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시마자키 도손 문학의 양대 산맥은 센다이(仙台) 시절의 ‘시’와 고모로(小諸) 시절의 ‘산문’에서 비롯한다.
도손은 이십 대 초반, 조용하고 적막한 센다이에서 일본 근대시의 출발을 알리는 ≪새싹집(若菜集)≫을 통해 낭만주의 시인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10년 후, 검은 돌과 모래, 황량한 고모로에서 인간과 자연을 객관적으로 묘사한 ≪파계(破戒)≫를 통해 자연주의 소설가로 우뚝 섰다. 산문으로의 전환은 도손 문학의 변신과 동시에 일본 문단에 파장을 일으켰다는 측면에서 문학사적 의의가 크다.
센다이에서 청춘 연애시집 ≪새싹집≫, ≪일엽편주(一葉舟)≫, ≪여름풀(夏草)≫ 세 권을 1년 사이 잇달아 발표하며 시의 형태를 새롭게 개척한 도손은 1897년 7월 도쿄(東京)로 돌아왔다. 촉망받는 시인의 기쁨도 잠시, 그의 꿈을 펼치기엔 문단 현실은 암울했다. 당시 시인의 사회적 위치는 매우 낮았고 일본어로 시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한계를 느끼며 심적 고통을 겪었다. 1898년 4월 도손은 뜬금없이 피아노를 배우기 위해 도쿄음악학교에 입학해 주변 문인들을 놀라게 했는데, 당시 절박했던 상황에서 그는 시와 음악의 상관성에 주목해 시의 새로운 리듬 모색에 나선 것이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생활고의 압박과 큰형 히데오(秀雄)의 연이은 사업 실패로 경제 위기는 극에 달했다. ‘새로운 자연, 새로운 태양, 새로운 청춘’을 자유롭게 구가하던 시인의 열정은, 생존이란 암담한 현실로 인해 좌절을 맛보며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결국 도손이 고모로행을 택한 이유는, 정신적·재정적 부담에서 탈피하고 싶은 마음에서, 그리고 ‘자신을 좀 더 신선하고 간소하게 하는 것’을 찾기 위해서였다. 1899년 4월 그는 도쿄를 떠나 기무라 구마지(木村熊二)가 창립한 고모로의숙(小諸義塾) 교사가 됐다. 부임 직후 이와모토 젠지(岩本善治) 소개로 메이지(明治)여학교 출신 하타 후유코(秦冬子)와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이듬해, 장녀 미도리(緑)에 이어 다카코(孝子)와 누이코(縫い子)까지 가족이 늘면서 교사의 박봉으로 생활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청춘을 노래하며 연애와 정열을 읊던 로맨틱한 꿈에서 벗어나 생활과 예술을 병행해야 하는 현실의 혹독함과 맞닥뜨리게 되면서 도손은 네 번째 시집 ≪낙매집(落梅集)≫(1901)을 끝으로 침묵의 3년을 보내야만 했다. 그 시기에 쓴 ≪낙매집≫에 수록된 <구름(雲)>은 ‘자연의 성서’, ‘산문의 서사시’로 불리는 러스킨의 ≪근대 화가론≫에 나온 구름 관찰을 응용한 산문시다.
이전에 시에 음악을 접목했던 도손은 산문 습작으로 회화(繪畵)에 주목했다. 같은 시기 부임한 미술 교사이자 수채화가인 미야케 가쓰미(三宅克己)에게 ‘사물을 바르게 보는 법’으로 사생(寫生)을 배워, 날마다 화가가 사용하는 삼각대를 들고 신슈(信州)의 황량한 고원으로 나가 농촌 생활과 사계절의 변화를 스케치하며 새로운 언어 표현의 지평을 넓혔다. 단순한 자연 묘사나 풍경 묘사가 아닌, 혹심한 추위와 더위 속에서 치열한 삶을 영위하는 농민의 고단한 일상을 허위와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실감나게 스케치하고자 했다. 고모로의 거친 자연과 맞서 투쟁과 순응을 반복하는 농부들의 지혜와 검소한 생활을 직접 보고 느끼고 배운 7년간이 도손의 생활 양식은 물론 문학 형식까지 변화시켰다. “고모로에 시골 교사로 가서 학생이 되어 돌아왔다”는 고백에서 그의 삶에 일어난 혁신적 변화를 읽어 낼 수 있다.
산문의 본격적인 습작으로, 지쿠마(千曲) 강 일대와 아사마(浅間) 산록의 고원, 검은 돌과 모래, 열풍까지 자연과 인간을 관찰해 작품화한 것이 ≪지쿠마 강 스케치(千曲川のスケッチ)≫다. 스케치한 당시의 수첩이 소실되어 그 시작과 내용, 스타일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현행 ≪지쿠마 강 스케치≫는 과거의 자료를 근거로 했다. 또한 ≪중학세계(中學世界)≫라는 발표지 성격을 고려해 젊은이들이 읽기 쉬운 것을 선택, 수정해서 은인 요시무라 다다미치(吉村忠道)의 자녀 시게루(樹) 앞으로 쓰는 형식을 취했다.
작품은 표제가 보여 주듯, 아사마 산록의 고모로와 기타사쿠(北佐久) 지방을 중심으로, 때로는 미나미사쿠(南佐久)의 지쿠마 강 상류 일대, 때로는 하류의 나가노(長野)와 이이야마(飯山)를 여행한 견문도 포함해, 지쿠마 강 유역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 행사, 풍물 등, 지방 풍토의 실태를 연구하고 스케치한 것을 기초로 했다. 계절 변화를 기본 구성으로 풍토적 자연과 인간적 자연을 사실적으로 그려 내려 시도했다. 고모로의 현실 생활의 혹독함을 자본주의적 경제 사회의 현실로 인식한 것이 아니라, 원시적, 야성적, 본능적인 인간의 생태, 즉 인간적 자연 또는 생활 형태로서 오히려 생리적으로 체감하고 있다는 것이 특이하다. 나아가 고모로의 자연이 얼마나 뿌리 깊이 그의 정신적 풍토가 되고 도손 문학의 방향을 결정짓는 요인이 되었는지도 엿볼 수 있다.
200자평
시마자키 도손. 낭만주의 시인이 자연주의 소설가로 변신하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 해답이 이 수필집에 있다. 지쿠마 강가의 척박한 농촌 마을 고모로에서 그는 인간을 보고 자연을 본다. 말 그대로 ‘스케치하듯’ 사실 그대로 그려 낸 글 속에서 그의 정신적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지은이
시마자키 도손(島崎藤村, 1872∼1943)의 본명은 시마자키 하루키(島崎春樹)다. 나가노현(長野県) 신슈(信州)의 기소(木曽)에서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에도(江戸)와 교토(京都)를 잇는 교통 요충지 기소에서 대대로 숙박업과 도매업을 운영하는 그 지역 유지이자 촌장을 지낸 유서 깊은 집안이다. 국학자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효경≫이나 ≪논어≫ 등을 읽어 한학적 소양이 잡혔다. 집안은 메이지유신 직후 몰락하고, 열 살이 되던 1881년 봄, 문명의 도시 도쿄로 상경한 도손은 요시무라 다다미치(吉村忠道) 집에 기거하면서 학교에 다녔다.
초등학교 졸업 후 진학한 메이지학원은 기독교 학교로 교사 대부분이 외국인이었다. 이 시기에 셰익스피어나 바이런, 워즈워스 등 서양 문학에 심취하는 한편, 평생 스승으로 존경한 마쓰오 바쇼(松尾芭蕉)나 사이교(西行) 등 일본 문학도 섭렵하며 문학의 꿈을 키웠다. 졸업하던 해에 메이지여학교 교사가 됐다. 이듬해, 시인 기타무라 도코쿠(北村透谷)와 함께 잡지≪문학계≫를 창간해 동인으로 극시와 수필을 발표하며 문학가로 나섰다.
도코쿠의 자살 그리고 여학교 제자이자 첫사랑 사토 스케코(佐藤輔子)의 병사(病死)에 충격을 받은 도손은 1896년 도쿄를 떠나 센다이 도호쿠학원 교사가 됐다. 센다이의 자연을 벗 삼아 시 창작에 전념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와카(和歌)나 하이쿠(俳句) 외에 일본어로 새로운 시를 쓴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고 신체시인들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심지어 경멸 대상이었던 까닭에 도손은 숨어서 ≪새싹집≫을 쓴 적도 있다고 했다. 그런 극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새싹집≫은 근대인의 감정과 사고를 대변하는 일본 근대시의 모태가 됐다. 이후 ≪일엽편주≫, ≪여름풀≫을 잇달아 발표해 메이지 낭만주의 시인으로 명성을 떨쳤다.
1897년 도쿄로 돌아온 도손은 일본어 시의 한계와 가중되는 경제적 부담에서 벗어나고자 1899년 신슈 고모로의숙 교사가 됐다. 고모로에서 하타 후유코와 결혼해 딸 셋을 키우며 산촌 지방의 낯섦과 현실적 생활 문제에 봉착하게 됐다. 1901년 마지막 시집 ≪낙매집≫을 끝으로 ‘시에서 산문’으로 전향하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문학 양식의 탐색은 외국의 단편 작가, 극작가, 국내외 인상파 화가로 집중된다. 러스킨의 ≪근대 화가론≫이나 다윈의 ≪종의 기원≫,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에서 자연과학적 관찰을 배양하는 한편, 투르게네프의 ≪사냥꾼의 일기≫에서 회화를 보는 듯한 신비한 인상을 받았다. 또한 화가와 친밀했던 체호프나 모파상의 작품에 나타난 인상의 ‘청신함’과 ‘단순함’을 통해 인간의 심리 해부에 주목하게 된다. 시대 분위기 역시 문학과 회화, 즉 글과 삽화, 장정의 접목이 활발했고 일본 예술계에서 인상주의 영향이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새로운 조류에 발맞춰 도손은 같은 시기에 부임한 미술 교사이자 시슬레에게 사사한 수채화가 미야케 가쓰미(三宅克己)에게 사생(寫生)을 배워 사생문을 성공시킨 것이 ≪지쿠마 강 스케치≫다. 훗날 자신의 산문은 ‘이 스케치로부터 출발했다’[≪선집(選集)≫ 상권 서(序)]고 말한 바 있다.
고모로에서 7년 남짓 생활하는 동안, 러일전쟁을 비롯해 딸 셋이 죽고 부인마저 야맹증에 걸리는 등 가혹한 시련을 겪으며 죽을 각오로 쓴 작품이 장편 소설 ≪파계≫(1906)다. 일본 문단을 새롭게 장식한 이 작품을 계기로 도손은 자연주의 소설가로 인정받게 됐다. 곧바로 장편 소설 ≪봄≫(1908)과 ≪집≫(1910)을 잇달아 발표했다. 이후 ≪신생≫(1918)은 넷째 류코(柳子)의 출산 후유증으로 죽은 부인을 대신해서 집안 살림을 도와주던 조카딸 고마코와의 불륜을 소재로 해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만년의 ≪동트기 전≫(1932)은 1853년부터 1886년까지의 사회 변천사를 그린 작품으로, 교토와 에도를 잇는 기소 가도(街道)를 중심으로 그 시대에 살았던 자신의 아버지를 모델로 한 역사 소설이다. 그리고 1936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제10회 국제펜클럽대회에 참가한 여행기 ≪순례≫(1940)가 있다. 마지막으로 1943년 8월 22일 미완성 작품 ≪동방의 문≫을 쓰다가 뇌출혈로 쓰러진 뒤 “시원한 바람이구나”라는 말만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말년에 살았던 오이소(大磯) 해변의 지후쿠사(地福寺)에 안치되었고 유해 일부는 고향 마고메(馬込) 에이쇼사(永昌寺)에 있는 가족 묘지에 분장되었다. 도손의 인생은 한마디로 파란만장했다. 시대적으로는 메이지(明治)·다이쇼(大正)·쇼와(昭和)를 거치며,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중일전쟁, 제2차 세계 대전까지 겪어 낸 굴곡 많은 삶이었던 만큼, 도손은 시와 수필, 소설, 동화 등 장르를 초월해 진정한 작가로 자리매김한 일본 근대 문학가다.
옮긴이
김남경은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에서 일본 근대 문학을 전공했고 <시마자키 토오송(島崎藤村)의 수필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명지전문대학 일본어과 초빙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도손은 여러 문학 장르를 아우르는 만큼 에세이스트·휴머니스트·모럴리스트로서 매력을 지닌 작가다. 특히 그의 수필은 작가의 단순한 인생 도큐먼트가 아니라 예술적 인생의 증언이라고 간주해 연구 테마로 삼았는데 수확은 제법 컸다. 시에서 산문으로 이행하는 시기의 수필 ≪지쿠마 강 스케치≫가 도손 문학은 물론 일본 근대 수필의 백미로 꼽히는 근원을 찾는 과정에서, 시인이었던 그가 인상파 화가의 기법인 사생(寫生)을 문장에 도입해 문학 양식에 독자적인 새 지평을 열었다는 점에 주목하게 됐다. 수필 초기에 사생문을 시작으로 기행문, 감상집으로 표현 양식을 변용해 온 도손 문학의 행로를 지금껏 탐구했다. 이후로 시대상을 잘 반영하는 현실성이 짙은 여행 작품을 통해 기행 수필이 대중 문학으로서 갖는 문학적 가치와 필요성을 찾고자 한다.
대표 논문으로는, 산문시에서 수필을 시도한 <시마자키 도손의 <7일간의 한담> 고찰>과 장르 의식의 변화를 살펴본 <시마자키 도손의 <수채화가>론>, 그리고 만년의 감상 수필에 나타난 아포리즘을 분석한 <시마자키 도손의 인생철학> 등이 있다.
차례
서문
그 하나
학생의 집
하늘소 애벌레
에보시 산록의 목장
그 둘
청보리 익을 무렵
소년들
보리밭
고성의 초여름
그 셋
산장
해독제 파는 여자
은바보
마쓰리 전야
13일의 기온 마쓰리
마쓰리가 끝나고
그 넷
나카다나
졸참나무 그늘
그 다섯
산속의 온천
학창 하나
학창 둘
시골 목사
9월의 논길
산중 생활
산지기
그 여섯
가을 수학여행
고슈 가도
산촌의 하룻밤
고원 위에서
그 일곱
낙엽 하나
낙엽 둘
낙엽 셋
고타쓰 이야기
음력 10월
초겨울, 그 언덕가
농부의 생활
수확
유랑자의 노래
그 여덟
1전짜리 식당
소나무 숲 속
깊은 산의 불빛
산 위의 아침
그 아홉
설국의 크리스마스
나가노 관측소
철도풀
소 도살 하나
소 도살 둘
소 도살 셋
소 도살 넷
그 열
지쿠마 강을 따라
강배
눈의 바다
사랑의 증표
산 위에서
그 열하나
산에 사는 사람들, 하나
산에 사는 사람들, 둘
산에 사는 사람들, 셋
야나기다 모주로
소작인의 집
그 열둘
길가의 잡초
학생의 죽음
따뜻한 비
기타야마의 늑대, 그 외
절
봄의 태동
별
첫 번째 꽃
산촌의 봄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1
“좀 더 나 자신을 신선하게 그리고 간소하게 할 수는 없을까?”
이는 내가 도회 공기 속에서 빠져나와 그 산간 지방으로 갈 때의 마음이었다. 신슈 농민들 속으로 들어가 여러 가지를 배웠다. 시골 교사로서 나는 고모로의숙(小諸義塾)에서 마을 상인이나 옛 무사, 농민의 자녀를 가르치는 것이 직업이었지만, 또 한편으론 나 역시 학교 사환이나 학부형으로부터 배웠다. 결국 7년의 긴 세월을 산 위에서 보냈다. 내 마음은 시에서 소설을 택했다. 이 글은 3, 4년 정도 지방에서 침묵하던 시절의 인상이다.
2
경사를 따라 아카사카(赤坂, 고모로 마을의 일부)의 연이은 집들이 보이는 곳으로 나왔다.
아사마 산기슭에 있는 마을들이 잠에서 깼을 때다. 아침밥 짓는 연기가 왠지 습한 공기 속으로 계속 올라간다. 닭 우는 소리도 여기저기서 들린다.
벼 익어 가는 논 주위로 콩도 꼬투리를 드리우고 있다. 벼 중에 벌써 아래 잎사귀가 노랗게 된 것도 있다. 9월도 중순이 지났다. 벼 이삭은 다양해서 어떤 것은 참억새 이삭 색처럼 보이고 어떤 것은 완전히 풀빛, 어떤 것은 붉은 털 송이를 숙인 모양인데 그중에서 짙은 다갈색 벼 이삭이 찹쌀을 심은 논이란 것은 나도 분간이 된다.
아침 햇살은 산골짜기마다 비친다.
논길에 난 잡초는 내 발을 적시며 간지럽게 한다. 그 사이를 돌아다니며 귀뚜라미 우는 소리를 들었다. 이 계절, 아사마는 어떤 날은 여덟 번 가량 연기를 내뿜을 때가 있다.
“아! 또 아사마가 불탄다”며 주고받는 말이 그 고장 사람의 습관이다. 남자나 여자는 일하던 손을 멈추고 밖으로 나와 본다. 하늘을 쳐다보면 반드시 아사마 쪽에서 어마어마하게 큰 연기 덩어리를 목격한다. 그럴 때면 화산 기슭에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런 곳에 사는 데 익숙해진 사람은 평소엔 그런 사실도 잊고 살기 일쑤다. 아사마는 큰 폭발로 인해 붕괴된 산으로, 지금 말하는 깃파(牙齒) 산이 옛날 분화구의 흔적이라고 다들 생각한다. 산 형상에 뭔가 호기심이 발동해 오는 여행객은 대개 실망한다. 아사마 산뿐 아니라 다테시나(蓼科) 산맥을 보더라도 기이함이 전혀 없는 것들뿐이다. 단지 재미있는 것은 산 공기다. 어제 다녀 본 산과 오늘 다녀 본 산이 거의 매일 바뀐다.
3
검사가 끝났다. 도살자는 무리 지어 몰려와, 소리로 달래거나 야단치며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소를 억지로 도살장으로 끌어넣었다. 도살장은 마루방으로 마치 넓은 욕탕의 몸 씻는 데처럼 돼 있다. 방심한 소를 확인하고 도살자 중 한 사람이 가느다란 삼끈을 앞뒤 다리 사이로 던졌다. 끈을 꽉 졸라매자 소는 중심을 잃고, 육중한 몸이 옆으로 넘어지면서 바닥에 쓰러졌다. 그 직전에 이마 언저리를 겨냥해, 예의 큰 도끼의 날카롭고 뾰족한 철관으로 내리치는 사람이 있었다. 소는 눈을 돌리고 발을 버둥거리더니, 콧김도 하얗고 희미한 신음 소리를 남기고 숨이 끊어지려 했다.
아직 숨이 남아 있는 남부 소를 둘러싸고, 도살자 중 어떤 이는 꼬리를 끌고, 어떤 이는 가느다란 삼끈을 잡아당기며, 어떤 이는 식칼로 목 부근을 잘랐다. 그사이 많은 사람이 쓰러진 소 위에 올라타 갈색 배 언저리, 등 쪽 할 것 없이 마구 짓밟자, 검붉은 피가 잘린 목 쪽에서 흘러나왔다. 부서진 앞이마 뼈 사이로 막대기를 깊이 끼워 넣고 돌리며 도려내는 사람도 있었다. 숨이 있는 동안 소는 발버둥치며 신음하거나 발을 팔딱거리며 괴로워했지만 피를 다 흘리자 숨도 완전히 멎었다.
큰 검은 소가 쓰러진 모습이−앞뒤 다리는 하나씩 도살장 기둥에 묶인 채 우리 눈앞에 드러누웠다. 도살자 중 한 사람은 갈색 복부 가죽을 세로로 찢고 곧바로 다리 가죽을 벗기기 시작했다. 또 한 사람은 예의 큰 도끼를 휘둘러 소머리를 두어 번 치는 사이 흰 뾰족한 뿔이 뚝하고 마룻바닥에 떨어졌다. 남부 소의 검은 털가죽에서 흰 지방에 싸인 내용물이 드러난 것은 머지않아서였다.
4
자네는 우유가 언 것을 본 적이 없겠지. 초록빛에 우유 향도 없다. 여기서는 달걀도 언다. 그걸 쪼개면 흰자도 노른자도 사각사각 씹힐 기세다. 부엌 개수대에 흐르는 물은 모두 꽁꽁 언다. 파뿌리, 차 찌꺼기까지 얼어붙는다. 불 켜진 창으로 약한 빛이 새어 나올 무렵, 뾰족한 식칼인지 뭔지로 개수대의 얼음을 꽝꽝 두들겨 깨는 광경은 따뜻한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그림이다. 밤을 넘긴 홈통의 물은 아침이 되면 반은 얼음이다. 그걸 햇볕에 쬐고 얼음을 두들겨 떨어뜨린 후 물을 퍼 담는 식이다. 단무지도 쓰케모노도 얼어서 씹으면 서걱서걱 소리가 난다. 어떤 때는 쓰케모노까지 더운 물로 헹구지 않으면 안 된다. 고용인의 손을 보니 거칠고 꺼뭇꺼뭇하며 피부는 찢어져 군데군데 붉은 피가 나고 물을 퍼 올릴 때는 장갑 끼고 두건을 쓰고 한다. 마루방에 걸레질한 자리가 금방 허옇게 얼어 버린 아침이 전혀 낯설지 않다. 밤이 이슥해지고, 방마다 기둥이 얼어 갈라지는 소리를 들으며 독서라도 하고 있으면 정말이지 추위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