지는 내용이 중심을 이룬다. ≪지장보살≫은 원작에서 기본적인 서사적 얼개만 차용하고, 구체적인 사건들과 그에 대한 서술방식은 신소설의 그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지장보살≫은 번역이라기보다는 번안에 근접해 있다. 원작의 내용을 거의 해체한 서사적 틀에 삽입된 신소설적 내용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전통적인 유교적 도덕률이고, 다른 하나는 대중적 흥미를 유발하는 다소 자극적이고 엽기적인 서사적 상황과 사건들이다.
김교제가 쓴 신소설은 대개 선악의 구별이 뚜렷한 가족 갈등을 주로 다뤘다. ≪지장보살≫에서도 주요 갈등은 복내덕과 조부 사이, 형리와 고명녀 사이 등 금전적인 이유로 얽힌 가족 관계에서 비롯된다. 가족 관계에서 빚어지는 갈등이 해결되는 방식은 여성 인물이 상실한 지위를 회복하고 이를 통해 가족들이 재결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여성의 지위와 역할을 매개로 한 이러한 갈등 해소는 전통적인 가족 이데올로기를 보존하고 강화하는 서사적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지장보살≫에서도 가족 갈등 문제와 그 해결은 고명녀의 상실된 지위 회복을 매개로 이루어지는데, 여타 신소설과 다른 점은 고명녀가 동굴에서 기거하는 미개인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가족서사의 틀에 모험소설적 요소가 가미된 이러한 서사가 대중독자의 흥미를 유발하게 됨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또 여성 인물의 상실된 지위 회복이 미개인이 문명인으로 개화하는 서사와 포개어진다는 점도 이색적인 설정이다. ≪지장보살≫을 지탱하는 서사의 한 축은 동물과 다를 바 없는 고명녀가 인간으로 거듭나는 개화교육 이야기인데, 그 교육의 마지막 관문은 친족체계의 질서를 도덕률로 내면화하는 것이다. 즉 고명녀는 복내덕을 사랑하는 일이 왜 불가능한지를 깨닫게 됨으로써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회복하는 동시에 개화된 여성이 될 수 있다. 여기서 근대적인 개화사상이 전통적인 유교적 도덕질서와 아무런 갈등 없이 결합하는 양상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러한 점에서 ≪지장보살≫은 번역소설이지만, 신소설적 주제를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다.
200자평
1912년에 나온 작품. 원작은 영국 소설 <밀수업자의 비밀>이다. 1907년 중국에서 <공곡가인>이라는 타이틀로 선보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김교제가 ‘지장보살’이라는 이름으로 번안했다.
지은이
아속(啞俗) 김교제(金敎濟)는 188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상오(金商五)는 군수를 지낸 반벌(班閥) 출신이다. 이러한 사실 외에 김교제의 집안이나 성장 과정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다. 훗날 그가 중국어로 번역된 서양소설을 읽은 사실로 미루어 짐작컨대 양반 계층의 유교적 가풍 속에서 어렸을 때부터 이미 한문교육을 충실히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20대에 이미 종5품에 해당하는 자리까지 오른 김교제는 1911년 ≪목단화(牧丹花)≫를 발표하면서 소설가로 변신하게 된다. 자세한 내막은 알기 어려우나, 대한제국의 멸망과 함께 관원의 신분을 잃게 되면서 작가의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신소설 작가로서 김교제의 위상은 이인직이나 이해조에 비해 낮게 평가된다. ‘이해조의 계승자’라는 우호적인 평가가 없지 않지만, 대체로 정론성과 계몽성이 퇴색되고 흥미 위주의 자극적이고 엽기적인 이야기로 변질된 신소설의 통속화 경향에 합류했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적지 않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적인 출판 상품으로서 신소설이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는 서사적 기법과 전략을 계발하였다는 점에서 근대성을 획득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엮은이
차선일은 부산외국어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태원 문학의 미적 자율성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경희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수학하며 근대 탐정소설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순수문학과 대중문학, 고급문학과 저급문학의 경계를 가로지르고 싶은 욕심 때문에 능력 밖의 연구에 몰두하며 애를 먹고 있다. 이후로 문학의 범위를 벗어나 철학과 사회학 등 인문학 담론을 공부하면서 문학 연구의 외연을 넓히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현재는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에서 민속학과 근대문학의 연결점을 찾는 골치 아픈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차례
지장보살(地藏菩薩)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복내덕은 불빛에 언뜻 보니 토굴 한구석 그중 으슥한 곳에 크나큰 나무통 두엇이 놓였는데, 그 속에도 무엇이 들었는지 통 뚜에를 박철(縛鐵)로 삥 두르고 나사못으로 듬성듬성 박아 꼭 봉했는지라, 가만히 생각키를, 통 뚜에를 저리 단단하게 봉했으니 저 속에 있는 것이 여간 은금보패(銀金寶貝) 뿐이 아니라 싶어, 기계창으로 가 도끼 한 자루를 얻어 들고 와서 통 뚜에를 우지끈 뚝딱 깨치고 보니, 그 속의 것이 모두 화주(火酒)라. 방장 켤 것이 없어 근심을 하던 차 천만뜻밖 화주를 얻으니, 목전의 긴요할 상은 여간 은금보패에 비할 바가 아니니 기쁜 마음이 어떠하리요.
그 후로는 매양 나무 조각에다 화주를 묻혀 불을 켠즉 촉이 없어도 곤색(困塞)함이 없으나, 화주에 불을 한 번만 달이면 거림(煤氣)이 대단하여 눈을 뜰 수 없는 고로 박부득한 경우 전에는 마구 켜지를 않더니, 하루는 노피득이 복내덕을 불러 우물 아래 세우고,
(노피득) “네가 요새 무슨 불을 켰느냐?”
(복) “아니올시다. 근래 불 켜 본 일이 도무지 없읍니다.”
(노) “허, 미거한 자식이로다. 내가 마침 굴 밖을 지나다가 시꺼먼 연기가 돌 틈으로 꾸역꾸역 나오는 것을 보고 와 묻는데 그래도 발명을 하느냐?”
하며 지재지삼(至再至三) 힐문을 하니, 복내덕이 할 수 없이 바른대로 고하고 다시 하는 말이,
“지금도 성냥이 많으니 촉은 없어도 화주만 켰으면 넉넉히 지낼 터이올시다.”
(노) “허, 화주 화주. 허, 네가 화주통을 얻었드란 말이냐? 이후에는 다시 켜지를 말어라.”
(복) “왜 화주도 켜지를 말라 하십니까? 촉을 얻기 전은 그 말씀을 봉승치 못하겠읍니다.”
(노) “이렇게 이른 뒤에 듣지 않으면 조석밥까지 안 주겠다.”
(복) “흥, 증손이 토굴 속에 한 번 들어온 이상은 벌써 죽기로 결단을 하였은즉, 굶어 죽은들 무엇이 원통하겠읍니까? 다행히 화주 두 통이 있으니 거기다 불을 질러 놓았으면 그 힘이 족히 중도옥 하나는 무찔러 버릴 것이요, 또한 뒷사람의 해를 덜겠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