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초판본 한국 근현대소설 100선’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최상규는 60년의 길지 않은 생애 동안, 단편 127편, 중편 15편, 장편 9편을 남긴 비교적 다작(多作)의 작가다. 그럼에도 그의 이름이 많은 독자들에게 생소하게 다가오는 것은, 한국문학사의 사각(死角)에 위치한 최상규 문학의 독특함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소설이 일반 독자는 물론 연구자들에게도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난해함에 있다. 동료 작가 강용준에 의해 “지적인 작가요 스타일리스트”라 평가받는 최상규의 소설은 실험적인 기법으로 새로운 서사 형식을 모색하는 동시에, 주제적 측면에서는 관념적이고 지적인, 인간의 존재 탐구에 몰두해 있다. 1960년대 유행처럼 번진 실존주의의 영향이 최상규 소설에서는 당대를 넘어 이후 지속적으로 심화되고 있는데, 1970년대, 1980년대 리얼리즘 문학론을 중심으로 민족·민중문학 연구에 기울어진 우리 문학사를 돌이켜볼 때, 그의 문학이 문학사의 변방에 놓일 수밖에 없었던 저간의 사정이 이해된다.
초기 작품부터 그의 의식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당대의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생활에 대한 반영이나 문제 해결이 아니라 존재론적이고 실존적인 문제의식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마지막 작품에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악령의 늪≫에서 작가는 인간 존재의 자유로움을 제한하고 파괴하는, 개인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부조리한 상황을 운동권 학생 ‘장리백’이라는 인물을 통해 그로테스크하게 보여 주고 있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악령의 늪≫을 “우리 문학에서는 한 번도 도스토옙스키의 지옥을 가져보지 못했는데 그가 우리 문학에 도스토옙스키적 의미의 ‘악령’스러운 세계를 보여주었다”고 언급했다. 또한 삶의 극한상황에서 펼쳐지는 인간 내면세계의 탐구라는, 본질적이고 심오한 문제의식의 한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독자인 우리에게 최상규의 소설은 그의 작품 <모래 헤엄>의 치통과도 같다. <모래 헤엄>에서 인물의 심리적 방황의 산책은 치통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는데, 치통은 곧 인물이 느끼는 소외감 또는 실존적 불안을 드러내는 신경증의 일종이다. 갑각류의 등껍질처럼 견고해진 일상의 감각에 회의를 품게 하는 치통처럼, 일탈과 광기, 기행(奇行)으로 치달아 가는 최상규의 소설은 우리의 억압된 무의식을 자극하며 잠들어 있는 ‘자아’를 되돌아보게 한다.
200자평
최상규의 소설은 실험적인 기법으로 새로운 서사 형식을 모색하는 동시에, 관념적이고 지적인, 인간의 존재 탐구에 몰두해 있다. 그의 의식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존재론적이고 실존적인 문제의식이다. 갑각류의 등껍질처럼 견고해진 일상의 감각에 회의를 품게 하는 치통처럼, 일탈과 광기, 기행(奇行)으로 치달아 가는 그의 소설은 우리의 억압된 무의식을 자극하며 잠들어 있는 ‘자아’를 되돌아보게 한다.
지은이
최상규는 1934년 충청남도 보령(保寧)에서 출생했다. 연세대 영문과에 재학 중이었던 1956년, <문학예술>에 단편 <포인트>와 <단면(斷面)>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 1967년에는 단편 <하오의 순유>로 현대문학 신인문학상을, 1983년에는 중편 <겨울 잠행>으로 대한민국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에는 <사각>(1958), <신지 군>(1962), <꿩 한 마리>(1965), <하오의 순유>(1967), <겨울 잠행>(1983), <모래 헤엄>(1982) 등의 중·단편과, ≪그 어둠의 종말≫(1980), ≪사랑의 섬≫(1983), ≪새벽 기행≫(1989), ≪타조의 꿈≫(1989), ≪악령의 늪≫(1994) 등의 장편이 있다.
그의 소설은 “일상의 타성에 의해 마멸되어 가는 인간 존재와 그 존재성, 외부 세계에 대한 인식과 그에 대응해 가는 자세, 조직의 메커니즘에 의해 파괴되어 가는 인간성 등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가 이루어지며, 그것을 통해 진정한 자아 찾기의 미로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최상규는 문학 연구자들 사이에서 작가보다는 문학 이론 번역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제럴드 프랭스의 ≪서사학이란 무엇인가≫, 웨인 부스의 ≪소설의 수사학≫, 시모어 채트먼의 ≪원화와 작화≫, 로버트 홀럽의 ≪수용미학의 이론≫, 찰스 메이의 ≪단편소설의 이론≫ 등 다수의 이론서들이 그의 번역을 거쳤다. 그의 지인 김병욱은 “그는 한 권의 이론서를 번역하고 나면 반드시 한 편의 소설을 창작하곤 했다”고 회고하고 있는데, 여기서 최상규 소설이 보여주는 세련되고 실험적인 서사 기법들의 근원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문학 이론과 창작, 양자에 걸쳐 서사적 모험과 모색을 추구한 최상규의 문학적 삶은 1994년 ≪악령의 늪≫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동시에 자연인 최상규의 삶 또한 악화된 간경화로 60년의 길지 않은 생애를 마친다.
엮은이
박연옥은 1971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경희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현재 마을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에서 공부와 일상을 수련하고 있다. 2007년 세계일보 문학평론에 당선되었다. 쓴 책으로는 ≪문탁네트워크가 사랑한 책들≫(2019), ≪영혼과 정치와 윤리와 좋은 삶≫(2020)이 있다.
차례
사각
신지 군
열외
꿩 한 마리
모래 헤엄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요는 그 ‘번득임’이야. 그게 굉장히 귀한 거야. 내 일생에 한 번 있었던 일이고 영원히 다시 있을 수 없는 거지. 그때 나는 살았어. 내 한평생보다 더 긴 인생을 살았지. 무슨 충동으로 그걸 느꼈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그 모든 결정이나 결단조차도 초월한 그리고 의미를 초월한 확고한 그리고 냉담한 결정된 마음… 내가 말솜씨가 없어 정확히 표현하기가 어렵지만… 그게 바로 세계를 지배하는 원리인지도 모르지. 그 원리에 의해 나는 산다. 사각 안에 들어서 위험이니 안전이니 생각한 것은 쓸데없는 낭비의 사치였지.
-<사각>에서