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 대표 시인의 육필시집은 시인이 손으로 직접 써서 만든 시집이다. 자신의 시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시들을 골랐다. 시인들은 육필시집을 출간하는 소회도 책머리에 육필로 적었다. 육필시집을 자신의 분신처럼 생각하는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육필시집은 생활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는 시를 다시 생활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기획했다. 시를 어렵고 고상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쉽고 친근하게 접할 수 있는 것으로 느끼게 함으로써 새로운 시의 시대를 열고자 한다.
시집은 시인의 육필 이외에는 그 어떤 장식도 없다. 틀리게 쓴 글씨를 고친 흔적도 그대로 두었다. 간혹 알아보기 힘든 글자들이 있기에 맞은편 페이지에 활자를 함께 넣었다.
이 세상에서 소풍을 끝내고 돌아간 고 김춘수, 김영태, 정공채, 박명용, 이성부 시인의 유필을 만날 수 있다. 살아생전 시인의 얼굴을 마주 대하는 듯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200자평
이 책에는 <창덕궁은 생각한다>를 비롯해 정우영 시인이 직접 가려 뽑고 정성껏 손으로 쓴 46편의 시가 실려 있다.
지은이
정우영은 1960년 전북 임실에서 태어났으며 숭실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9년 ≪민중시≫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시집으로는 ≪마른 것들은 제 속으로 젖는다≫, ≪집이 떠나갔다≫, ≪살구꽃 그림자≫가 있다. 시평 에세이 ≪이 갸륵한 시들의 속삭임≫과 ≪시는 벅차다≫를 펴냈다.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차례
시집을 열며
시간의 주름
창덕궁은 생각한다
살구꽃 그림자
초경
전서구(傳書鳩)
황로
상추밭
시간의 그늘
눈눈눈
서출지
김개동 씨
돌젖
퐁당퐁당, 탱탱한 미래
낙산
새 세상
가만히 불러 보는
미륵사지
산목련
나는 누구의 돌멩이에 끼워진 속눈썹이었나
건듯건듯
혜화동
성묘 가는 길
그믐
설미재
정배 분교
중독
기우뚱
원서헌에서 신화를 낚다
엄지의 우울
연분
하관
곡우
우물 승천
사람만이 희망인가
대밭
수덕사
연등
문턱
겨울 지하도
모정
임실역
붉은 땅
폐가
봄비
청령포
석류
정우영은
책속으로
창덕궁은 생각한다
내일을 향해 나는 낡아 간다.
틀림없다, 미래를
향해 손 벌릴수록
나는 하염없이 낡아 간다.
생각도 마찬가지다, 어김없이 낡는다.
새 생각일수록 흐려지는 것이다.
온전한 생각은 언제나 내 뒤에 있다.
뒤로 뒤로 더 멀리 갈수록 새롭다.
과거에 붙잡힌 내 사진을 찬찬히 들여다보라.
얼마나 발랄하고 아름다운가.
과거로 흘러가는 내 생각은,
참을 수 없이 활발한 원색으로 빛난다.
미래에는 오지 않는 미끈한 즐거움들이
머릿속을 신들린 듯 뛰어다닌다.
생각을 내일의 척후병으로 내보내지 마라.
좌절과 절망에 붙잡히고 만다.
차라리 내일에서 생각을 떼 내 버려라.
단언컨대 희망은 등 뒤에 있고
사라진 기억들이 나를 이끌어 간다.
그러니 오늘 여기를 사는 나는,
어제의 나보다 얼마나 부질없는가.
시집을 열며
사각거리는 펜촉의 움직임 속에 고이는 고요를 오랜만에 맛본다.
심심하지만 깊다.
이 맛, 오랫동안 잊고 지냈다.
고요의 이 맛으로 내 설익은 시편들을 감추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