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초판본 한국소설문학선집’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전근대와 근대, 일상과 예술, 전통과 실험, 미적 자율성과 사회적 실천, 식민지와 분단, 남과 북. 이 대립적인 개념의 조합들은 다음 두 가지 대상의 특성을 설명하는 공통적인 열쇠다. 하나는 한국 근현대문학이고, 다른 하나는 박태원 문학이다.
박태원만큼 식민지와 분단으로 이어진 시대사의 대립과 분열, 갈등과 모순을 상징적으로 압축하고 있는 작가는 찾기 힘들다. 박태원의 문학은 전통과 근대의 분열,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대립, 문학의 자율성과 현실 참여성 사이의 갈등, 남과 북의 민족적 모순 속에서 정체성을 유지해 온 한국 문학사의 개체적 표본이며, 그런 점에서 그는 우리 문학의 주요한 문제적 작가 중 한 사람이다.
박태원의 문학은 모더니즘으로부터 출발했다. 서울 중인 계층 출신인 박태원은 근대 문명과 도시 문물을 수용하는 데 거부감을 느끼지 못할 만큼 세련된 도회적 감수성을 지닌 문화적 모더니스트였다. 박태원은 경성의 모더니스트 짝패였던 이상과 새로운 문학예술을 표방한 단체인 ‘구인회’에 참여하면서, 내용을 중시하던 프로문학을 거부하고 예술 자체의 미적 형식과 자율성을 추구하는 모더니즘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이상이 삽화를 그렸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은 바로 이 시기에 발표한 대표적인 모더니즘 소설이다.
1930년대 중반 이후 박태원은 내면의 심리묘사에 치중했던 모더니즘 창작 방법론에서 후퇴해, 외부 현실의 객관적 묘사에 중점을 두는 리얼리즘적인 기법으로 쓴 장편소설 ≪천변풍경≫을 발표한다. ≪천변풍경≫은 이미 당대 평단에서 세태소설 또는 리얼리즘 논쟁을 불러일으킨 문제작으로, 박태원 문학의 분기점에 해당한다. 한편 일제 말기의 정치적 암흑기에 박태원은 주로 신변잡기를 소재로 한 소설이나 통속소설 등의 집필이나 중국소설 번역에 몰두한다.
해방이 되자 박태원은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해 활동하게 된다. 해방 직후에는 역사소설 창작에 심혈을 기울이며 역사에 대한 인식 확대와 민중의 삶에 대한 깊은 관심을 드러냈는데, ‘조선문학가동맹’ 가입이나 월북 등 해방 후의 행적은 바로 이러한 작가적 현실 인식의 변모와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월북 후에 박태원은 본격적으로 역사소설을 쓰기 시작해 ≪갑오농민전쟁≫과 그 전편인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를 완성했다. 특히 실명 상태에서 구술로 완성한 ≪갑오농민전쟁≫은 이기영의 ≪두만강≫과 함께 북한 최고의 역사소설로 평가받고 있다.
박태원이 추구한 모더니즘 미학의 정점을 보여주는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조선중앙일보≫, 1934. 8. 1∼9. 1)은 무엇보다 새로운 문학적 기법의 도입으로 주목을 끈 작품이다. 현대의 경향·풍속 등을 탐구하는 고현학(考現學, modernology), 자신의 분신에 해당하는 구보를 내세워 소설 창작 과정 자체를 소재로 삼은 미적 자기 반영성, 현재와 과거의 교차에 의한 의식의 흐름, 영화의 이중노출(overlap) 수법 등 전통적 소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기법이 시도되어 당대의 관습화된 소설 인식에 충격을 주었다. 특히 일정한 플롯이나 인물 중심의 외적 사건이 발생하지 않고, 주인공 구보의 심리를 통해 의식의 유동적인 추이만을 보여주는 방식은 전통적 소설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당혹감을 안겨준 실험적인 시도였다. 구보가 집에서 외출하는 장면에서 시작해 다시 집으로 귀가하는 원환적(圓環的) 구성 방식을 취하고 있다. 어머니의 시점에서 외출하는 아들 구보를 딱하게 바라보는 장면에서 시작한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은 귀가를 앞둔 구보가 어머니와 같은 한 아낙네를 바라보며 딱한 마음을 감출 수 없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이 작품은 동경으로 상징되는 근대적 삶을 꿈꾸던 모더니스트 구보가 자신에 대한 반성적인 인식을 거쳐 식민지 도시의 삶을 연민과 동정의 윤리로 포용하는 작품이다.
‘천변’을 중심으로 그곳에 살고 있는 인물들의 복잡다기한 생활상들을 그려내고 있는 ≪천변풍경≫(박문서관, 1938)은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에서 획득한 주제 의식의 연장선상에서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기법을 종합해 완성한 박태원의 대표작이다. 2월 초부터 다음 해 정월 말까지 1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청계천변의 복잡다단한 삶을 50개의 절로 분절해 묘사하고 있는 ≪천변풍경≫은 30명을 웃도는 인물들이 등장해 식민지 도시 경성을 살아가는 조선인들의 삶의 생태와 도시의 음영을 총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일본 동경이나 경성 내 일본인 거주 지역이 상징하는 근대 도시의 보편적 삶과 대비되는 식민지 도시 경성의 특수한 삶, 즉 청계천변의 조선인들의 생활상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에서 획득한 반성적 의식과 윤리적 자각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이발소 소년 재봉이의 시점을 통한 ‘카메라 아이(camera eye)’의 객관적 서술 기법은 경성 청계천변의 식민지적 근대의 삶을 계급이나 이념, 예술 등 어떠한 이데올로기적 도식에 의해 섣불리 재단하지 않고 모든 인물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윤리적 인식을 소설 형식으로 구현했다.
200자평
박태원은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심리소설과 역사소설, 남한 문학과 북한 문학 등 한국 근현대문학의 미학적·정치적 경계를 넘나들며 자신의 문학적 행보를 펼쳐 나갔다. 모더니즘 미학의 정점을 보여 주는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과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기법을 종합해 완성된 <천변풍경>이 엮여 있다. 박태원의 초기 모더니즘 문학에는 이미 식민지를 살아가는 조선인의 삶에 대한 깊은 애정과 따뜻한 연민이 싹트고 있었다. 따라서 후기 소설에 나타나는 민중적 삶에 대한 열정적인 문학적 탐구는 모더니즘 문학의 확대이자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박태원 문학의 항구적인 동력은 다음과 같다. 근대적 삶과 부딪치며 때론 좌절하고 때론 승리했던 평범한 장삼이사(張三李四)들에 대한 연민 어린 애정이고, 문학에 대한 신념과 열정이다.
지은이
박태원은 서울 수중박골에서 약국을 경영하던 박용환(朴容桓)과 어머니 남양(南陽) 홍씨(洪氏)의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수중박골은 지금의 종로구 수송동이며 당시의 행정구역상 명칭은 경성부(京城府) 다옥정(茶屋町) 7번지다. 어렸을 적의 이름은 점성(點星)이었는데, 등의 한쪽에 커다란 점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 후 4년제인 경성사범부속보통학교에 입학하던 1918년에 태원으로 개명했다. 필명으로 몽보(夢甫)·구보(丘甫)·구보(仇甫)·구보(九甫)·박태원(泊太苑) 등을 썼다.
1922년에 경성사범부속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박태원은 재학 시절 ≪동명≫ 33호에 작문 <달맞이>를 싣게 된다. 18세가 되던 1925년 3월 ≪조선문단≫에 시 <누님>이 실리고, 그 밖에도 ≪동아일보≫, ≪신생≫ 등에 시와 평론을 발표했다. 이듬해는 경성제일고보를 휴학하고, 의사였던 숙부 박용남과 교사였던 고모 박용일의 주선으로 춘원 이광수에게 개인적으로 문학 지도를 받았다. 1929년에 경성제일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 법정대학 예과에 입학했고, 이 시기에 영화, 미술, 모더니즘 문학 등에 큰 관심을 가졌다.
일본 동경 법정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한 1930년, 박태원은 ≪신생≫ 10월호에 단편 <수염>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문단에 나왔다. 1933년에는 사회주의 및 민족주의에 반기를 든 ‘구인회’에 가입해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이상 등과 함께 활동했다. 1934년 한약국을 경영하던 김중하의 무남독녀로 보통학교 교사이던 김정애와 결혼했다. 1938년에 장편소설 ≪천변풍경≫(박문서관) 및 단편소설집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문장사)을 출간했다.
해방 후인 1946년에 남로당 계열 문학 단체였던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직을 맡았으나 1948년 ‘보도연맹’에 가입해 전향 성명서에 서명을 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에 온 이태준, 안회남, 오장환, 정인택, 이용악 등을 따라 가족을 남겨두고 단신 월북했다. 1953년 평양문학대학 교수로 취임했으나, 1956년 남로당 계열로 몰려 숙청당하면서 창작 금지 조처를 받았다. 1960년에 창작 금지 조처가 풀려 작가로 복귀하면서 대하 역사소설 ≪갑오농민전쟁≫의 집필에 착수했다. 그러나 당뇨병으로 인한 안질환으로 실명하고 고혈압으로 전신불수가 되는 등 시련을 겪었다. 그 가운데 북조선에서 재혼한 아내 권영희가 박태원의 구술을 받아 적어 1977년과 1980년에 ≪갑오농민전쟁≫ 1, 2부를 발표했다. 1986년 7월 10일에 박태원이 사망한 후에는 권영희가 정리, 집필해 ≪갑오농민전쟁≫ 3부를 완성했다.
작품으로는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자의식을 모더니즘적인 기법으로 묘사한 중편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1934)를 비롯해 동생 박문원이 장정을 맡은 소설집 ≪천변풍경≫(1938), 월북 후 북조선에서 집필한 대하 역사소설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 ≪갑오농민전쟁≫ 등이 있다. 남한에 남겨진 박태원의 가족 중 맏딸은 1951년 월북했으며, 남은 가족 중 차녀의 막내아들이 영화감독 봉준호다.
일제강점 말기에 일본의 군국주의를 미화한 ≪군국의 어머니≫(1942)라는 책을 낸 바 있다. 그러나 친일 행적이 노골적이지는 않아서, ‘소극적 협력’으로 불리고 있다. 친일 작품은 일화 모음집인 ≪군국의 어머니≫ 외에 ≪조광≫과 ≪매일신보≫에 기고한 글이 각각 한 편씩 있어, 총 3편이 밝혀졌다.
엮은이
김종회는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88년 ≪문학사상≫을 통해 문학평론가로 문단에 데뷔했으며, 그동안 활발한 비평 활동을 보이는 한편 ≪문학사상≫, ≪문학수첩≫, ≪21세기 문학≫, ≪한국문학평론≫ 등 여러 문예지의 편집위원과 주간을 맡아 왔다.
김환태평론문학상, 김달진문학상, 편운문학상, 한국문학평론가협회상, 시와시학상, 유심작품상, 경희문학상 등의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평론집으로 ≪위기의 시대와 문학≫(세계사, 1996), ≪문학의 숲과 나무≫(민음사, 2002), ≪문화 통합의 시대와 문학≫(문학수첩, 2004), ≪문학과 예술혼≫(문학의숲, 2007), ≪디아스포라를 넘어서≫(민음사, 2007) 등이 있고 그 외 다수의 저서가 있다.
특히 사단법인 일천만이산가족재회추진위원회 사무총장, 통일문화연구원 원장 등의 주요 경력과 관련해 북한 문학과 해외 동포 문학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많으며, 그 결과로 ≪북한문학의 이해≫ 1∼4권 및 ≪한민족 문화권의 문학≫ 1∼2권을 엮은 바 있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천변풍경(川邊風景)
소설가(小說家) 구보(仇甫) 씨의 일일(一日)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돌아보는 벗의 눈에 疲勞가 있었다. 다시 걸어 黃金町으로 向하며, 이를테면, 조그만 기쁨, 보잘것없는 기쁨 그러한 것을 가졌소. 뜻하지 않은 벗에게서 뜻하지 않은 葉書라도 한 장 받았다는 種類의…
“갖구 말구.”
벗은 서슴지 않고 對答하였다. 老兄같이 변변ㅎ지 못한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받아보지 못할 片紙를. 그리고 벗은 허허 웃었다. 그러나 그것은 空虛한 音響이었다 內容證明의 書留 郵便. 이 時代에는 조그만 한 개의 茶寮를 經營하기도 수얼ㅎ지 않았다. 석 달 밀린 집세. 총총하던 별이 자취를 감추고 하늘이 흐렸다. 벗은 갑자기 휘파람을 분다. 가난한 小說家와 가난한 詩人과… 어느 틈엔가 仇甫는 그렇게도 苟且한 내 나라를 생각하고 마음이 어두었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