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평론선집’은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공동 기획했습니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는 한국 근현대 평론을 대표하는 주요 평론가 50명을 엄선하고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를 엮은이와 해설자로 추천했습니다. 작고 작가의 선집은 초판본의 표기를 살렸습니다.
이 책에서 살펴보는 최남선의 글은 시와 시조 등의 창작 작품이나 번역문 등의 작업과는 거리가 있으며 주로 기행문, 문학, 역사학 및 민속학 연구 등과 관련된 글들이다. 이 글들은 최남선의 광범위한 글쓰기의 특성을 가장 잘 보여 준다. 사실 이 글들은 엄밀하게 말해 “평론”이라고 규정짓기는 어렵다. 여기에 실린 비평적 준거나 작품에 대한 면밀한 독해를 읽을 수 있는 것은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가 근대적인 과학적 방법론을 도입하려고 애쓰고 있는 점들이 엿보이고 당시 일제의 역사학이나 풍속학, 문화학 등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보이고 있는 부분들이 있어서 그것들에 내재하고 있는 비평적 시각을 부각해 볼 수 있다.
<書齋 閑談>의 서두에서 “나는 어려서부터 文献의 價値를 혼자 생각하고 甚히 尊重하게 알아서 무릇 글씨를 쓴 종이는 다 貴重하게 넣어 두는 중에서도 特別히 國家와 民族의 生活에 關係되는 文献을 수집 保存하기에 苦心한 것은 거의 天性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매우 압축적으로 자신의 수집가의 면모와 조선적인 것 또는 민족과 관련된 관심이 거의 동일 선상에 놓여 있음을 말하고 있다. 글로 쓴 것을 수집하고 모으되 그 수집의 최고의 준거점은 “국가”와 “민족”과 관련된 것에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계몽적인 작업을 통해 “신문화”를 열어 나가는 것이 어려워졌을 때 “문화”가 등장하는데 이 둘 모두를 실체적으로 구축하는 것이 “수집”이라는 것을 최남선은 말하고 있다. 즉, 새로운 문물에 대한 열망과 조선적인 것에 대한 열망은 사실은 한 쌍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중화되고 이중적인 것이지만 최남선에게 그것은 서로 자리를 바꾸어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그 지평이 바로 “문화”다. 그리고 이 “문화”는 “수집”이란 모험을 통해 구체화되고 글쓰기를 통해 “문화”로서 정립된다. “내가 이 冊에 執筆할세 우리 國民에게 向하야 着精키를 願할 一事가 잇스니 그것은 곳 우리들이 우리나라가 三面環海한 半島國인 것을 許久間 忘却한 일이라”(<海上大韓史>)라고 말하며 “바다”의 개척을 요청할 때, 그것은 최남선에게 구체적으로 “바다”의 개방성을 “수집”해 구체화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수집”에 근거한 비평적 시각의 확보와 연구 방법론의 구체화를 추구하는 작업을 글쓰기로 풀어내는 지점에서 최남선의 백과사전적이고 다양한 영역에 대한 탐구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글쓰기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 “문화”이며 이미 최남선에게 “신문화”인, 새롭게 재규명되고 구축된 “조선적인 것”이다. 최남선은 우리의 손으로 조선학을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바로 그러한 차원에서 “조선학”은 근대적인 차원에 놓인 전혀 새로운 차원의 조선학이었던 것이다.
그의 모든 외적인 활동과 그에 따른 글쓰기, 백과사전적 지식과 그 지식을 통한 글쓰기는 모두 이러한 지평에 놓여 있다. 그의 모든 모험은 결국 그의 서재를 향해 돌아갔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비평적 시선이 어디에 가닿아 있는지 우리에게 암시한다. 수집가로서 최남선은 바로 이 채워지지 않는 조망의 지평, “문화”, “민족”, “국가”라는 지평에 끊임없이 다가가려는 시도를 했다. 그것은 오류를 포함하고 있으며 실패하기도 했고 언제나 수정될 것의 지평에 놓여 있었다. 그것이 물리적으로 책들의 집합으로 놓여 있을 때조차 그것은 늘 그 수정될 것의 지평을 가리키고 있었을 것이다. 비평, 그것은 형체를 가진 것에서조차 형체를 가지지 않는다. 아마도 최남선이 우리에게 근대적 비평의 시작을 알려 주었다고 한다면 바로 이 지점을 알려 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그가 더욱이 ‘한담’이라는 차원에서 우리에게 이야기를 걸어오고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우리는 한가한 이야기를 통해서야만 이 부제하면서도 미끄러지는 지평의 차원을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200자평
최남선은 번역가, 출판인, 시인, 문화운동가, 역사가 등의 면모를 두루 갖추고 있다. 전방위적인 그의 글쓰기는 우리의 근대 초기의 모습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지점들을 점유하고 있으며 근대 학문의 기초를 이루는 대부분의 인문적 지형을 모두 다루고 있다. 백과사전적인 그의 글들을 아울러 살펴본다.
지은이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은 시인, 출판가, 문화운동가 등으로 활약하며 근대 초기 우리 문학 및 문화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대대로 잡과 합격자를 배출한 중인 집안의 영향 속에서 최남선은 어린 시절부터 신문명과 관련된 서적들을 접할 수 있었다. 독학으로 한글을 깨치고 7∼8세 무렵에는 한문을 배워 중국어로 번역된 신문명 서적을 읽었다. 13세가 되던 해인 1902년에는 경성학당에서 일본어를 배워 일본어로 된 신문과 잡지를 통해 서구의 근대 풍경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했다.
15세가 되던 해인 1904년 대한제국 황실유학생에 선발되었다. 일본 도쿄에 있는 동경부립제일중학교에서 유학했고 이듬해 집안 사정으로 인해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1906년에 재차 일본 유학길에 올라 와세다 대학 지리역사과에서 공부했지만 1907년 3월 학업을 중단했다. 하지만 바로 돌아오지 않고 이듬해인 1908년 8월에 귀국했다. 약 2년 3개월간 일본에 체류하면서 일본의 신문물, 특히 출판에 큰 자극을 받았다. 1908년 일본에서 인쇄 기구를 들여와 경성에 신문관(新文館)을 설립했다. 이 신문관에서 발간한 잡지가 한국 최초의 근대 잡지인 ≪소년≫이다. ≪소년≫이 한일강제합병 이후 일제의 압력으로 폐간된 뒤에도 ≪붉은 저고리≫, ≪아이들 보이≫, ≪새별≫, ≪청춘≫ 등의 잡지 출판을 이어 갔다.
잡지 출판 외에 조선의 고서적을 발굴 출판하는 데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는 일본이 조선의 고서를 출판한 데 따른 충격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는 1911년 조선광문회를 설립하며 조선의 고서를 자주적으로 발굴하고 출판해 널리 보급하고자 했다. 일본 유학 시절부터 관심을 가졌던 ‘조선적인 것’에 대한 탐구는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이후에 단군에 대한 연구 등으로 확장되었다.
계몽운동에 대한 탐구와 조선적인 것에 대한 열망은 1919년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는 것으로 행동에 옮겨지기도 했다. 그는 당시 민족대표 33인 또는 민족대표 49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으며 <기미독립선언서>를 기초했다. 이에 최남선은 3.1 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일제에 의해 투옥되었다. 2년 8개월의 수감 기간 동안 최남선은 1920년대 자신이 추구할 작업의 기초를 다졌는데, 그것을 출감 후 <단군론>(1926), <불함문화론>(1927) 등으로 구현해 냈다. 이 작업들은 역사학과 민속학과 관련된 작업들이었는데 <심춘순례>, <백두산 근참기> 등의 현장 답사 기행문 등과 병행했다. 이는 조선적인 것의 기원을 찾으려는 일련의 작업들이었다. 물론 이 시기에도 주간 잡지 ≪동명(東明)≫(1922)을 발행하고 ≪시대일보(時代日報)≫를 창간하는 등 지속적인 출판운동을 펼쳤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다.
민족 운동가로서의 면모는 1927년 변화의 양상을 맞이했다. 조선총독부가 설립한 ‘조선사편수위원회’에 참여하게 되면서부터 최남선은 친일 성향으로 변모했다. 일제의 기관지인 ≪매일신문≫에 적극 참여하고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며 1939년에는 만주국의 건국대학 교수로 재직하게 되었다.
해방을 맞이하고 반민족행위자처벌법이 발효되면서 최남선은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러나 서대문형무소에서 지낸 수감생활은 짧았다. 그는 곧 보석으로 풀려났고 반민특위가 이승만 정부에 의해 무력화되면서 그의 친일행위에 대한 사법적 판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방기에서 한국전쟁에 이르는 시기에도 우리 역사에 대해 연구했으며 1951년 해군전시편실 고문을 지내고 1952년 육군대학에서 역사를 강의했다. 1955년 뇌일혈로 쓰러진 후 투병하다가 1957년 10월 10일, 향년 68세에 세상을 떠났다.
엮은이
문흥술은 1961년 경남 사천에서 태어나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 국문과에서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인간주체의 와해와 새로운 글쓰기>가 당선되어 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자멸과 회생의 소설문학≫(1997), ≪작가와 탈근대성≫(1997), ≪시원의 울림≫(1998), ≪모더니즘 문학과 욕망의 언어≫(2000), ≪한국모더니즘 소설≫(2003), ≪존재의 집에 이르는 지도≫(2004), ≪형식의 운명, 운명의 형식≫(2006), ≪문학의 본향과 지평≫(2007) 등을 썼고, 장편소설 ≪굴뚝새는 어디로 갔을까≫(2000), 편저 ≪운수 좋은 날≫(2001), ≪태평천하≫(2002), ≪상록수≫(2003), 공저 ≪소설 신라열전≫(2001) 등을 펴냈다. 2006년 김달진 문학평론상을 수상하였으며, 현재 서울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해설자
김학중은 197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에서 현대문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2009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해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해설한 책으로는 ≪정원석 동화선집≫, ≪한윤이 동화선집≫, ≪오일도 시선≫ 등이 있다. 논문으로는 <재만 조선인 시에 나타난 ‘다른 공간’ 문제 연구> 등이 있다.
차례
제1부 문학평론
제1장 신변잡기와 기행문 서문
書齋 閑談
十年
半巡城記
平壤行
巡禮記의 卷頭에
≪白頭山 覲參記≫ 卷頭에
≪金剛 禮讚≫ 序詞
제2장 문학평론
朝鮮의 家庭文學
外國으로서 歸化한 朝鮮 古談−朝鮮歷史通俗講話別錄
토타령
朝鮮의 神話
時調類聚
제2부 역사
海上大韓史
壇君 及 其 硏究
我等은 世界의 甲富
제3부 문화 교양
現時代의 要求 人物
少年 時言
해설
최남선은
엮은이 문흥술은
해설자 김학중은
책속으로
나는 어려서부터 文献의 價値를 혼자 생각하고 甚히 尊重하게 알아서 무릇 글씨를 쓴 종이는 다 貴重하게 넣어 두는 중에서도 特別히 國家와 民族의 生活에 關係되는 文献을 수집 保存하기에 苦心한 것은 거의 天性이었다.
내가 國文을 解讀한 것은 6·7歲頃의 일인데, 그때에는 國文으로 冊을 發刊하는 것이 예수교 편의 전도 문자밖에는 없었건만, 그것이 發行되는 대로 사서 읽고 保存해서 한 코렉숀을 이룰 만했었다.
―<書齋 閑談>
朝鮮의 人文的 모든 것이 壇君에 비롯하얏다 함은 우리의 오랜 傳統的 信念임니다. 이것으로써 歷史의 起頭를 삼으며 이것으로써 氏族의 淵源을 삼아서 아모도 또 조곰도 의심하려 아니함니다. 壇君을 제처 노흐면 朝鮮이란 長江도 샘 밋치 막히는 것이매 壇君이 소중하고 壇君을 소중하게 해야 할 것은 朝鮮 文化에 대한 全的 問題로 진실로 必然 當然한 일이지마는 壇君을 소중하게 함에 대한 우리의 노력은 과연 무엇이 잇슴니가. 미들 것으로 밋는 밧게 그를 眞知 實解하려 하는 知的 努力인들 무엇이 잇슴닛가. 그러나 컴컴한 이대로 그만 저만함이 壇君의 久遠性을 위하야 한때라도 흠이 되지 하면 다행일 것임니다.
―<壇君 及 其 硏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